87년 4월 13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 4·13 호헌조치 특별담화

1985년 2월 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강력한 야당이 출현했다. 양김(DJ·YS)이 이끄는 신민당의 출현이었다.신민당 등은 직선제 개헌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임기내의 개헌불가 입장을 1986년 국정연설에서 발표하였다. 5공 정권의 이러한 방침에도 불구하고 개헌논의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신민당과 시민단체는 ‘1천만 개헌서명운동’을 개시하는 등 전국적으로 직선제개헌의 열기가 확산되었다. 이에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하여 평화적인 정부이양과 서울 올림픽 등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하여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개헌논의를 지양하고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을 결정하겠다는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4·13호헌조치에 대하여 재야인사와 신민당 등은 호헌조치를 분쇄하고 민주개헌 쟁취를 목표로 하는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는 곧 ‘6·10 항쟁’으로 이어졌다.

1983년 4월 대도 조세형,법원에서 탈주

절도혐의로 2심재판을 받던 대도 조세형이 지난 83년 4월 14일 옛 서소문 대법원청사내 구치감 창문을 뜯고 탈주했다. 조세형은 탈주후 115시간만에 경찰의 총탄을 맞고 검거됐다. 그는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재벌 회장과 고위관료 등 부유층과 권력층만을 대상으로 물방울 다이아몬드와 수억대 현금 등 전대미문의 절도 행각을 벌였고, 훔친 금품중 일부를 보육원이나 거지 등에게 나눠주는 행동으로 ‘대도’, ‘의적’으로까지 불리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지난 98년 11월 출감한 조씨는 “신앙인으로서 거듭 나겠다”는 갱생의지를 밝히며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었다.또 경비보안업체 자문위원으로 범죄예방에도 앞장서 왔으며 16세 연하 여성사업가와 결혼,아들을 낳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 일본에서 또다시 도둑질을 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1994년 4월 16일 하나회 장성 8명이 보직 해임되고, 하나회 출신 중장급 이상 장성 모두 전역

하나회는 1963년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 졸업생들에 의해 결성된 육군내 사조직의 하나. 그 뿌리는 육사 11기생의 친목모임인 ‘칠성회’.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영남출신 육사 11기생 7명이 초급장교시절이던 58년에 친목단체로 결성한 ‘칠성회’는 박정희 대통령의 후원에 힘입어 군부내 요직을 장악하면서 후배장교들을 끌어들여 62년에 하나회로 확대, 발전하였다. 하나회는 88년까지 기별회원 위주로 연2∼3회 모임을 갖는 등 회원간 긴밀한 유대관계를 지속하면서 군부내 요직을 독점해 왔으며 회원들은 진급과 보직에서 상당한 특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73년 윤필용사건으로 해체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꾸준히 비밀 사조직을 유지해 79년 12·12 사태와 5공화국 창출에 큰 역할을 했다. 12·12쿠데타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장교들의 대부분이 하나회 출신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하나회 출신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은 국보위 인선작업과 민정당 창당과정에 깊숙히 관여하였다.

1960년 4월19일 4·19 혁명 일어남

1960년 4월 19일 4·19혁명이 일어났다.4·19혁명은 정부수립 이후, 헌법을 고쳐가며 영구집권을 꾀했던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특히 자유당정권이 60년 3월 15일 대통령선거에서 부정선거를 획책, 시민들의 반정부 항쟁의 도화선이 된다. 3월 15일 마산에서의 대규모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있었고, 이어 4월 19일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됐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자유당 정권이 붕괴됐다.4·19혁명은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학생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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