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관(官)보다 민(民) 앞세운 박정희 대통령, 링컨 대통령보다 훌륭 
② "박진 장관에 '미국 조심하라' 했더니 3일 만에 CIA 기밀 문건 유출"
③ 尹 대통령 아메리칸 파이 선곡, 바이든-민주당 아닌 美 국민과 정치 
④"난 전향한 386, 좌익진보라는 사람들은 철이 안든 로맨티스트"

(왼쪽부터)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뉴시스]

[일요서울 l 박철호 기자]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의 60일간 '쇄신' 여정이 시작됐다. 인 위원장은 국민의힘의 어문짓거리(엉뚱한 일)를 고치기 위한 ‘쓴 약 제조’를 예고하며, 의사인 자신을 믿으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인 위원장의 처방이 플라시보 효과에 그칠 것이라고 비관하기도 한다. 이에 본지는 인 위원장과 국민의힘 의원들의 상견례 자리인 지난 8월 강연 속 인 위원장의 발언을 통해 그의 복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 위원장의 가문은 1895년 외증조부인 유진 벨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발을 내디딘 이후 128년 간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는 중이다. 인 위원장도 1987년 외국인 최초로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한 뒤 32년간 서울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장으로 일했다. 긴 세월 의사로서 활동한 인 위원장은 1992년에는 최초로 한국형 엠뷸런스를 개발하기도 했으며, 북한의 결핵 퇴치를 위해 29번이나 방북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방인이지만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증인인 인 위원장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통역을 맡아 서슬 퍼런 군사정권 아래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스스로를 '전향한 386(80년대 학번·60년대생)'이라고 부르는 인 위원장은 2012년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를 선언하며 당선인 인수위원회에서 국민대통합위원장을 맡았다. 

고(故) 정두언 전 의원은 이미 지난 2018년 당시 인 위원장을 두고 '히딩크 같은 분'이라며 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돌고 돌아 국민의힘의 집도의로 결정된 인 위원장은 이미 두 달 전에 국민의힘 의원들과 상견레를 가진 바 있다. 

지난 8월 23일 국민의힘 공부모임인 '국민공감'에서 강연자로 나선 인 위원장은 '선진국으로 가는 길 우리가 잃어버린 1%'라는 주제로 특강을 펼쳤다. 이날 특강에는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와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비롯한 50여 명의 의원이 참가했다. 

이날 특유의 입담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짚어낸 인 위원장은 강연 말미에 "우리의 인연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 강의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 위원장과 국민의힘의 재회는 생각보다 빨랐다. 그 끝이 박수일지 외면일지는 60일 뒤에 알 수 있다. 이하는 이날 인 위원장의 발언 전문이다. 

한국이 준 사랑 잊지 않았다 
-광주항쟁 당시 5월 25일 시민군 대표로 3시간가량 통역을 했다. 당시 광주에서 경찰들이 많이 따라다녔다. 여기 이철규 사무총장이 경찰 출신이라 처음에는 좀 미워했다. 저는 경찰대학교에서 강의를 50번 한 명예 경감이다. 제가 할렘에서 살았는데, 미국 갔다 와서 보니까 세상에 한국 경찰같이 고마운 사람들이 없다. 

저는 전향한 386이다. 저는 대한민국의 사랑을 받았다. 1980년도에 연세대학교 정원외 입학을 했다. 연세대학교와 한국의 사랑이 아니면 의사도 안됐고 이 자리에 오지도 못했다. 그래서 제가 의사가 돼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것도 전부다 특혜다. 저는 잊지 않고 있다.

두 번째는 1991년도에 연세대의 제일 젊은 부서장으로 와서 지금까지 32년 동안 (일하고 있다)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보다 더 장기 집권하고 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일은 열심히 했다. 비밀인데 매출도 외국인이 500억 원은 올린다. 비급여 의료라 돈이 많이 남는다.  

제일 고마운 것은 이명박 정부 때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불러서 복수국적 갖는 것에 대해서 '당신이 테이프 좀 끊어달라' 그래서 '합시다' 했다. 제가 2% 부족한데 고맙다. 2012년 3월 21일 드디어 특별 귀화해서 지금 주민등록증 자랑스럽게 가지고 다닌다. 

