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 주에 이어 동작 충효의 길을 걸을 계획이다. 길을 나서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우산을 챙겼다. 집 앞에서 상도동으로 직행하는 버스가 있다. 환승을 위해 상도터널상도동 정류장에서 내렸다.

국사봉 정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국사봉 정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 '지덕양명폐세자 양녕대군 상징, 지덕사
- 국사봉, 풍수지리상 달리는 호랑이의 기세

길가에 창문 형태의 디자인을 한 멋진 건물이 있다. 김영삼 기념도서관이었다. 필자는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인연이 있다. 기자 생활을 하던 199214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자유당을 출입했다. 김영삼 민자당 대선후보를 근접 취재했다. 현장에서 문민정부의 탄생을 목도했다. 그때의 감격이 되살아난다. 먼저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국가지도자를 만나기로 했다.

스터디 카페 스타일김영삼 기념도서관

김영삼기념도서관을 들어갔다. 내부구조가 독특하다. 높은 천고와 독특한 조명들, 그리고 높고 둥그런 서가, 그 한편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명의 사서가 인상적이다. 도서관 내부는 스터디카페 스타일이다. 커뮤니티 공간을 강조했음을 곧 알 수 있다. 1층 한편에는 김 전 대통령의 전시실인 ‘YS AGORA-민주주의의 새벽을 열다가 있다. 그의 삶의 궤적과 민주주의 여정, 치열했던 민주주의 역사가 시기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YS에 관한 기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마을버스로 갈아탔다. 국사봉 입구로 가기 위해선 마을버스를 타야 했다. 갈아탄 마을버스가 목적지인 경향 렉스빌에 도착할 무렵이다. 차창으로 궁궐이 연상되는 돌담에 쌓인 고가들이 지나간다. 전형적인 상류계층의 한옥 처마도 보인다. 예사롭지 않다. 운이 좋았다. 바로 양녕대군의 이제 묘역이다. 이제는 양녕대군의 본명이다. 유적지를 찾는 수고로움을 피할 수 있었다.

김영삼 기념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김영삼 기념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김영삼 기념관내 전시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김영삼 기념관내 전시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양녕대군 이제 묘역 앞에는 지덕사(至德祠)’라는 글이 돌에 새겨져 있다. 지덕사는 묘역 안에 있는 양녕대군의 사당이다. 지덕사 정문 현판 이름은 양명문(讓名門)’이다. ‘지덕양명은 폐세자인 양녕대군의 정치적 운명을 상징하는 단어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적장자다. 15년간 세자였다. 그 자리를 동생인 충녕에게 양보했다. 왕조 국가에서 세자 교체는 엄청난 정치적 사건이다. 그 자체가 권력 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전은 없었다. 양녕대군은 순명했다. 성군이 될 충녕의 자질을 알아보고 스스로 왕을 포기했다는 야사가 언급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세종에게 양보한 양녕대군 묘역 인상적

어떻든 지덕은 주나라 시조인 고공단보의 장남인 오태백이다. 공자가 붙여준 이름이다. 태백은 동생인 계력에게 왕권을 양보했다. 지덕은 인격이 덕의 극치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공자가 보낸 최고의 찬사였. 태백의 결단이 없었다면 주나라의 태평성대를 이룬 문왕과 무왕이 출현할 수 없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조는 그런 양녕대군을 지덕이라는 이름을 직접 부여했다. 양명은 말 그대로 이름을 양보했다는 의미다. 여기서 이름은 왕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왕좌를 양보함으로써 조선 최고의 성군인 세종의 시대를 열었다는 뜻인 셈이다.

양명문(讓名門) 현판이 붙은 정문에는 봄에 붙였을 춘첩(去去益淸 至德遺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세월이 지나가도 지덕의 풍습이 계속된다는 뜻이다. 사려 깊은 공존의 필요성이 커지는 시대적 상황에서 아름다운 양보가 갖는 생명력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지덕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지덕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지덕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지덕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양녕대군의 이제 묘역을 찾는 수고를 덜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지덕사의 문이 닫혀있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개방한다는 안내문이 적혀 있다. 입구에는 적혀 있는 지덕사 소개를 꼼꼼히 읽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사당은 숙종의 어명으로 양녕대군의 덕망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원래 숭례문 밖 도동에 있었는데 1921년 이곳으로 옮겼다. 조선 최고의 명필가였던 양녕대군의 글씨(후적벽8폭병풍 초서체 각판, 숭례문현탁본)와 정조가 지은 지덕사기 등 귀중한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태극기 휘날리는국사봉 전국 23개 동명

아쉬움을 뒤로 하고 국사봉으로 향했다. ‘길찾기안내에 따르면 마을버스로 네 정거장은 가야 한다. 주위를 둘러봤다. 국사봉 터널이 눈앞에 있다. 터널이 난 산이 국사봉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굳이 10여 분 이상 버스를 기다릴 필요가 없을 듯했다. 그랬다. 경향렉스빌을 지나자마자 국사봉 산책로가 나타났다.

