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까지 동작구와 관악구를 이어 탐방했다. 이번 주부터 한때 동작구와 관악구의 종가였던 영등포구로 발길을 옮긴다. 영등포구는 서울 행정구역 개편 80년 역사에서 가장 큰 손실(?)을 본 자치구다. 1943년 서울에 편입된 이후 상당 기간 가장 넓은 면적을 갖고 있었다. 인구도 제일 많았다. 여러 차례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관악구, 동작구, 양천구, 강서구 등이 떨어져 나갔다. 인구 증가에 따른 과다한 행정부담을 줄이고 생활권역과 행정권역의 일치시키는 조치였다.

문래기계금속지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문래기계금속지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을 다진 근대화의 현장
2003년부터 철강골목 예술가 모여들어 MZ 핫플레이스로...

편집 기자가 얼마 전 영등포 탐방을 몇 꼭지로 구성할 생각이냐라고 물었다. ‘10회 정도라고 대답했다. 영등포의 역사와 관록을 생각한 즉흥적 대답이었다. 정작 그렇지 않았다. 조선시대엔 현감혹은 현령이 다스리던 농촌지역이었다. 영등포라는 지명을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도 조선 정조 때다. 그것도 사서도 아니다. 인구통계자료집(호구총수·戶口總數)이다. 사서에는 비로소 고종 때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외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인 조일수호조규(병자수호조약, 부산·인천·원산 강제 개항)’를 앞두고였다. 우리 군병력을 영등포에 배치했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거기다가 변변한 산도 하나 없다. 당연히 고찰이 없다. 한강과 도림천, 안양천을 끼고 있는 빼어난 자연경관은 근대화과정에서 크게 훼손되거나 파괴됐다. 우리 문화유산의 기반이 되는 터전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경인선과 경부선 교차..근대화의 현장

그렇다고 문화의 불모지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영등포는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을 다진 근대화의 현장이다.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과 경부선의 교차 역이다. 허허벌판이 근대화의 바람과 함께 발전의 첨병이 됐다. 한강의 기적의 발판이 되었다. 영등포사람은 아직도 영등포를 공도라고 부른다. ‘공업도시 영등포라는 얘기다. 또 상대적으로 민간신앙의 전통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또 그것을 가장 활발하게 승계하고 있는 지역이 영등포였다. 또 한국 기독교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낸 전통의 교회도 면면히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영등포 주변의 지도를 봤다. 1차 탐방 코스를 잡았다. 당산동 부군당영등포감리중앙교회영등포시장영등포장로교회산상전영등포역타임스퀘어문래근린공원문래동 영단주택단지문래창작촌 순서로 돌기로 했다. 지난 26일 일요일 오후에 이 코스를 돌았다. 네 시간이 걸렸다.

영등포의 정서와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어딜까. 필자 생각으로는 문래동 영단주택단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단주택단지는 영등포가 서남부의 산업 중심으로 도약하는 기반이 된 소공인의 산업현장이다. 또 영등포구의 산업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그런 면을 고려해서 영단주택단지를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타임스퀘어를 빠져나왔다. 도로 이정표를 보니 직진 방향으로 문래역이 있다. 멀지 않았다. 500m도 되지 않는 듯했다. 문래역 건너편에 도시 숲이 보인다. 문래근린공원이 있다.

문래근린공원에 가장 오래된 박정희 흉상이

문래근린공원 박정희 전 대통령 흉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문래근린공원 박정희 전 대통령 흉상.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문래근린공원을 찾아온 이유가 있다. 이곳에 박정희 흉상이 있다. 전국 곳곳에 있는 박정희 흉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원래 이 공원은 5·16군사정변 지휘부이자 수도군단 전신인 육군 6관구사령부가 있던 자리다. 육군 6관구사령부는 5·16 군사쿠데타를 모의했던 곳이다. 실제로 이를 자랑하듯 좌대 하단에는 ‘5·16 혁명 발상지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군부대가 떠난 뒤 흉상이 일반에 공개됐다. 박정희 흉상을 중심으로 이중 펜스가 설치되어 있다. 바깥쪽엔 자물쇠까지 채워져 있다. 아직도 이 흉상의 철거 논란이 마무리되지 않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 흉상은 군사정권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면서 철거 논란에 휩싸였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들에 의해 철거되기도 했다. 또 박근혜 게이트가 한창일 때 한 시민에 의해 스프레이 세례를 받기도 했다.

