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간(區間)’ 이동했다. 동작구에서 관악구로 탐방지를 옮겼다. 관악구의 첫 방문지는 서울 동남부권의 상징인 관악산이다. 관악산은 북한산, 청계산과 함께 서울시민이 가장 사랑하는 산 중 하나다. 필자도 여러 차례 올랐던 산이다. 익숙함은 게으름을 부르는 것인가. 이런저런 일 처리를 마친 뒤 1030일 오후에 길을 나섰다. 글쓰기를 염두에 두고 관악산을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관악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관악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단풍이 물든  관악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단풍이 물든 관악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북한산, 청계산과 함께 서울시민 가장 즐겨찾는 산
연주대 바위 이름은 차일암(遮日巖) 양녕대군 명명(命名)

지하철 2호선 사당역 4번 출구로 나왔다. 남현동 주택가를 지나 관악산에 들어섰다.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니 관악체력센터가 나왔다. 이정표에는 연주대 5.2km라고 적혀있다. 관음사 국기봉과 하마바위, 마당바위, 그리고 관악산 바위굴을 지나 연주대까지 갈 생각이다. 일명 사당 능선이다. 연주암과 관악사를 보고 다시 온 길로 돌아오면 약 4시간 정도 걸릴 듯하다. 본격적인 산행이다.

관음사 국기봉->마당바위->연주대 사당능성

가을 햇살은 무르익었다. 나뭇잎 사이로 흩어지는 햇살은 무지개색의 부챗살 모양이다. ‘코모레비라는 일본어가 생각난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라는 뜻이다. 햇살에 비친 나뭇잎 색은 아직 초록빛이 남아있다. 등산로는 이미 가을에 젖어있다.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다. 가을을 밟고 가는 느낌이다. 낙엽을 한 장 주었다. 곱게 물든 낙엽이 꽃처럼 예쁘다. 감상에 빠진 것도 잠시다. 오르막이 시작됐다. 그것도 급경사다. 오르막길을 지나자 그늘의 평지다. 능선을 따라 연주대까지 가자면 봉우리를 오르고 내리기를 몇 차례는 더 해야 한다. 능선 굴곡이 인생사를 닮은 듯하다. 급경사 구간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기어올라야 한다. 야릇한 암벽의 촉감을 느끼며 올라선 봉우리는 그 자체가 감동이다. 곳곳에서 길을 막는 바위를 유심히 살폈다. 혹시라도 고려 때 거란군을 물리친 강감찬 장군의 전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강감찬 장군이 태어나던 날,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생가를 낙성대(落星臺)라고 한다. 낙성대는 바로 관악산 자락에 있다. 강감찬 장군은 체구가 작았지만 몸집이 컸다. 얼마나 몸집이 큰지 바위에도 발자국이 남을 정도였단다. 이 때문에 관악산 바위에 폐인 자국은 강감찬 장군이 만든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기암.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기암.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기암.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기암.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거란군 물리친 강감찬 전설 낙성대

마당바위에서 한숨을 돌리기 위해 군장을 풀고 그늘을 찾았다. 높은 하늘, 시원한 바람, 그리고 기암절벽의 풍광, 아름답게 불타는 단풍……. 탁 뜨인 주변의 관악산 능선과 능선마다 군락을 지은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또 포인트마다 다르게 보이는 서울의 모습, 그 자체가 지리 공부다. 이보다 더한 단풍 유희가 어디 있을까 싶다. 인생살이도 이처럼 고생 끝에 낙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고지가 저기다. 연주대 위의 통신탑과 기상 레이다가 보인다. 한두 고비만 지나면 정상에 닿을 듯하다. 힘을 냈다. 드디어 연주대 아래 있는 깔딱고개다. 고개 앞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철제 계단을 보자 다리에 힘이 빠진다. 안간힘을 다해 연주대 문턱까지 올랐다.

