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가을비가 흠뻑 내렸다. 비 온 뒤 가을하늘은 더 높다. 굳이 햇살을 피할 이유도 없다. 가을하늘은 높고 말은 살이 찐다. 그렇다. 필자도 정신을 살찌우고 싶다. 독서를 하는 대신 박물관을 찾았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이다.

숭실대 캠퍼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숭실대 캠퍼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기독교박물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기독교박물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성지순례한국 기독교의 상징이자 대표적 박물관
-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참배가던중 장승 설치

숭실대는 1897년 평양에서 세워졌다(숭실학교). 4년제 대학 과정 교육을 시작(1906)한 최초의 근대 대학이다. 특히 민족운동의 중심 대학이었다.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양성했다. 을사늑약 반대 투쟁과 105인 사건, 조선국민회, 평양지역 3·1운동, 광주학생운동 등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항일 민족운동가를 배출했다. 일제가 숭실대를 배일 운동의 온상’,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사람)의 소굴등으로 부른 이유다.

최초 근대대학이자 민족운동의 산실 숭실대

숭실대는 개교한 지 불과 41년만인 1938년에 문을 닿았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반대하기 위해서 자진 폐교한 것이다. 광복과 분단, 전쟁의 혼란을 겪으면서 1954년 서울에서 새로 개교했다.

지하철 7호선 숭실대입구역에서 내렸다. 4번 출구와 대학 정문이 맞닿아 있다. 정문 앞에 있는 종합안내도 앞에 섰다. 일종의 캠퍼스 지도다. 안익태기념관, 조만식기념관, 한경직기념관, 베어드홀, 형남공학관…….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기념관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일까. 박물관 관람을 뒤로 미뤘다. 위인을 먼저 뵙는 게 예의가 아닐까. 기념관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교정에 들어서자마자 독특한 디자인을 한 건물이 보였다. 안익태기념관이었다. 애국가 작곡자이자 동양인 최초의 베를린필하모니오케스트라 지휘자였던 안익태 선생을 만난다는 자체가 기쁨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익태 전시실을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1층 로비에 안익태 선생의 사진과 이력 그리고 애국가와 숭실대의 인연 그리고 베를린필하모니오케스트라 지휘 사진이 붙어 있을 뿐이다. 뭔가 좀 아쉽다. ‘이력과 인연을 꼼꼼히 읽었다. 요지는 이렇다. 안익태 선생은 1918년 숭실학교를 입학했다. 이듬해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교 조치를 당했다. 안익태 선생의 친필 오선지 악보는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한국기독교박물관과 붙어 있는 한경직기념관, 원형광장을 맞은 편에 있는 조만식기념관, 숭실대 설립자(윌리엄 마튼 베어드)를 기리는 베어드홀, 서울 캠퍼스를 재건한 김형남 박사의 이름을 딴 형남공학관도 안익태기념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름짓기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숭실대 출신의 위인을 통해 숭실의 가치를 정립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숭실대가 모교 출신의 위인을 기리는 방식인 셈이다. 아쉬울 필요가 없다. 그것이면 됐다.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위인의) 이름을 부를 때 (숭실이) 꽃이 될 수 있다라면.

위인을 딴 숭실대 건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위인을 딴 숭실대 건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숭실대 건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숭실대 건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기독교 역사 1300여년 전 통일신라시대까지

한국 기독교의 상징이고 대표적 박물관인 한국기독교박물관으로 들어갔다. 필자는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런데도 성스러움이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다. 마치 성지 순례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1층에 기독교 관련 역사 자료, 유물이 전시돼 있다. 한국기독교사 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역사가 무려 1,300여 년 전 통일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놀랍다. 그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경교 돌 십자가십자가 나무 장식이 그것이다. 경교는 7세기에 비단길을 따라 중국 당나라에 전해진 고대기독교다. 이것이 8~9세기 무렵 통일신라에 전해졌다는 설명이다. 이 십자가 형태의 돌은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됐으며 통일신라 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기독교, 또 우리나라의 초기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한국개신교는 세계 선교 역사상 독특한 역사를 하고 있다. 그것은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입국하기 전에 이미 한글 성경과 찬송가를 출판했다. 한국 최초의 성경인 예수성교전서를 비롯하여 마가전복음서언해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이 1790년 정약종에게 수여한 세례증명서,찬성시(찬송가)등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는 한국개신교가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자생적으로 수용됐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외국 선교사들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각종 서적과 교리서 그리고 일제 아래 한국교회의 성장과 발전과 각종 신앙 운동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다. 2, 3층은 숭실의 역사’, ‘근대화와 민족운동사그리고 고고역사실로 꾸며져 있다. ‘고고역사실에서 가장 눈길을 끈 유물은 익히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국보 제141호인 <정문경(精文鏡)>이다. 정문경은 청동기 문양 중 가장 뛰어나다는 문양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 보물이다. 잔무늬거울(정문경) 앞에 돋보기가 비치되어 있다. 눈을 갔다 댔다. 가는 선을 이용한 기하학적 문양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이 작은 거울에 선이 몇 개나 될까. 무려 13,000개란다. 이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오늘날의 주조 기술로도 이렇게 가늘고 정교한 무늬의 거울을 만들 수 있을까. 또 비파형 청동기 칼을 만드는 거푸집(비파형 동검 거푸집, 국보 제231)도 전시되어 있다. 기독교박물관에서 우리나라는 청동기를 자체 제작하고, 그것도 가장 뛰어난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역사적 사실을 확인한 것은 뜻밖의 소득이다.

