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구는 서울 속 민간신앙의 성지다. 당산동 부군당, 성산당, 방학곶지 부군당, 신기리 도당. 수많은 민간신앙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곳을 찾아간다.

당산동 부군당, 성산당, 방학곶지 부군당, 신기리 도당 제당 흔적
등포중앙교회와 영등포교회, 도림동 성당 역사와 전통 상징 종단

당산동 부군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당산동 부군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당산동 부군당, 상산당, 방학곳지 부군당, 신기리 도당은 모두 마을 제당이다. 마을 제당은 액을 몰아내고 복을 불러들여 마을과 주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성지다. 지금도 이곳에서 당산굿을 벌이고 제사를 모신다. 제삿날은 41일 혹은 101일이다. 이들 네 곳은 이름이 달라도 모두가 부군당(府君堂)으로 통한다.

액을 몰아내고 복을 불러들이는 성지제당

그럼, 왜 영등포구에 이 같은 제당이 산재한 것일까. 부군당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부군당이라는 이름에 있다. 한자를 유심히 보자. ‘()’는 마을을 뜻하기도 하지만 관청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는 정부와 민간이라는 복합적 의미가 있다. 민관을 연결하는 게 한강이다. 한강은 인적·물적 교류의 통로다. 산업의 원동력을 유지하는 기반이다. 안전한 뱃길을 기원했다. 부군당은 이를 빌던 일종의 종교시설이다. 영등포구에 부군당이 많이 설치된 이유는 한강 수변이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이다. ‘한강 관리를 위해 정부의 개입이 불가피했다. 제사도 관청이 주도했다. 부군당은 관아의 수호신을 모셨다. 한국고전용어사전 정의에 의하면 조선시대 각 관아에서 신령을 모시고 위하던 건물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나중에 무교와 유교가 결합했다. 그 과정에서 주도권이 민간에 넘어왔다. 민간이 주체가 되어 제사를 지낸 것이다. 민간신앙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당산동 부군당을 찾아간다. 당산역에 내렸다. 인터넷상에는 삼성래미안아파트 앞에 있다. 무작정 높게 쏟은 아파트 건물만 바라보고 걸었다. 골목으로 들어섰다. ‘길은 통한다라는 믿음 하나로. 하지만 좁은 골목을 빠져나올 수가 없다. 어디가 어디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돌고 돌아도 거기가 거기 같다. 곡절 끝에 골목을 빠져나왔다. 한옥과 빌라 그리고 초고층 아파트가 혼재해 있다. 마치 시간의 계단같다. 판잣집-빌라-아파트로 이어지는 시간의 나이테가 선명하다. 김시덕 서울대 교수가 말한 삼문화 광장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삼문화를 상징하는 것은 멕시코시티에 있는 산티아고 성당이다. 이 성당은 고대 아즈텍문명, 멕시코를 지배했던 스페인 문화, 멕시코의 현대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주택가 벗어난 곳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눈에 띄었다. 계단 10여 개면 오를 수 있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선 나무,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중 한 그루는 보호수였다. 은행나무 수령은 1968년 현재 580세다. 친절하게도 나무의 내력이 설명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왕의 행차를 기념해 심었다. 동네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겨 제사 지냈다라는 게 그 골자다. 신목(神木)이다.

신목으로 불리는 은행나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신목으로 불리는 은행나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수령 580세 은행나무 신목동네 정신적 지주

신목이 있다는 것은 당산이 있다는 의미다. 민간신앙에서 산은 신과 같은 존재다. 그곳에 당을 짓거나 돌탑을 세웠다. ()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다. 그게 당산(堂山)이다. 당산에서 지내는 제를 당산제다. 당산 신에게 올리는 굿이 당산굿이다. 당산동 부군당은 당산에서 100m 떨어져 있다. 골목 한 가운데 있다. 빌라들 사이에 끼어있다. 콘크리트 2층 건물 2층에 달랑 한옥 한 칸이 서 있다. 그것도 철조망이 둘러있다. 문도 잠겨 있다. ‘닫힌 문은 신성함의 표시일까. 아니면 시대의 부적응을 뜻하는 것일까.

당산동 부군당의 역사를 되새길수록 아픔은 커져 온다. 그 존재 자체가 대견할 뿐이다. 부군당 앞에 세워진 부군당비()에 의하면, 이 건물은 1950년에 세워졌단다. 당산동 부군당의 신령은 나무다. 신과 산은 상호작용을 한다. ‘신성한 나무는 신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부군당비에 적혀 있다.

당산동 부군당 145048일에 건립됐다. 왕이 다녀간 직후에 은행나무가 심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목의 효험이 약 500년이 지난 뒤 발휘됐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였다. 당시 저지대인 영등포 일대는 쑥대밭이 됐다. 오직 살아난 사람은 신목 밑에 피신한 사람들 뿐이었다고 한다. 신령한 나무를 기리고 보존하는 것은 후대의 역할이었다.

