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일 오후 서울대로 갔다. 처음으로 서울대 교정을 찾았다. 서울대의 상징물이자 교문인 를 보자 철없던 학창 시절이 생각난다. 모든 학생이 그런 것같이 필자도 서울대를 선망했다. 필자가 대입을 준비하던 시절, 서울대 수석 합격자가 신문 지면에 소개됐다. 필자는 일부러 그 기사를 외면했다. 서울대생을 만나면 이유 없이 주눅이 들곤 했다. 서울대 교정을 한 번도 찾지 않은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어떻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서울대와 화해한다는 기분이 든다. 기분이 묘하다.

4.19 기념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4.19 기념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4.19 공원내 추모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4.19 공원내 추모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엄혹한 독재항거하며 목숨을 바친 인사를 기리는 역사의 현장
4·19 기념공원 희생된 고순자·김치호·박동훈 열사의 추모비도

오늘의 행선지는 서울대 민주화의 길이다. 대학동 녹두거리부터 탐방을 시작했다.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서 버스를 타고 대학동 녹두거리로 왔다. ‘녹두거리라는 간판은 녹두색을 띠고 있다. 녹두거리는 시간의 쌍곡선이 교차하는 학생의 중심거리다. 원래는 빈대떡이 유난히 많았던 시장 골목이었다. 이곳에 막걸리 가게, ‘녹두집이 있었다. 녹두거리라는 이름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

1980년 대학생 해방구 녹두거리 박종철 거리

1975년 서울대가 관악산 기슭으로 옮겨지면서 시장 골목의 질적변화가 시작됐다. 1980년대 학생에게 이곳은 일종의 해방구였다. 뜨거운 피가 끓던 저항의 공간이었다. 녹두거리에 모여 민주 시대로 전환이라는 주제로 시국 토론을 했다. 민주화를 노래했다. 반독재투쟁 집회를 모의했다. 세상의 변화를 이끌기 위한 고민과 모색이 담긴 거리였다. 그런 절박함의 사상적 뒷받침은 열린 글방’, ‘전야’, ‘그날이 오면과 같은 사회과학서점이었다.

민주화 바람이 지나고 난 뒤 녹두거리의 낭만과 저항은 사라졌다. ‘출세 병 환자의 집합소로 바뀌었다. 일명 고시촌이다. 그런 흐름은 사회과학서점을 밀어냈다. ‘열린 글방전야는 문을 닫았다. ‘그날이 오면역시 고시텔에 자리를 내줬다. 폐업했다가 자리를 옮겨 최근에 다시 문을 열었다. 서울대 앞의 사회과학서점의 명맥을 잇고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

녹두거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녹두거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녹두거리 입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녹두거리 입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이젠 녹두거리는 박종철을 기억하는 거리로 바뀌었다. 일명 박종철 거리. 두 개의 골목으로 형성된 녹두거리를 이어주는 샛길에 박종철 하숙집이 있었다. 박종철 열사가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이곳에 최근 박종철 센터가 들어섰다. 공원과 박종철 열사의 유품을 볼 수 있는 전시실이 마련된 일종의 인권센터다. 공원엔 박종철 벤치가 있다. 벤치 뒤 패널에는 박종철 선물이라는 글귀와 함께 평등, 민주, 인권, 행복이라고 적혀 있다.

1987114. 유난히 추운 겨울날이었다. 이날 새벽 그는 영장 없이 강제 연행됐다. 오전 1120분까지 대공분실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는 끝내 하숙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대신 박종철 거리에 영원히 남게 됐다. “이렇게 책상을 하고 치니깐 하고 쓰러졌다라는 게 대공분실이 밝힌 사망원인이다. 6·10 항쟁의 도화선은 이렇게 당겨졌다.

서울대생도 모르는 민주화의 길?

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대 앞에서 내렸다. 안내판은 수십 동의 건물 위치만 알려주고 있다. 등교하는 학생에게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아느냐고 물었다. 잘 모른단다. 뜻밖이다. 친절하게도 서울대 앱으로 확인하는 친절을 베푼다. 하지만 거기도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표시되어 있지 않은 듯했다. 다른 두 명의 학생에게 민주화의 길을 아느냐”, “박종철 추모비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았다. “처음 들어본다라고 말하거나 그런 게 교내에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서울대의 민주화 구심점이었다. 세월의 변화를 새삼 실감한다. 아니 세월을 탓할 일이 아니다. ‘포스트 메모리가 사라진 것은 아닌가. 포스트 메모리는 한마디로 말하면 세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기억이다. 역사적 체험의 현장에는 없더라도 그 역사를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기억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야 하는 게 우리의 몫이 아닐까. 목숨을 바쳐 민주화 투쟁했던 이들의 희생은 민주화 이후 세대에게 간접 경험으로 전달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나라를 위해 싸운 민주화의 기억은 기록물로만, 민주화의 흔적은 추모비로만 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누구의 잘못인가.