가히 절경이다. 관악산을 작은 금강산(소금강), 서쪽의 금강산(서금강)이라고 한 이유를 알 듯하다. 수없이 많은 바위가 경쟁하듯 자랑하는 품세가 예사롭지 않다. 관악산 꼭대기를 올려다봤다. 이게 웬일인가. 화염이 솟고 있다. 응진전 바로 옆에 두 개의 바위가 마주 본 채 하늘을 향해 훨훨 타오는 불꽃 모양을 하고 있다. 빨간색을 띠고 있다면 영락없는 불꽃이다. 관악산을 불의 산(火山)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필자는 관악산이 외사산(外四山·-아차산, -덕양산, -관악산, -북한산) 중 남쪽에 있어 그런 줄 알았다. 풍수지리상 남은 화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관악산이 불의 산임을 눈으로 확인한 이상 그 기운을 억누르지 않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응진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응진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응진전은 조선의 국운 번창과 조선 왕실의 평안을 염원하는 마음이 담긴 암자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뜻을 따라 의상대 자리에 석축을 쌓고 마련한 암자다. 그만이 아니다. 세로쓰기로 된 숭례문의 현판도 관악산의 화기 때문이다. 숭례문은 한양 도성의 남쪽에 있는 남대문의 이름이다. 풍수지리적으로 숭례문을 불을 지키는 문으로 여겼단다. 과학적 근거는 미약해 보인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복원 당시 광화문 양옆에 두 마리의 해지를 둔 것도 화기차단을 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은 수없이 많은 화마에 시달렸다. 그렇다. 무학대사의 말이 맞았다.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지를 정할 때 관악산의 화기가 궁을 괴롭힐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당시 실세였던 정도전은 관악산의 화기를 한강이 막아준다면서 한양을 고집했다.

관악산은 불의산...광화문 해지 화기차단용

관악산 연주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관악산 연주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드디어 연주대에 올랐다. 거대한 바위가 비스듬히 누워 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등산객이 연주대에 앉아 있다. 연주대 바위 이름은 차일암(遮日巖)이다. 왕세자 자격을 박탈당한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이 가끔 이곳에 머물렀다. 바위 위에서 햇볕을 피하려 장막을 쳤다.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연주대라는 이름은 고려가 망하자 남은 유신 몇 사람이 송악(개성)을 볼 수 있는 이곳에서 고려를 그리워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시대 의상대사가 연주대 밑에 관악사를 창건했다는 이유로 의상대로 불렸다. 의상대사는 의상대에서 참선했다.

그런데 차일암 위에 정상석이 서 있다. 관악산 629m라고 쓰여 있다. 이상하다. 관악산은 632m가 아니었나. 그렇다. 기상 레이더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불꽃 바위가 3m 높단다. 연주대로 돌아 연주암으로 내려왔다. 멀리서 본 연주대는 더 아름답다. 마치 한 폭의 그림도 이처럼 아름답지 않을 듯하다. 이게 웬일인가. 연주암으로 내려오는 길에 본 응진전은 화염에 싸여있다. 응진전을 바친 절벽 모양의 바위는 불꽃을 피우고 있다. 불꽃 위에 응진전이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다. 어떻게 저런 곳에 암자를 지을 수 있을까.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듯한 응진전이 그 자제가 불력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아름답게 빛날 수 없을 것이다. 연주암에는 연주암, 약사여래상과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9개의 방화부(防火附) 단지도 모셔져 있다고 한다.

한폭의 그림 연주암, 아슬아슬 응진전

연주암.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연주암.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연주암 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연주암 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연주암으로 내려왔다. 연주암은 677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절 마당에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인 삼층석탑이 있다. 단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리고 머리 장식을 얹은 형태다. 높이 3.6m이다. 단순미와 균형미가 뛰어난 석탑이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셔 놓고 있어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특이점은 석가모니가 돌(석재)이 아니라 찰흙과 석고(소조)로 만들어져 있다.

연주대 바위에 차일암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주인공(양녕대군)의 동생인 효령대군의 영정도 연주암에 모셔져 있다. 원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효령각을 짓고 이곳으로 모셨다고 한다. 사실 연주암이 효령대군을 모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원래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은 관악사다. 효령대군은 관악사를 지금 연주암 자리로 옮기고 이곳에서 2년간 수행했다. 효령대군은 스스로 부처님의 제자임을 자칭했다. 그리고 나라 안의 많은 절을 창건했다.

양녕대군 이름 붙여준 차일암 효령대군 영정도

의사대사가 창건한 관악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의사대사가 창건한 관악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관악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관악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관악사로 내려왔다. 관악사는 응진전 바로 아래 있다. 1993년까지 절터로만 남아있었다. 그것도 정상 계곡에 유일한 평지였던 탓에 산중 박물관은 크게 훼손됐다. 석조불상 조각, 석조나한상 조각, 용머리기, 금고(청동북) 1점과 청동그릇 2점 등이 발견된 게 다행이다. 그때(1993)부터 발굴작업이 본격화됐다. 현재 관악사지에는 승방, 누각, 공양간, 전각 등 총 4동의 건물이 복원·정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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