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 분당선 양재시민의숲역에 내렸다. 오전은 가을, 오후는 여름이다. 햇살이 뜨겁다. 어느새 땀이 목덜미를 적신다. 양재천 제방 따라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있다. 시원한 그늘이 반갑다. 눈 아래 흐르는 양재천은 깨끗하고 맑다. 물밑의 작은 돌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투명하다.

매헌시민의 숲.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매헌시민의 숲.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매헌시민의숲.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매헌시민의숲.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 양재천 1995년 국내 최초로 자연형 하천 복원사업 추진
- 매헌, 나는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사랑이 부모사랑, 형제사랑보다 더 강의한 것을 깨달았다

양재천은 1995년 국내 최초로 자연형 하천 복원사업이 추진됐다. 천연기념물 황조롱이와 수리부엉이 등이 서식하고 있단다. 나무 사이로 지나는 바람을 힘껏 마셨다. 숲 향이 코를 찌른다. 매헌시민의숲으로 들어가는 영동1교를 건너다 양재천과 제방을 돌아봤다.

천연기념물 황조롱이와 수리부엉이 서식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과 서울 안산의 메타세쿼이아 숲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답다. 15m가 넘는 키다리, 메타세쿼이아가 수십m를 두 줄로 도열하고 있다. 양재천 길은 정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다.

필자는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볼 때마다 관찰하는 게 있다. 나무의 키다. 이를 확인하는 버릇은 지난해부터 생겼다. 국립수목원(광릉)을 방문했을 때 한 숲 해설사에게 들은 얘기 때문이다. 그는 서로 연결된 뿌리가 부족한 영향을 서로 나눠 갖는다라면서 그렇다 보니 무리 진 메타세쿼이아는 나이, 일조량, 저장양분 상황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생육상태를 보인다라고 말했다. 양재천의 메타세쿼이아 역시 키가 아주 고르다.

그렇다. 메타세쿼이아가 화석식물이다. 화석식물은 중생대(25,000만 년 전 ~ 6,500년 전)부터 살던 나무다. 유구한 세월 동안 겪었을 수많은 멸절의 위기를 넘긴 방법이 바로 상부상조였다.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면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메타세쿼이아는 가진 나무못 가진 나무가 없는 셈이다.

양재천. 사진=김겨은 여행작가
양재천. 사진=김겨은 여행작가
양재천.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양재천.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26넓은 숲 수많은 거목이 즐비

영동1교를 건넜다. 남쪽 구역 매헌시민의숲이다. 말 그대로 숲이다. 26의 넓은 숲에는 수많은 거목이 짙은 초록을 자랑하고 있다. 햇볕 한 줄기도 허용하지 않는다. 우거진 나무가 수천 그루는 될 듯하다. 숲속에서는 현대·기아자동차 트윈 빌딩과 aT(한국농수산물유통공사) 빌딩조차 삭막해 보이지 않는다. 강남에 이런 울창한 숲이 있다는 게 놀랍다. 매헌시민의숲을 소개한 시민의숲 발자취’(안내판)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초(19861월 개장)로 공원에 의 개념을 도입한 공원이란다. 공원이면 공원이고, 숲이면 숲이지 숲 공원은 뭔가. 또 그것들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의 의미를 사전을 찾았다.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들어선 곳이라고 되어 있다. , 그렇다. 매헌시민의숲에는 무성한 풀이 없다. 크고 훤칠한 나무가 정원수처럼 보인 까닭이다.

공원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나무 사이에 검은색 플래카드가 보인다. ‘추모 삼풍참사 502명 28주기(2023629)’라고 쓰여 있다. 추모 플래카드 너머에 삼풍참사위령탑이 숨어 있다. 28년 전, 그날이 악몽처럼 되살아난다. 대참사였다. 한순간에 502명이 죽었다. 30명은 실종됐다. 부상자는 937명이었다. 부실 공사가 원인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철근 부족과 지판(지지대) 누락이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삼풍백화점 위령탑이 매헌숲에 있는 까닭

그런데 왜 삼풍백화점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매헌시민의숲에 위령탑이 있는 것일까. 붕괴지점과 위령탑은 무려 6km나 떨어져 있다. 붕괴 현장 옆에 있는 삼풍아파트의 가격 하락을 우려한 주민의 반대 때문이었다. 금싸라기 땅을 빈터(추모공원)’로 둘 수 없었던 것일까.