1776년 세워진 왕실도서관 규장각

규장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규장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보물 세종실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보물 세종실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보물 훈민정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보물 훈민정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민주화의 길은 엄혹한 독재에 항거하며 목숨을 바친 서울대 동문을 기리는 역사의 현장이다. 민주화의 길은 두례문예관 앞 4·19기념탑을 비롯해, 각 단과대학 출신 별로 세운 19명의 열사 추모비를 잇는 1.2km의 구간이다.

민주화 길에 대한 어떤 정보도 수집되지 않았다. 무작정 학생회관을 향해 걸었다. 1980년대 각 대학의 민주화 투쟁의 본거지가 바로 학생회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던 길 왼편 한옥 형태의 독특한 디자인의 건물이 보였다. 규장각임을 직감했다. 규장각은 정조 즉위년인 1776년 세워진 왕실도서관이다. 방향을 돌렸다. 서울대 규장각의 공식 명칭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었다. 지하실에 마련된 전시실을 둘러봤다. ‘세종어제훈민정음’, ‘훈민정음도해’, ‘용비어천가’, ‘훈몽자회등 한글의 탄생 과정에서 출간된 서적이 전시되어 있다. 이런 보물을 실물로 본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행운은 행운을 부른다. 규장각 건너편 두레문예관 옆에 작은 언덕이 보이고 언덕 위로 탑 모양의 석물이 보였다. 반대편에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부지런히 걸었다.

가는 길에 향나무 10여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이채롭다. 마치 수목장에 있는 나무처럼 보였다. 대학교정에 웬 수목장? 아니다. ‘추모의 나무였다. 각각의 나무 밑에는 안치웅, 권재혁, 노진수 등 열사의 이름과 활동 이력이 적혀 있다. 나무에도 정의의 나무’, ‘민족의 나무’, ‘민주의 나무등 각각의 이름이 붙어 있다. 아직 추모비를 세우지 못한 열사를 기리고 있는 것이었다. 고개를 숙였다. 문뜩 열사라는 이름 뒤에 가려졌던 그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권재혁은 일면 남조선혁명당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사형이 집행됐다. 재심에서 45년 만에 무죄가 확정됐다. 노진수와 안치웅은 사라진 서울대생으로 잘 알려진 민주화·노동운동가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권력의 불법적 실체를 숨긴 채 공권력에 의한 행방불명 실종을 인정했다.

민주화의 길 안내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민주화의 길 안내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4.19 희생자 추모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4.19 희생자 추모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4.19희생자 추모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4.19희생자 추모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향나무 10여그루 열사들의 추모의 나무

추모의 나무한편에 민주화의 길안내도가 있었다. 조금 전에 본 탑이 바로 4·19기념탑이었다. 4·19기념탑은 본래 동숭동에 캠퍼스(1961년 건립)에 있던 걸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때 4·19기념공원으로 조성했다. 조형물의 색깔에서 50여 년의 역사가 묻어난다. 기념탑 뒤에 오늘도 나는 정의를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라고 쓴 김치호 열사의 일기가 적혀 있다. 공원에는 김치호 열사를 비롯하여 4·19의거 당시 희생된 고순자·박동훈 열사의 추모비와 유재신·손중근 열사를 기념하는 나신의 동상도 나란히 서 있다.

민주주의 위한 피와 눈물, 그리움 묻어나는 추모비

인문대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앙도서관 뒤에는 인문대 출신인 박혜정·김세진·이재호·박종철·최우혁 열사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추모글은 하나같이 민주주의를 위한 피와 눈물, 그리고 그리움이 묻어 있다. 이재호 추모석에는 그립다 친구여 그대 햇살 되어 오너라 그대 꽃이 되어 오너라라고 쓰여 있다. 최우혁 열사의 추모석에는 그대 우리 가슴에 살아라고 적혀 있다. 박혜정 추모비에는 유일하게 열사가 아닌 박혜정 학형이라고 새겨져 있다.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운 그들은 필자의 또래다. 그들 앞에 서기가 너무 부끄럽다. 그들이 목숨을 던졌을 당시의 나이는 필자 자녀의 또래다. 부모가 되어 보니 그들의 희생이 더 안타깝다. 아직 들르지 않은 나머지 민주화의 길에 있는 추모비를 더 이상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발걸음보다 마음이 더 무겁다.

4.19공원내 추모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4.19공원내 추모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4.19 공원내 추모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4.19 공원내 추모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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