꼭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지금 여당에서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이 많다.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 한다. 어제 기자한테 전화가 왔다. '당신 국민의힘에서 출마한다고 들었다'고 해서 쓰잘때기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 학생들 가르치고 있다. 얼른 끊으라고 했다. 

대타협의 나라 미국 
-지금의 미국이란 나라는 닮지 말아라. 재정적자가 천문학적이다. 미국 국회는 책임감이 없이 돈을 쓴다. 제가 지금의 미국을 잘 보라고 박진 형님한테 얘기했다. '미국 조심하라'고. 그랬더니 3일 만에 CIA 기밀문건 유출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서 박진 외교부 장관한테 전화했다. '형님 보소 보소' 내 말이 맞았제. 그랬더니 박 장관이 전화 와서 '자네 영감이 있는 것 같어'라고 했다.  

미국이란 나라가 출발했을 때 사법부와 대통령이 정해진 상태였지만 국회가 정해지지 않았다. 1780년 중반에 필라델피아에서 모여서 지역구 가지고 어마어마한 싸움을 했다. 땅덩어리로 하냐 아니면 인구 비례로 하냐. 그래서 나이 든 사람이 일어나서 '우리 타협하자'고 말했다. 미국의 첫 단추가 대타협이다. 그 타협이 바로 국회에 집을 두 개 만들자(양원제)는 합의다. 

미국은 출발이 타협이었다. 한국말로 타협은 '내가 손해 보는 것'이다. 미국 말로 Compromise는 '내가 손해 보고 이긴 것'이다. 그 문화를 여러분이 고쳐야 한다. 한 일본 작가는 '한국 사람들은 옥신각신한 소모전을 너무 많이 한다'며 '에너지의 90%를 견제에 쓴다. 그중 50%만 바꾸면 세계를 다 지배한다'고 썼다. 

한국인의 배타적·감정적 특성과 부족한 준법의식은 고쳐야
-주류·비주류 알죠잉. 우리 병원에서도 예전에 의료원장 선거를 하면 경기고·서울고·용산고·제물포고 출신이 경쟁했다. 그중에서 제물포고 출신, 짠물 출신이 집권을 했다. 엄청난 것이다. 저는 외국인 학교를 졸업해서 줄 설 때가 없어서 섭섭했다. 

(한국 사람은)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공항에서 비행기 안 뜬다고 데모하는 사람은 한국 사람밖에 없다. 그러면 효과는 좀 봅디다. 20년 전에 한 형님이 러시아에 가서 비행기 안 뜬다고 데모를 했더니 비행기를 금방 가지고 오더라고 말했다.  

이쪽 당은 아니지만 김현종 전 청와대 외교안보 특보가 고생을 많이 했다. 그 친구가 성질이 고약하고 좀 까칠하다. 그런데 일을 참 많이 했다. 그 친구는 아버지가 노르웨이 대사였다. 김 특보가 외교통상부 본부장 시절에 저한테 와서 '(한미 FTA 협상 중) 내가 인도계 미국인과 협상해서 90% 이겼다!'라고 해서 '이야 잘했다'고 칭찬했다.  

김 특보는 왜 협상을 잘했나. 이 친구는 굉장히 냉정하게 협상을 했다. 나중에 미국이 비겁하게 다시 협상하자고 하지 않았나. 너무 협상을 잘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가 그 친구에게 협상에 대한 책을 써서 후대에 남기라고 했다. 

전라도에서 가장 나쁜 말이 무엇인가. '우리는 가들처럼 안 살아', '가들은 불륜이고 우리는 로맨스야' 배타적인 것은 도움이 안된다. 한국 사람들은 누구를 미워하면 제껴버린다. 우리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2차 대전 당시 조지 패튼의 미군은 '유치원생'이었고 에르빈 롬멜의 독일군은 '대학원생'이었다. 그런데 패튼이 이겼다. 밑에 대위가 패튼에게 어떻게 이겼는지 물었다. 패튼은 '내가 롬멜, 그 녀석의 책을 4번 낭독했다'고 말했다. 

나는 좌익진보라는 사람들은 철이 안 든 로맨티스트라고 본다. 저는 북한에 29번이나 다녀왔다. 저는 (북한을) 안다. 경찰도 죽을까 봐 조를 짜고 순찰하는 곳에서 살았다. 그 정도로 치안이 없는 곳에 살면 사람 생각이 바뀐다. 인권도 중요하지만 치안이 얼마나 중요하나. 