산속으로 들어오자 가을의 본색이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산색은 푸르름이다. 하지만 나무색은 푸르지 않았다. 나뭇가지에는 매달린 잎새는 갈색과 붉은색이다. 산책길은 이미 낙엽이 된 이파리로 덮여있다. 시커먼 비구름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출 수 없다. 계절 변화를 실감할 즈음, 어느새 국사봉 정상에 도착했다.

국사봉 정상은 다른 산과 달랐다. 마치 산속의 야외 헬스장과 공원을 합쳐놓은 듯했다. 꽤 높은 게양대에 태극기가 날리고 있는 게 이채롭다. 여기에서 휘날리는 태극기의 의미는 무엇일까.

국사봉 산책로.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국사봉 산책로.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우리 민족은 산을 영험하게 여겼다. 산은 땅과 하늘이 만나는 곳이다. 그곳에서 국태민안을 빌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대체로 국가와 연관된 상징적 의미를 갖는 산에 국사봉이라는 이름이 붙는 경우가 흔했다. 얼마 전 다녀왔던 청계산에도 국사봉이 있다. 내친김에 인터넷에서 국사봉을 검색했다. 전국에 23개의 국사봉이 있다. 한자로도 國思, 國師, 國士, 國祀, 局司, 國事 등 다양하다. 각각의 국사봉은 산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대체로 역사적 사건 혹은 구전된 설화가 그 성격을 규정한다.

상도동 국사봉의 옛 이름은 삼성산이다. 사자봉이라고도 불렸다. 이것이 국사봉(國思峰)으로 바뀐 데는 양녕대군과 관계가 있다. 왕의 형인 양녕대군이 삼성산에 올라 멀리 경복궁을 바라보며 동생(세종)과 나라를 걱정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전하는 얘기다. 그래서 나라를 생각한다는 의미의 국사봉이라고 불렸다.

양녕대군 동생과 나라 걱정 국사봉 유래 

국사봉은 해발 179m밖에 되지 않는 야트막한 산이다. 하지만 그 크기로 얕잡아 볼 수 없는 큰 산이다. 동작구민들은 국사봉을 동작구의 지붕이라고 부른다. 이 같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국사봉이 풍수지리상으로 달리는 호랑이의 기세를 하고 있다. 산의 형세가 변화가 넘치고 기세가 웅장한 산이라는 얘기다. 지나친 것은 늘 미치지 않는 만 못한 법이다. 풍수지리에서 날뛰는 호랑이는 길지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엎드린 호랑이형상을 훨씬 높이 친다.

하지만 동작구민은 걱정하지 않는다. 국사봉의 호랑이는 이미 길들었다. 국사봉 자락에 세워진 사자암때문이다. 사자암은 조선 태조 5(1396)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호랑이에 맞설 유일한 동물인 사자가 포효하는 형상의 자리에 사자암을 지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나무테크 계단과 산책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왔다. 발아래 사자암이 보인다. 암자인 탓인가. 전각들이 많지 않았다. 경내로 들어섰다. 본당인 극락보전의 기와 불사가 한창이다. 그런데 공사 중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깔끔했다. 거기다가 인척도 없다.

조선 태조 무학대사 창건한 사자암 전설

사자암.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자암.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자암 경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자암 경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자암 경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자암 경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경내를 둘러봤다. 흔히 볼 수 있는 사찰의 구조가 아니다. 사찰도 개성의 시대를 맞은 것일까. 구조나 형식도 제각각이다. 낯선 게 이상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생경함까지 지울 수는 없다. 전각이 기다란 일자형이 주를 이루고 있다. 현대적 감각으로 개조한 것인지 궁금하다. 일주문에서 볼 수 있는 전각에는 현판이 없다. 현판 없는 전각, 상상이 안 된다. 뒤로 돌아들어 가자 절 냄새가 난다. 현판도 보인다. 그렇다고 치더라도 산을 향한 현판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생소함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범종각에 사자의 울음소리를 뜻하는 사자후(師子吼)’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범종에도 사자후종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낯설음을 필자의 무지 탓으로 돌리고 경내를 다시 돌아봤다.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게 있다. 요사채 문턱에 있는 철 이른 털신이 두 켤레다. 산사는 이미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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