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7일 일요일 오후다. 또다시 낯선 길을 떠난다. 일명 강남4(강동·송파·강남·서초)를 벗어나 동작구로 행선지를 옮겼다. 동작구의 첫 목적지는 노량진이다. 노량진역에 내렸다. 노량진역은 1899918일 우리나라 철도의 새역사를 연 곳이다. 최초 철도인 경인선(노량진~제물포, 33.2km)의 시·종착역이었다. 1907년 한강대교(1한강교·인도교)가 건설됐다. 한강인도교는 정조가 배다리를 놓았던 자리에 설치되었다. 노량진은 한때 서울의 교통 관문 역할을 했던 셈이다. 그것도 강남에서 유일한 교통요충지였다. 다시 말해 원조 강남이었던 셈이다.

사육신역사공원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육신역사공원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1899918일 우리나라 철도의 새역사를 연 역사(驛舍)
- 임진왜란 사육신묘 훼손 무덤 수습 박팽년 7대손 박숭고

노량진이란 지명은 한강에서 유래한다. 옛날 한강은 구간별로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노들강(이촌에서 노량진까지), 송파강(옛 잠실섬 근처), 용산강(용산 부근)이라고 하는 것처럼. 노량은 노들()의 한자식 표기다. 노들은 백로가 뛰어놀던 징검다리라는 뜻이다. 여기에 아주 오래전부터 나루터가 있었다. 노량진()으로 불린 이유다. 노량나루는 광나루, 마포나루, 한강나루, 양화나루 등과 함께 한양 5대 나루로 꼽혔다. 하지만 오늘날 노량진에서 강남을 연상하지는 않는다. 대신 학원공시생을 떠올린다.

한강에서 유래된 노랑진지명

노량진역 풍경은 후발주자 강남4구와는 사뭇 달랐다. 품위 있는 명품매장도 찾기 어려웠다. 분위기 좋은 카페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블링블링한 차림의 여성도 눈에 띄지 않았다. 노량진역 역사 건너편에 있는 건물은 학원 일색이다. ‘00공무원학원’, ‘00수도건축토목학원’, ‘00임용고시학원’, ‘스피치면접학원……. 학원 벽은 광고 폭탄을 맞은 듯 너저분하다. 마치 찢어지게 애달픈 청년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노량진 학원생 모두의 미래에 축복이 함께 하길 기원해 본다.

홍살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홍살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불이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불이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노량진역에서 한강대교로 방향을 잡았다. 400m 걸었다. 왼편으로 우거진 숲이 나타났다. 성역화된 사육신공원이다. 홍살문이 탐방객에게 맞는다. 홍살문의 빛깔이 유난히 붉다. 충신에 대한 예의를 다하라는 경고일까. 홍살문을 통과하자 불이문(不二門)이 나타났다. 불이문은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이다. 이 문으로 통과하면 속세를 벗어나 해탈의 세상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사육신묘의 불이문은 전혀 다른 뜻이다.

세조는 1455년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았다(계유정난). 사육신을 비롯한 17명이 단종복귀운동(14566)을 주도했다. 거사일은 세조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한 명나라 사절단을 맞는 잔칫날이었다. 거사 동지였던 김질이 변심했다. 단종복귀운동에 참여했던 충신은 일순간 역적으로 몰렸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한 지 7일 만에 처형됐다. 연좌제에 따라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도자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다. 조선 역사상 단일사건으로 가장 큰 희생자를 낸 정치 사건이었다.

[사육신공원, 조선정치사건 100여명 사형]희생자 중 특별히 왕과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여섯 충신을 사육신이라고 한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가 그들이다. 당대의 최고 윤리는 불사이군(不事二君·두 명의 임금을 모시지 않는다)이었다. 사육신은 숱한 고문(국문)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다. 죽어가면서도 왕과 신의를 지켰다. 그들의 성스러운 죽음은 대를 이어 백성의 입에 전해졌다.