나는 대한민국 경찰 보면 그냥 경례를 하고 싶다. 불쌍해 죽겠다. 공권력이 너무 (줄어들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1980년대에는 이철규 사무총장에겐 죄송하지만 경찰을 '짭새'라고 불렀다. 엄청 싫어했다. 

저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엄청 존경했다. 1994년도에 DJ를 찾아가서 제가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 욕을 엄청 했더니 '인 원장, 보복이라는 것은 못 쓰는 것이여'라고 했다. 

(한국 사람은) 법과 질서를 잘 지키지 않는다. 제가 답십리에서 한 5년 전에 중앙선을 휙 돌았는데 하필 재수 없게 경찰이 또 있었다. 딱 잡혀서 창문 내리면서 '싼 놈으로 해야지' 생각하고 협상을 할 요량이었다. 

그 경찰이 날 보더니 모자를 벗었다 썼다 하면서 '알 만한 사람이 엄청난 위반을 하셨네'라고 지적하면서 7만 5천 원에 벌점 30점을 받았다. 그때 혼자 생각했다. (잡힌게) 정말 잘됐다. 나도 다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내 과실로 죽을 수 있다. 이런 것은 고마운 것이다. 

가정 교육이 무너지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1%가 무엇이냐. 바로 '온돌 아랫목'이다. 저는 가난하게 컸지만 온돌방 아래서 아주 소중한 지식을 엄청나게 배웠다. 일제 강점기가 무엇이고 6.25 전쟁이 무엇이고 여수·순천 사건이 무엇인지 배웠다.

그 다음에 지혜를 배웠다. 우리 어머니는 많이 낳지 않으셨다. 12명의 아이를 목표로 했는데 6명만 낳았다. 제가 6번째 막내다. 맨날 형들한테 뚜드려 맞았다. 그래서 어떻게 덜 뚜드려 맞을까 생각하는 인생의 네비게이션을 배웠다. 지금 대한민국의 세대 갈등이 큰 이유가 '중앙난방' 때문이다. 중앙난방 때문에 망해부럿어.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을 만나서 얘기할 장소가 없다. 

박정희, 5000년 한반도 역사에서 '관(官)' 아닌 '민(民)' 앞세워
-저는 전라도에서 커서 전라도의 가치관이 있다. 우리 어렸을 때 경상도 사람들은 일본 사람보다 조금 덜 나쁜 사람이라고 교육받았다. 그러나 철 들어서 보니까. (경상도에는)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독재도 하고 유신도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을 만난 것은 우리의 행운이다. 그분은 5000년 한반도 역사에서 '관'이 아닌 '민'을 앞세웠다. 한국 민족에게는 그분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보다 훌륭한 분이다. 그분만 있던 것이 아니다. 고(故) 박태준 회장도 있었고 고(故) 정주영 회장도 있었다. 고(故) 김우중 회장도 있었고 고(故) 이병철 회장도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있었다. 당시 젊은 여성들이 불가피하게 재봉틀 공장에서 16시간이나 일했다. 그 섬유를 수출해서 돈을 벌었다. 그리고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있었다. 중동 50도 땡볕에서 다리 놔주고 길 만들어 주던 근로자들이 있었다. 더 한 일도 있다. 월남에 간 군인들이 피와 땀과 생명을 받쳤다. 그 희생이 있어서 남조선이 잘 살게 됐다. 그 돈을 가지고 일어났다. 

우리는 이렇게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는데 지금 돌아가는 것은 솔직히 좀 거시기하다. 국회도 거시기하다. 우리의 인연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잘 듣고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저는 역사의 현 증인이다. 이 불이 꺼지면 안 되고 앞으로 나가야 된다. 

-중요한 것은 아메리칸 파이의 선곡이다. 이 노래는 미국의 고유한 상징성을 가진다. 그 노래의 가사 하나하나가 미국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곡이다. 

그곳에서 윤 대통령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나 민주당 의원들과 정치를 한 것이 아니다. 미국 국민하고 정치를 한 것이다. 다들 그것을 모르드마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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