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강(霜降, 1024)이다. 말 그대로 서리가 내린다는 날이다. 서리 맞은 가을은 한층 무르익고 있는 듯하다.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가을엔 처음이다. 낙엽 지는 쓸쓸한 가을에 현충원은 왠지 특별하게 느껴진다. 일상의 여행 같지 않다. 마치 순례 같다. 동작구 서달산의 기슭과 계곡에는 아픈 역사, 그리고 충효가 맞닿아 있다. 현충원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아픈 역사와 닿아 있다. 나도 모르게 앞 세대가 겪었던 고통의 흔적을 따라간다

충혼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충혼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충혼분수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충혼분수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나라위해 헌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모신 민족의 성역
- 호국지장사, 사실상 호국 영령의 원찰로 면모 과시

국립서울현충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을 모신 민족의 성역이다. 관악산 기슭, 서달산을 주봉으로 한강이 굽이치는 곳에 있는 현충원은 1956년에 개장됐다. 6·25 한국전쟁의 전사자를 안치했다. 당시엔 국군묘지로 불렸다. 1965년 국립시설인 국립묘지로 승격된 뒤 이름이 현충원’,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바뀐 뒤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유해 없는 용사, 11만여 위를 비롯하여 모두 179,000여 위(2018년 현재)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6.25 한국전쟁 전사자 179000여 유해 안치

현충원 정문에 도착했다. 녹슨 철판 위에 쓰인 임들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귀가 방문객을 맞는다. 이 글귀를 보자 필자도 숙연해진다. 하지만 현충원을 찾은 주목적은 나라를 위해 산화하신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게 아니다. 명당 중 명당이라는 창빈안씨 묘역과 그 주변에 있는 역대 대통령의 묘역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이왕 현충원에 온 김에 현충탑에서 묵념을 드리기로 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충성분수탑꽃시계이 있다. 마치 공원의 상징처럼 보인다. ‘묘지가 주는 어둡고 스산함은 느낄 수 없다. 엄숙함과 경건함이 한결 누그러졌다. ‘겨레얼 마당을 지나 현충탑으로 향했다. 현충탑 탑신은 하늘 중턱에 걸린 해를 완전히 가리고 있다. 가려진 해는 후광이 됐다. 현충탑은 더욱 빛났다. 마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 영령이 축복받고 있다는 증거라는 생각이 든다. 현충탑에 참배했다.

장병 묘역.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장병 묘역.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장병묘역.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장병묘역.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현충원은 천천히 돌아보려면 한나절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규모도 크고 볼거리도 많다. 임시정부요인묘소, 독립유공자묘역, 무후선열제단, 국가유공자묘역, 장군묘역, 경찰묘역, 외국인묘역 등은 지나쳤다. 대통령 묘역과 창빈안씨 묘지를 가기 위해선 1- 2-3-4-5번 장병묘역을 지나야 한다. ‘나라를 위한 희생을 기억하게 되는 길이다. 하지만 가슴이 아프다. 자유의 나라를 꿈꾸며 목숨 바친 장병은 죽어서도 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반 평도 되지 않는 무덤과 무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한 틈의 흐트러짐도 없이 서 있다. 호국 영령은 그런 불편조차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일까. 정렬한 묘비는 눈부신 흰 빛이다. 애국심에 색깔이 있다면 눈부신 흰색일지도 모른다.

왕을 낳은명당 창빈안씨 묘역을 찾다

창빈안씨 묘역을 찾았다. 서달산 능선 안쪽에 있다. 장군묘역 바로 아래다. 묘소로 가는 길에 신도비가 서 있다. 이 신도비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조선사에서 유일하게 세워진 후궁의 신도비이기 때문이다. 묘소는 단아하다. 곡장으로 둘러싸인 무덤이 있다. 500년 넘은 무덤으로 볼 수 없을 만큼 깨끗했다. 훼손도 되지 않았다. 무덤 앞에는 모표와 혼유석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묘표 이수(머리) 부분에 화려한 용 문양이 있다.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다. 무덤 주인이 왕족임을 알겨주는 듯하다. 멀찌감치 문인석 2기가 좌우에 서 있다. 홀을 들고 있다. 망주석, 장명등도 보인다.

창빈안씨 묘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창빈안씨 묘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신도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신도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풍수학계에선 창빈안씨 묘터를 최고의 명당으로 꼽는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창빈안씨 유택은 왕을 낳은 명당이다. 그는 중종 때 9살 나이로 궁궐에 입궐했다. 허드렛일하는 궁인이었다. 그는 성품이 매우 어질었다. 그게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의 눈에 띄었다. 정현왕후는 그를 중종의 6번째 부인으로 추천했다. 그는 중종과 사이에 두 아들을 뒀다. 그중 한 명이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군이다. 사실 선조는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방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종은 후사 없이 죽었다. 그를 이은 명종도 13살에 세상 떠났다. 명종의 양자가 되어 왕에 즉위하게 된다.

창빈안씨는 51세에 죽었다. 그의 원래 묘소는 원래 양주 장흥에 있었다. 그의 아들 덕흥군이 달서산 기슭으로 이장을 했다. 그 뒤에 그의 손자인 선조가 왕이 됐다. 또 그 이후로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까지 그의 DNA는 면면히 이어져 왔다. 이 때문에 창빈안씨 터를 관악사 연주암, 현충원, 한강, 용산, 청와대, 북한산까지 이어지는 1자 맥을 이루는 명당이라고 한다.