무너진 삼풍백화점 터에는 최고급 주상복합 건물인 아크로비스타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 아파트를 지나면서 삼풍백화점 붕괴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묻고 싶다. 질문이 꼬리를 문다. 정말 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사고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길 바라긴 한 것일까. 그때와 달라진 것은 뭔가. 정말 위령탑 세움 글에 쓰인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일어난 일일까. 최근에 발생한 광주 아이파크 신축아파트 붕괴 사고는 무엇인가. CJ건설이 시공한 인천 검단아파트 지하 주차장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인가. ‘순살(철근 없는) 아파트가 허물어진 게 아닌가. 모두가 공모해서 공사비를 빼돌린 게 아닌가. 모두가 공범이다. 화가 난다. 수많은 희생자는 이기주의의 먹잇감이었던 셈이다. 만일 손톱만큼의 사회적 추모 의식이 존재했다면 인천과 광주 사고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서 아무것도 배운 게 없던 셈이다.

추모 공간도 마찬가지다. 20117월 우면산 산사태로 15명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의 원혼을 위로하는 일상의 추념’(2018)도 우면산이 아닌 매헌시민의숲에 있다. 아무튼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존경스러워 보인다.

매헌시민의숲 남쪽 구역은 추모공원이 되어 가고 있다. 위의 두 추모시설 이외에도 유격백마부대 충혼탑, 대한항공 858편 위령탑도 있다. 이들 추모시설을 돌아봤다. 우리의 현대사는 왜 이렇게 뒤엉켜 있는 것일까. 가슴이 아프다. 더 이상 비극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삼풍참사 위령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삼풍참사 위령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대한항공858편 위령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대한항공858편 위령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유격백마부대충혼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유격백마부대충혼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윤봉길 의사 기념관...그의 일생 활동 생생

매헌로를 건너 매헌시민의숲 북쪽 구역으로 왔다. 한산하기는커녕 호젓하던 남쪽 구역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지친 심신을 달래는 수많은 사람이 공원에 넘쳐났다. 양재천 천변의 숲을 내 집 정원처럼 즐길 수 있는 서초구민이 부럽다. 북쪽 구역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은 1988년 국민 성금으로 건립됐다. 기념관에는 윤 의사의 생애와 의거 활동을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와 사진 2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물을 하나하나 보면서 윤 의사의 독립 간절함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윤 의사의 의거는 동북아 정세의 전환점이 됐다. 당시 독립에 절대적 협조가 필요했던 한국에 대한 중국의 감정은 극히 좋지 못했다. 일제의 술책으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벌인 유혈사태인 지린(吉林) 완바오산(萬寶山) 사건(1931) 때문이었다. 19324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서의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중일전쟁의 전초전이었던 상하이사변의 주역이었던 일본 관동군 수뇌와 제국주의 신봉자를 일거에 처단했다.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 거류 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은 폭사했다. 3함대 사령관 노무라 키치사부로는 시력을 잃었다. 일본군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도 중상을 입었다. 중국 국민당 지도자였던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윤봉길이가 해냈다라고 극찬했다.

매헌윤봉길의사 기념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매헌윤봉길의사 기념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기념관내 전시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기념관내 전시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기념관 전시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기념관 전시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장부가 뜻을품고 집 나서면 살아돌아오지 않는다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라고 독립운동의 뜻을 세우고 중국에 도착한 지 약 2. 그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비밀결사 단체인 한인 애국단원인 이봉창 의사가 19321월 도쿄 경시청 앞에서 히로히토 일왕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는 게 그것이다. 사실 이봉창 의사의 수류탄 투척은 윤 의사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다. 일본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 역사 사상 단 한 번 일왕 테러가 있었다. 1871육식 금지법을 폐지했을 때다. 흰옷을 입은 5명의 자객이 일왕 암살을 시도했던 게 유일했다. 이 의사 의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윤 의사는 즉시 김구 선생을 찾아갔다. 한국 애국단에 들어간다. 그리고 3개월 뒤 천장제(히로히토 일왕 생일)와 상하이사변 승전 기념행사가 열린 1932429, 윤 의사는 홍커우공원의 거사를 단행한다. 윤 의사는 525일 오전 7시 가나자와 육군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됐다. 당시 윤봉길 의사는 24살의 청년이었다.

기념관 1층 전시관 중앙홀 동상 앞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말씀을 다시 새긴다.

나는 부모의 사랑, 형제의 사랑보다 한층 더 강의한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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