실물을 확인하기 전 박정희 흉상이 문래동에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근대화의 아버지숭상하기 위해 산업화의 현장에 모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님이 확인되는 순간, 필자의 머리는 역사 논쟁에 빠졌다. 박정희 흉상을 둬야 할까 아니면 철거해야 할까. 윤석열 정부로부터 육사 캠퍼스에서 쫓겨난 홍범도 장군(흉상)이 생각난다. 공산당 가입 이력이 홍 장군 흉상 철거 이유다. 박 전 대통령도 남로당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왜 철거를 주장하는 주체가 다른 것일까. 왜 지키려는 자와 철거하려는 자의 사유가 이현령비현령일까. 어느 측도 일방적 역사 평가를 금과옥조로 내세우지 않길 바란다.

일제시대 사옥동으로 불렸던 영단주택단지

영단주택단지 골목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영단주택단지 골목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영단주택단지 골록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영단주택단지 골록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영단주택단지 골목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영단주택단지 골목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문래근린공원을 빠져나왔다. 길을 하나 건너면 문래동 영단주택단지다. 길을 따라 난 골목 어귀마다 용접 안경, 망치와 같은 산업현장의 핵심 공구로 만든 조형물이 서 있다.

영단주택단지의 역사는 일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은 당시 문래동을 사옥동(絲屋洞)’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문래동이라고 했다. 둘 다 방직공장이 많다는 뜻이다. 사실 공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문래동은 갈대밭이었다. 인가가 없었다. 이곳에 경성, 종연, 동양 등 크고 작은 방직공장이 많이 들어섰다. 방직기를 뜻하는 우리말 물레를 음차해서 문래동이라는 동네가 생겼다는 얘기가 있다. 공장이 들어서면서 일자리를 찾아 노동자가 모여들었다. 곧 주택난에 빠졌다. 이들을 위해 공급된 주택이 바로 영단주택이다. 전형적인 식민지 문화인 셈이다. 하지만 영단주택단지에서 영단주택을 발견하지 못했다. 좁은 골목을 따라서 나란히 지어진 벽돌집이 일제 때 지어진 영단주택일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길을 따라 나란히 지은 일본집은 나가야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적산가옥이 그것이다. 일본의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해 지은 합숙소가 나가야의 출발이었다. 아마도 문래동 영단주택단지도 처음에는 일본처럼 나가야(일본식 줄사택) 형태로 지어졌을 것이다. 그런 본래의 영단주택을 볼 수 없는 것은 미군정과 한국전쟁 그리고 산업화를 거치면서 가옥의 형태와 모양도 달라진 것으로 추측해 본다. 혹시라도 원형이 그대로 남은 영단주택이 있다면 몇 채라도 보전할 수 있으면 좋을 듯하다.

영단주택단지 뒷골목으로 돌아들어 가면 문래동 철강골목이다. 1960년대 소규모 철공 업체와 철강판매업소들이 모여들며 자생적인 철강 단지를 형성했다. 철강산업이 최전성기를 누리던 1990년대에는 철강골목은 크고 작은 철강사만 무려 1,000곳이 몰려 있었다. 이들 철강사는 기계 부품, 방위산업용품, 자동차 부품 등 무엇이든지 원료만 있으면 2~3일 안에 만들어낸다. 국내에서 시제품을 제작하는 거의 유일하다고 한다. 지금은 철강골목에 철강사보다 카페와 술집이 더 많아 보였다. 아무리 일요일이라고 하지만 문을 연 공장은 한 곳도 보지 못했다.

철강골목에 MZ세대 핫플레이스 변신

철강골목 공구 조형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철강골목 공구 조형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철강골목 공구 조형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철강골목 공구 조형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철강골목 공구 조형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철강골목 공구 조형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지금 이곳은 철공소와 문화라는 기묘하게 융합한 핫플레이스가 되고 있다. 공장과 문화와 비즈니스라는 공간을 함께 품고 있다. 2003년부터 이 철공소 주변으로 예술가를 모여들게 만들었다. 1990년 시화공단 등으로 이주한 빈 철공소에 젊은 예술가들이 들어왔다. 공장형 건물을 예술가들이 새롭게 디자인했다. 진동하던 쇳가루 냄새는 점점 사라졌다. 입소문이 나면서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핫플레이스가 됐다고 한다. 문래역으로 이동하는데 젊은이들이 줄을 지어서 문래동 영단주택단지 방향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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