풍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일명(一命), 이운(二運), 삼풍수(三風水), 사적선(四積善), 오독서(五讀書). 일종의 가문 번성에 이르게 하는 지침이다. 아마 창빈안씨 인품의 덕을 그 후손이 본 듯하다. 그의 성품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후궁이었던 창빈안씨는 관례에 따라 중종이 죽자 삼년상을 치르고 궁궐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사람됨을 알아본 문정왕후의 배려로 죽을 때까지 궁궐에서 지냈다고 한다. 만일 선조의 후왕이 명당(풍수)의 덕을 봤다면... 그러나 거기까지다. 후왕이 백성을 위하는 마음(적선)으로 정사를 펴고 수련(공부)을 통해 세상 변화를 읽었다면 창빈 안씨의 묘터는 더욱 빛났을 것이다. 우리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명당 주변 역대 대통령 묘소가 옹기종기
창빈안씨도 세월과 변화 앞에서 그 위력을 잃고 있다. 서달산 주인의 역할을 후대에 넘겼다. 공교롭게도 창빈안씨 묘터 주변에 우리 역대 대통령 묘소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명당 운을 욕심이라도 내려는 것일까.

창빈안씨 묘소로 가는 길 바로 오른편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소가 있다. 현충원에 처음 안장된 이 전 대통령의 묘소는 마치 제단 같다. 묘역이 무려 1,653라고 한다. 계단과 조경 구역까지 포함하면 엄청나게 넓은 셈이다. 수없이 많은 계단 위 언덕에 이승만 내외의 묘지가 있다. 프란체스카 여사와 합장한 단일봉이다. 묘비, 헌시비, 기념비 등이 봉분 앞에 꼿꼿이 서 있다. 묘비에는 초대 대통령이라고 쓰여 있다. 대통령 묘역 중 유일하게 국기 게양대가 있고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김영삼 전 대통령 묘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김영삼 전 대통령 묘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창빈안씨 묘역을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이 있다. 묘역 입구에 대통령 김대중 영부인 이희호의 묘소라고 쓴 비석이 서 있다. 테라스 형태로 돌을 깐 길을 따라가면 김 전 대통령을 만날 수 있다. 묘소가 매우 심플하다. 넓지도 않았다. 단일봉이다. 담장도 없고 병풍석조차 없다. 장식석 하나 없이 달랑 비석 하나뿐이다. 더 아쉬운 것은 추모 화환도 하나 없다.

현충원 중심부 가장 높은자리 박정희전대통령 묘

묘지를 벗어나 오르던 길을 계속 올랐다. 오른편에는 장군묘역이다. 맨 꼭대기에 이르렀다. 거기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가 있다. 현충원의 중심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육영수 여사와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이 전 대통령 묘소의 2배는 되는 것 같다. 계단도 두 배나 많아 보였다. 박 전 대통령의 상징이던 검은색 선글라스가 생각난다. 묘소에서조차 박 전 대통령의 강한 카리스마를 느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의 묘소 앞에는 누가 갖다 놓은 것인지 알 수 없는 화환이 여러 개 보였다.

다시 오던 길 반대편으로 따라 내려갔다. 봉안식장을 지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역 안내표가 보였다. 김 전 대통령 묘소가 비교적 단출했다. 대신 다른 묘역에서 볼 수 없는 민주주의 비석이 서 있었다. 전직 대통령 묘소를 돌아보고 나니 궁금증이 들었다. 왜 이렇게 다른 모양을 한 것일까. 기준이 있지 않을까. 이상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 묘역과 가까운 흑석통문을 빠져나왔다. 호국지장사로 가기 위해서다. 통문 지척에 호국지장사가 있었다. 호국지장사는 서기 670년에 도선국사가 세웠다. 역시나 생각대로 창빈안씨의 능침사찰이었다. 당시에는 화장사라고 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증수하여 지금의 호국지장사 됐다. 지금은 사실상 호국 영령의 원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있다. 호국지장사 맨 꼭대기에 대자대비를 상징하는 지장보살 입상이 서 있다. 입상 뒤로 병풍 모양의 거대한 석벽이 펼쳐져 있다. 거기에는 작은 지장보살 3,000좌가 모셔져 있다.

서기670년 도선국사 세원 호국지장사

호국지장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호국지장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지장보살 입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지장보살 입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호국지장사에는 일주문이나 천왕문은 없다. 대신 사천왕 조각상이 굳건히 일주문 역할을 하고 있다. 호국지장사에는 다른 절에서 보지 못한 전각이 있다. 능인보전이다. 능인은 부처님을 통칭한다. ‘능인이란 세상을 어질게 만드는 능력을 갖춘 분이라는 뜻이다. 곧 중생을 교화하는 부처님의 마음이다. 능인보전에는 고려 초기 철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179,000여 위의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의 영면을 위한 안식처가 되어주길 바란다. 필자는 서달산 정상을 거쳐 한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사찰, 달마사를 거쳐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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