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은 아직도 찾아봐야 할 유적이 많다. 관악산 관음사, 이경직 묘역, 원각사, 강감찬 장군 생가, 그리고 강감찬 장군의 사당인 안국사 등을 둘러볼 예정이다.

관악산 관음사 일주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관악산 관음사 일주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관음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관음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관악산 관음사, 이경직 묘역, 원각사, 강감찬 장군 생가
고려거란전쟁강감찬 장군 영웅담 담은 드라마

사당역을 따라 승방길을 올랐다. 곧 사당 능선으로 오를 수 있는 관악산 입구에 도착했다. 관악산 안내도가 길을 가로막는다. 안내도를 보는 순간 후회가 밀려든다. 지난번 관악산 산행 때, 정확한 정보 파악을 하고 조금 서둘렀다면 다시 오지 않아도 되는 길이다. 관악산을 다시 온 게 된 후회되는 건 아니다. 게으름과 준비 부족을 탓하는 것이다.

날이 차다. 두 주 전의 관악산이 아니다. 산속으로 들어오자 일순간 겨울이 깊어진 듯하다. 찬 기운이 몸을 파고든다. 손이 시리다. 길을 재촉했다. 얼마 오르지 않자 관악산 관음사라고 쓰인 일주문이 나온다.

관음사 도선국사 얼깃든 천년고찰중 하나

관음사는 서대문구 봉원사와 함께 도선국사의 얼이 깃든 천년고찰 중 하나다. 도선국사는 신라시대 말기 승려다. 관음사도 도선국사가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창건(895)했다. 고려가 건국되기 불과 30여 년 전이다. 신라 말기는 사회가 몹시 혼란스러웠다. 도선은 국가 수호와 국민 안녕을 염원했다. 이를 위해 불교와 풍수지리의 음양오행, 그리고 밀교(전 국토의 불교 도량이라는 사상)의 택지법을 결합했다. 바로 도선의 비보사상이다. 비보사상은 그 이후 사찰만이 아니라 택지 입지 선정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관음사도 조선 왕실 보호를 받던 봉원사와 못지않은 지위를 누린 듯하다. 옛 기록에 의하면, 관음사 부근에 승방벌이라는 마을과 승방교라는 다리가 있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관음사의 명성과 사세는 위축됐다. 겨우 명맥만 유지됐다. 51년 전 종하 스님이 주지로 임명된 후 중창 불사가 이뤄지면서 역사 깊은 사찰임이 알려졌다.

관음대장군과 여장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관음대장군과 여장군.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석조관세음보살입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석조관세음보살입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BBC 9층석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BBC 9층석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일주문을 지나자 다양한 석탑과 석등이 길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조금 색다른 게 보인다. 돌로 만든 장승이다. 갓을 쓴 관음대장군과 족두리를 쓴 관음여장군이다. 부리부리한 눈, 뭉툭한 코 등 그 모양이 투박하다. 웃는 모습도 천진난만하다. 아마 경내 잡귀의 접근을 막는 일주문의 사천왕 임무를 대신하고 있는 듯하다. 관음사 일주문에는 사천왕이 없었다.

경내로 들어갔다. 도선국사의 기운이 느껴진다. 사찰 뒤로는 관악산 줄기가 나래를 펴고 있다. 도도히 흐르는 한강을 굽어보는 위치다. 유명한 풍수지리학자가 관악산에 사람이 살만한 곳은 관음사 터뿐이라고 했다는 말 때문은 아니다. 풍수에 문외한인 필자도 명당임을 직감할 수 있다.

관음사를 상징하는 석상이 있다. 석조 관세음보살입상이다. 관음은 중생의 고통을 구해주는 존재다. 연꽃 위에 서 있는 관음보살은 매우 화려하면서도 푸근한 얼굴을 하고 있다. 특히 은은한 미소가 인상적이다. 관세음보살입상이 관음사를 상징한다면 9층 사리탑은 도선국사의 정신을 대표한다. 관음사를 중건한 종하 스님이 비보사상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도선국사는 쇠약하고 기운을 거슬러 불행을 가져오는 땅에 사찰이나 석탑을 세워 재앙을 막았다. 종하 스님이 불교방송의 지원을 받았다고 이 사리탑은 ‘BBC(불교방송) 9층 석탑으로 불린다.

실학운동 선구다 이수광의 손자 이경직

다시 관악산 입구로 내려왔다. 관음사 북쪽 자락에 있는 효민공 이경직 묘역을 찾아가는 길이다. 연주대로 오르는 등산로 옆에 필자의 목적지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있다. 불과 100m 정도 숲속을 걸었다. 이 길은 사람 왕래가 없는 듯하다.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걷기가 힘들 정도다. 묘소가 보였다. 초록색 철망이 가로막고 있다. 조선 왕실 묘역에 버금갈 정도로 넓어 보였다. 매우 깨끗하고 깔끔하게 보전되고 있다.

이경직이 누구이기에 죽어서도 이 같은 호사와 명성을 이어가는 것일까. 아마도 이경직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반면 실학운동의 선구자인 이수광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수광의 손자다. 호조판서와 도승지(인조)를 지낸 이경직 역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청과 교섭을 맡은 외교관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사후 정승이 됐고 효민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 묘역에는 이유간-이경직-이장영 등 3대 직계가 모셔져 있다. 특히 산소 왼편에 서 있는 이경직의 신도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당시의 묘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가치가 높다고 한다.