성전 대접 받던 상산전천덕꾸러기 전락 왜

영등포시장 인근에 있는 상산전(上山殿)으로 간다. 영등포시장을 지나 아크로타워스퀘어를 지났다. 아크로타워스퀘어 건너편은 한때 청소년 출입 금지구역이 있었다. 일명 창녀촌이다. 그 흔적을 지우는 공사가 여기저기 한창이다. 공사장 건너편 작은 공원 속에 상산전이 있다. 신성한 성전 대접을 받던 상산전(上山殿)은 천덕꾸러기가 됐다. 도시 개발과 확장 과정에서 이곳저곳 옮겨 다녔다

상산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상산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천만다행일까. 이제 제대로 자리를 잡은 듯하다. 아크로타워스퀘어 옆 소공원에 번듯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새롭게 단장된 모습이다. 당산동 부군당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다. 상산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산뜻한 기둥 장식과 석주로 꾸며져 있다. 절로 장엄함이 느껴진다. 마을 사람의 상산전을 섬기는 마음이 읽힌다. 민중 속에 살아 숨 쉬던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살아난 듯하다. 성산 부군으로 모시는 대황(大荒)님도 좋아하실 게 틀림없다.

지금도 상산전은 매우 신성한 곳으로 인식된다. 상산전은 한양으로 귀경하던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행인의 무사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곳이다. 그 효험 때문일까. 상산전 인근 마을에서는 장티푸스, 천연두 등의 전염병이 돌 때도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민속 신앙은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맞선 저항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상산전도 마찬가지다. 안내판에 이를 알 수 있는 설화 한 토막이 소개되어 있다. 일제 땐 한 일본 군인이 상산전 앞을 지나가게 됐다. 그 일본군은 말을 탄 채 상산전을 지나려고 했다. 말발굽이 땅에 붙었다. 상산전에 예를 갖추고 난 뒤에야 상산전을 지날 수 있다는 설화다.

사실 영등포구는 민속 신앙만이 아니다. 역사가 깊은 교회도 적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영등포중앙교회(감리교)와 영등포교회(장로회), 도림동 성당 등 역사와 전통을 가진 종교단체가 많다. 특히 이들 종교기관은 독립운동, 한국전쟁, 산업화와 도시화 등 소용돌이치던 근현대사에서 생명을 불어넣는 담론의 장 역할을 훌륭하게 해왔다. 특히 힘없고 배운 것이 부족한 시골 출신의 공장 노동자가 의지했던 보금자리였다.

한강 이남 최초 감리교회 영등포중앙교회

영등포 중앙교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영등포 중앙교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그 선봉에 선 건 1936년에 문을 연, 한강 이남의 최초 감리교회인 영등포중앙교회다. 영등포중앙교회는 도시산업선교의 중심에 섰다. 도시산업선교는 영등포의 공단 근로자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등 지역사회를 섬기는 데 앞장선 기독교 운동이다. 이 운동은 초교파적인 사역으로 발전하게 됐다. 민주노동운동의 그루터기 역할을 했다. 또 영등포중앙교회는 1946년 영등포 지역에서 최초로 유치원을 개원했다.

당산동에서 영신로를 따라 걷다 보면 당산삼성래미안4차아파트 건너편에 영등포중앙교회가 있다. 하지만 어디에도 영등포중앙교회의 연역을 알려주는 안내판 하나 없다. 고색창연한 본당 건물이 아니었으면 교회임을 알 수도 없었다. 역사만큼 고색창연했다.

영등포 시장을 지나 아크로타워스퀘어로 가는 길에 영등포교회가 있다. 한강 이남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유서 깊은 교회다. 교회 현관을 들어갔다. 마치 서울도서관에 온 듯하다. 계단식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한편에는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이 있다. 원두우 목사다. 연세전문대학 설립자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글식 이름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7년부터 벽지 전도를 시작했다. 그곳이 바로 영등포다. 올해로 영등포교회는 120주년을 맞는다. 영등포교회는 1919년 우리나라 최초의 야간학교를 개설, 문맹 퇴치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서울미래유산 지정 도림동성당 건축사 가치

도림동 성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도림동 성당.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도림동으로 가면 한강 이남의 최초가 또 있다. 1936년에 세워진 도림동 성당(영등포 본당, 행정 개편으로 1946년 도림동 성당으로 바뀜)이다. 도림동 성당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가톨릭 전통적인 건물은 건축사 측면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성당 본당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동림동 성당에는 이현종 신부, 서봉구 형제순교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의해 피살, 순교하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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