사육신을 충절의 상징으로 그린 최초의 사료는 남효원이 지은 추강집에 수록된 육신전이다.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를 모은 <육신전>에서 사육신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온다. 그뿐만 아니라 사건의 전모와 사육신의 전기 그리고 기록자의 세평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불이문은 바로 이러한 사육신의 절개를 상징하는 문이었다. 불이문을 들어가자 위패가 모셔진 의절사(義節祠)가 보였다. 사육신 7명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의절사로 향했다. 기존에 알려진 6명 이외에 지난 1982년 사육신에 추가된 김문기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한 줄로 늘어선 위패 앞에 섰다. 무소불위의 세조에게 대항했던 사육신, 그들의 결단과 짧은 운명을 긴 호흡에 담아본다. 나이 어린 단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절의를.

의절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의절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의절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의절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육신 위패 모셔진 의절사

진정 역사는 승자의 편인가. 함석헌 선생이 씨ᄋᆞᆯ의 소리에서 그 물음의 답변을 찾는다.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 뒤에 우리는 ()’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를 알았겠는가라고. 위인의 무덤은 필자를 역사를 생각하는 인간으로 만든다.

의절사 앞에는 1782(정조 6)에 세워진 신도비와 육각형의 사육신비도 둘러보았다. 사육신비는 숙종 17(1691)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민절서원의 터에 세워졌다.

의절사 뒤편에 난 협문을 지나자 돌계단이다. 이 계단을 오르면 사육신묘가 나타난다. 묘지가 있는 마루터기는 일면 아차고개로 불린다. 단종 복귀 거사 직후 영등포 이남에 살던 어떤 선비가 사육신 처형의 부당성 간()하기 위해 도성을 향하여 말을 달렸다. 이 고개에 이르렀을 때 육신이 이미 군기감터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차, 늦었구나하고 한탄하던 고개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고문당하고 사지찢기는 거열형까지

신도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신도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육신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육신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17명 중 15명은 불에 달군 쇠로 지지는 고문을 당했다. 그 뒤에 군기감터(지금의 프레스센터 부근)에서 사지를 찢기는 거열형을 당했다. 잘린 목은 저잣거리에 걸렸다. 아무도 시신을 수습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역적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3일째 되던 날, 한 거지 행세를 한 사람이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그리고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 장군의 효수된 머리를 수습해서 한강 건너 현재의 사육신묘에 모셨다. 거지 차림으로 나타난 사람은 매월당 김시습(연려실기술)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사육신묘는 훼손됐다. 다시 무덤을 수습한 것은 박팽년의 7대손 박숭고다. 성승 장군의 묘는 끝내 찾지 못해 4분의 묘지만 정비했다. 그런데 어떻게 멸문지화(남성)를 당한 박팽년의 후손이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역사 속 반전이 숨어 있다. 박팽년의 남자 친족은 모두 능지처참이나 참형을 당했다. 부인 전옥금은 정인지 가문의 여종을 보내졌다. 당시 전옥금은 임신 중이었다. 사내를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관비로 삼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불행은 불행을 낳는다. 아들이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박팽년 집안 여종도 임신 중이었다. 하늘이 도왔다. 딸이었다. 전옥금과 여종은 갓난아이를 바꿔치기했다. 박팽년의 후손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사육신 중 유일하게 대를 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숭고는 박팽년만이 아니라 사육신을 극진히 살폈다.

사육신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육신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육신묘, 김경은=여행작가
사육신묘, 김경은=여행작가

박팽년 사육신중 유일 후손 아이 바꿔치기

그럼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를 제외한 하위지와 유성원 무덤은 무엇일까. 가묘다. 서울시에서 1977~1978년 사육신묘 정화사업을 벌이면서 하위지, 유성원의 가묘를 추가로 조성, 사육신묘를 완성(?)했다. 그런데 사육신묘라면 6분을 모셔야 하는 게 당연하다. 왜 무덤이 7기가 있는 것일까. 가묘를 쓸 때 김문기도 사육신묘에 봉안해달라는 탄원서가 제출됐다. 국가편찬위원회가 이를 수용, 김문기도 사육신에 포함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사육신공원에는 7분의 묘지와 신위를 모셔져 있다.

마루터기를 둘러봤다. 무덤 크기는 작았다. 잔디도 성겼다. 어떤 묘비석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비석에는 이름조차 없다. 성씨만 있다. ‘성씨지묘’, ‘하씨지묘처럼. 역적으로 몰린 사육신을 지키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절개를 지켰던 역사적 인물의 무덤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애잔한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어찌 보면 그나마 다행이다. 사육신묘가 아직 남아 있는 그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