이경직 묘역.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이경직 묘역.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신도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신도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원각사 와불.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원각사 와불.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묘역 앞에는 쉼터가 있다. 추운 날씨 탓인지 주민을 볼 수 없다. 쉼터를 벗어나 마을로 내려왔다. 1961년에 창건된 원각사에 들르기 위해서다. 역사가 짧은 원각사를 찾은 데는 이유가 있다. 미얀마에서 들여온 와불을 보기 위해서다. 낮잠이라도 주무시는지 눈을 감고 팔베개한 부처님의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와불상은 부처님이 입적하기 직전의 모습이라고 한다. 미얀마 특유의 흰 피부, 섬세한 옷 주름이 우리 불상과 같은 듯, 다른 듯하다.

이경직 묘역을 지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했다. 관악산 기슭은 굴참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등 참나무류 천지다. 낙엽은 크다. 발에 차이는 낙엽은 큰 소리를 냈다. 더 큰 소리를 만들고 싶어진다. 다리를 끌면서 낙엽을 밟는다. 이상하다. 낙엽 소리가 더 깊어진다. 소리에 귀 기울인다. 순환하는 자연의 외침이 들린다. 부질없는 상념이 소화되는 기분이다. 다시 관악산에 오길 잘했다.

낙성대 공원 강감찬 장군의 생가...안국사

낙성대에서 둘레길을 벗어났다. 곧 낙성대공원이 나왔다. 낙성대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의 생가다. 생가는 낙성대동 민가 한가운데 있다. 그래서 낙성대를 이곳으로 옮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안국사)을 짓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의 탄생 설화에서 비롯됐다. 장군이 태어나던 날 큰 별이 그의 집으로 떨어져 어머니의 품 안으로 안겼다고 한다. 낙성대공원의 상징은 강감찬 장군 동상과 사당인 안국사다. 공원 한 가운데 있는 동상은 귀주대첩을 지휘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적이 보기만 해도 겁에 질릴 듯한 위용이 느껴진다. 귀주대첩은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과 함께 3대 대첩으로 꼽힌다.

낙성대 안국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낙성대 안국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안국사 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안국사 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강감찬 향나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강감찬 향나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낙성대삼층석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낙성대삼층석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TV에서 상영하고 있는 고려거란전쟁은 바로 강감찬 장군의 영웅담을 담은 드라마다. 당시 거란은 동아시아 떠오르는 별이었다. 특히 거란군 기마군단은 고려만이 아니라 송나라까지 공포에 몰아넣었다. 거란군은 993년 고려를 침공했다. 이 전쟁은 1019년까지 27년 동안 이어졌다. 거란침공이 3차례나 있었다. 중국 중원 지배를 꿈꾸던 거란은 고려에 형제의 국가가 되길 원했다. 송과 고려의 연합을 막기 위한 전략이었다. 고구려 영토 회복을 기치로 내건 고려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거란은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를 멸망시킨 원수 나라다.

80만 거란 대군(요나라)이 침공한 제1차 전쟁(993)에서는 서희 장군의 담판으로 고려군이 승리했다. 강동6주 획득하는 성과도 얻었다. ‘귀주도 여기에 포함된다. 요나라 최고 성군이라는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참전한 제2차 전쟁은 고려의 참패였다. 수도 개성이 함락됐다. 하지만 고려는 끝내 강동6주를 되돌려준다는 요나라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3차 전쟁의 빌미가 됐다. 요나라의 소배압은 101820만 대군을 이끌고 개경 직공에 나선다. 주력부대는 최정예 친위부대인 탈조군이다. 약탈 전문 군대란 얘기다. 이것은 보급물자를 현지에 조달한다는 의미다. 그만큼 고려 백성의 고통을 컸다.

강감찬 장군 사당 안국사의 보물 3층석탑

고려의 복수가 시작됐다. 강감찬 장군과 거란 대장인 소배압은 1018년 흥화진에서 첫 전투를 벌인다. 강감찬 장군은 거란의 추가 침략을 예상했다. 흥화진 앞의 삼교천을 소가죽으로 막았다. 거란군이 도강을 시작하자 물을 텄다. 거란군에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거기다가 매복한 12,000명의 고려군이 덮쳤다. 고려의 대승이었다.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배압은 살아남은 병력을 수습했다. 개경으로 다시 진격했다. 여기서는 고려의 또 다른 영웅 김종현, 강민첨 장군이 있었다. 개경의 문턱인 내구산, 마탄, 금교역 등 잇단 전투에서 승리했다. 전의를 상실한 소배압 군사는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퇴로엔 강감찬 장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101927년간의 전쟁에 마침표를 찍은 귀주대첩이다. 도망가는 거란군은 귀주에서 최후를 맞았다. 살아 돌아간 병사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낙성대공원 감강찬 장관 동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낙성대공원 감강찬 장관 동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강감찬 장군 동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강감찬 장군 동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강감찬 장군 사당인 안국사로 갔다. 안국사 앞에는 낙성대가 강감찬 장군의 생가임을 보여주는 주요한 보물이 있다. 3층 석탑이다. 석탑에는 낙성대 강감찬이라고 쓰인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고려 현종이 거란과 전쟁에서 이긴 걸 기념해서 이 탑을 선물했다고 한다. 이 석탑으로 인해 강감찬 장군의 생가임이 밝혀졌다.

두 개의 문을 지나자 영정이 모셔진 안국사가 나왔다. 영정 앞에 한 여인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다. 여인이 사라진 뒤 영정 앞에 섰다. 영정 앞 탁자엔 비스킷 하나와 낙엽 두 개가 놓여 있다. 서울 한 가운데에서 1000년 전의 전쟁 영웅의 사당을 만난 게 너무 기뻤다. 거기다가 그를 기리는 한 여인을 보게 돼 더 기쁘다.

낙성대를 나와 낙성대동 민가를 들어갔다. 강감찬 장군의 생가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골목은 허름한 빌라로 채워져 있었다. 곳곳에 강감찬 장군의 생가 위치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작았다. 마치 작은 공원 같다. 거기에는 울창한 나무와 강감찬장군낙성대유허비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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