정문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정문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다뉴세문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다뉴세문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청동기 문양중 가장 뛰어나다는 보물 정문경

근대화와 민족운동사에서는 지도가 볼거리 중 으뜸이다.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다는 양의현람도’(1603년 중국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만든 세계지도), 동반구와 서반구를 나누어 그린 세계 최고의 지도인 곤여전도’(중국 선교사 베르비스트, 1674) 그리고 중국을 중심에 둔 천하고금대총련람도’(김수홍), ‘여지전도’, ‘청구도’(김정호가 그린 우리나라 전도), 대동여지도 그리고 대동여지도 판목(대동여지도를 인쇄하기 위해 김정호가 목판에 새긴 판목), 최한기가 만든 지구의 등이 한 곳에 전시되어 있다. 세계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우리 조상은 선교사가 전해준 지도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지하철 7호선을 타고 장승배기역으로 이동했다. 6번 출구를 나오자 동작도서관 벽면을 뒤로 하고 장승 두 개가 서 있다. 치켜 올라간 눈, 큼지막한 주먹코, 귀밑까지 찢어진 입은 우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남녀 한 쌍이 세워져 있는데 남자 장승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여자 장승엔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새겨져 있다.
 

대동여지도 판목.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대동여지도 판목.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대동여지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대동여지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장승배기는 장승박이의 합성어다. 장승을 박아 세워 둔 곳이라는 의미다. 장승은 십 리 혹은 십오 리 간격으로 세워둔 길라잡이였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노표 장승이다. 장승에는 주변의 역·(驛院)의 거리가 적혀 있었다. 그것이 1895년 갑오경장 때 역참제 폐지 이후 점차 사라져갔다. 조선을 병합한 뒤 일제가 장승을 귀신취급했다. 이 때문에 장승을 마치 서낭당이나 도당처럼 여겼다. 이것은 일본이 장승과 벅수(法首·마을수호신)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그런데 일본이 표준어 발표하면서 벅수와 장승을 구분하지 않고 장승으로 통일했다. 장승과 벅수가 같은 의미로 인식됐다. 장승 모양의 벅수는 오래된 백성의 민간 신앙의 대상이다. 마을의 수호신이다. 그런데 일본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민간 신앙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장승 모양의 벅수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는 글귀를 적어 넣은 것이다. 일제가 장승 탄압을 한 뒤부터 생겨난 일이다. 일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장승으로 바뀐 벅수도 점차 사라져 소멸했다. 그나마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장승배기라는 이름이다. 필자가 찾아온 상도동을 비롯하여 노량진, 망원동, 염곡동, 우면동, 염창동, 흑석동 등에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일본의 탄압 대상 장승...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 변신

장승배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장승배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유래설명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유래설명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상도동 장승배기는 좀 특별하다. 정조는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근교 화산으로 옮긴다. 그게 현륭원(顯隆園)이다. 그 뒤로 한해도 빠짐없이 참배했다. 1794년까지는 남태령과 과천 행궁을 지나는 길을 이용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수원에서 개최한 1795(정조 19)부터 상도동 장승배기를 경유하는 길을 새로 개척했다. 이 길로 가는 첫 행궁길에 후 상도동에 장승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이곳에 장승이 세워졌다. 그 뒤로 벅수가 된 장승도 이곳에 수없이 들어섰다. 이를 기리기 위해 1991년부터 장승 제사를 모시고 있다.

1번 국도를 만나 시흥대로를 지나 현릉원으로 가는 길은 정조의 효행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