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겨울을 경계하는 것일까. 겨울비가 내렸다. 바람도 세차다. 비바람이 차분해지길 기다렸다. 소용없다. 이미 늦은 오후(11)로 접어들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겨울비를 뚫고 영등포역으로 갔다.

영등포역 전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영등포역 전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영등포역, 서남권 주요 교통거점이자 영등포 얼굴
- 반세기 된 외화벌이를 위한 성매매 허용 수도골목

영등포’. 영등포라고 하면 영등포역 혹은 영등포역 일대를 일컫는 말이다. 영등포역은 영등포의 얼굴이자 서울 서남권의 주요 교통거점이다. 영등포역은 숱한 애환의 역사를 가진 역사의 현장이다. ·장년 세대에겐 영등포역은 새 삶을 위한 꿈의 문턱이었다. 꿈 하나 믿고 무작정 상경한 그들은 이제 영등포의 주인이 되었다.

플랫폼을 벗어나 계단을 올랐다. 계단 창문을 통해 본 얽히고설킨 철로가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또 어디에선가 다가오고 있다. 복잡한 레일이 영등포의 이력과 미래를 묘사하는 듯했다.

경인선 개통 1899124년된 영등포역

영등포역이 생긴 건 지금으로부터 124년 전이다. 경인선이 개통되던 1899년이다. 인천 제물포가 시발역, 영등포역이 종착역이었다. 원래 계획된 종착역은 한강 이북의 노량진역이었다. 잦은 홍수로 노량진역 역사 건설 공사와 철로 연결 공사가 지연되는 바람에 임시로 영등포역까지 운행한 것이다.

영등포역을 나왔다. 혼잡한 거리풍경이 눈앞에 들어왔다. 비바람도 아랑곳없는 것일까. 수많은 인파가 비를 뚫고 종종걸음으로 바삐 움직인다. 영등포역 주변의 하루 유동 인구는 얼마나 될까. 31만 명이란다. 지하철 1호선을 비롯해, 40여 개 버스 노선이 지난다. 영등포역 지하상가, 신세계백화점과 타임스퀘어 쇼핑몰, 영등포시장 등 대형사업시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대형쇼핑몰에는 화려한 조명이 영등포 사거리를 감싸고 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끽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영등포역와 영등포시장을 잇는 영중로에 도착했다. 하나둘씩 불을 밝히는 이들이 있다. 영등포의 거리 가게들이다. 영중로는 50여 년간 거리 가게가 최대 70여 개가 운영된 서울의 대표적인 거리 가게 밀집 지역이다.

일제,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 삼은 영등포

타임스퀘어 전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타임스퀘어 전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영등포역 일대는 1920년대까지는 농촌이었다. 그 변화는 일제의 필요로 시작됐다. 일제는 영등포역 일대를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았다. 경기도 시흥이던 영등포 지역이 서울(경성부)에 편입된 것도 이즈음(1936)이다. 또 영등포역도 정식 정차 기차역이 됐다. 철도역 일대에는 공단이 조성됐다. 1930년대 이곳에 4,000개가 넘는 공장(5인 이상 공장)이 들어섰다. 주로 농산물 약탈과 연관된 식품, 가공업이나 방직 등 경공업에만 치중됐다. 중화학공업이나 기계공업은 미미했다.

하지만 약 100년이 흐른 지금 영등포 공단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딱 한 곳이 남아 있다. 경성방직이다. 경성방직은 지금의 경방이다. 공장이 현존하는 게 아니다. 당시의 경성방직 사무동이 보존되어 있다.

타임스퀘어 8번 게이트에 붙어 있다. 후문 쪽이다. 사무동을 가기 위해서는 타임스퀘어 광장을 지나야 한다. 광장에는 아메리칸 빈티지 주유소 개념의 산타 스테이션과 네온사인 장식으로 꾸민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매장은 상 드리지 거리의 상점 못지않다. 다양한 상품, 푸트코트, 영화관, 호텔, 극장 등 다양한 놀거리, 먹을거리를 갖춘 복합 공간이다. 타임스퀘어는 국내 최초의 선진국형 복합쇼핑몰로 불린다. 영등포의 랜드마크 중 하나라는 말 틀리지 않은 듯하다.

2004년 국가등록 문화재 경방 사무동

화려한 불빛에 익숙해질 즈음 고색창연한 건물 한 동이 보였다. 담쟁이덩굴에 쌓인 붉은색 벽돌 건물이었다. 1936년 지은 아치형 입구의 사무동이었다. 이 건물은 지금 오월의 종이라는 카페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2004년 국가등록 문화재로 지정됐다. 건물 앞에 놓인 표지판에는 한국전쟁 때 공장시설은 파괴되거나 소실돼 1952년 공장을 복구해야 했지만 본 건물은 피해를 모면했다. 벽돌집에 목조트러스로 지방 가구를 짠 건물로 원형이 잘 유지된 편이라고 소개돼 있다.

경성방직은 민족 기업의 시작이다. 섬유산업의 출발이다. 경성방직이 세워질 때는, 경성방직이 대한제국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성방직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인촌 김성수에 의해 설립됐다. 자본금 100만 원으로 시작한 민족 기업이었다. 인촌은 경성방직을 통해 민족 자강을 이루길 꿈꿨다. 그것이 3·1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인촌은 송진우 선생과 함께 3.1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했다. 경성방직은 독립운동의 자금줄 역할을 담당한 것도 그런 이유다.

이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경성방직의 대표상품은 광목이었다. 상표 이름은 태극성(太極星)’. 태극 문양 주변에 8개의 별을 새긴 디자인이었다. 8개의 별은 조선 8도를 의미했다. 브랜드 자체가 민족 마케팅이었던 셈이다. 상표 그 자체가 일제를 쓰지 말고 우리 것을 쓰자는 호소였다는 얘기다.

경방 사무동.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경방 사무동.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민족자강을 깨우고 일으킨 인촌 김성수 설립

경방은 우리나라 처음으로 산업체 부설 학교(1943)를 설립했다. 당시 경방에 일하는 노동자 중에는 땅과 재산을 일제에 빼앗긴 사람이 많았다.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공장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설립했다. 공장 일과가 끝난 뒤 간부사원과 노동자는 교사와 학생으로 다시 만났다.

그런데 왜 경성방직 사무동이 타임스퀘어에 붙어 있는 것일까. 경성방직의 후신인 경방이 섬유산업의 사양화의 대안으로 백화점 사업에 진출했다. 그리고 공장 대지 일부에 백화점을 세웠다. 그게 경방필백화점이다. 그것이 2009년 타임스퀘어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타임스퀘어는 핫플레이스다. 스포트라이트도 강하다. 빛이 강할수록 그 그림자는 길고 짙은 법이다. 타임스퀘어의 그늘에 숨어 있는 뒷골목이 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아픈 현실로 남아 있는 수도골목이다. 골목의 길이는 불과 20m에 지나지 않는다. 골목 양옆으로 늘어선 가게도 10개 남짓에 불과했다. 이곳은 영등포의 사창가로 불린다. 일명 마지막 남은 집창촌이다.

필자가 수도골목에 들어섰다. 혹시 소매라도 잡혀 끌려 들어가면 어쩔까. 젊은 여성들의 시선을 어떻게 피해야 할까. 갖가지 궁상을 떨며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필자가 상상하던 상황과는 정반대였다. 유리방으로 안내하는 휘파리 여성의 호객행위를 볼 수 없었다. 적막 그 자체였다. 왕래하는 사람도 없다. 커다란 통유리로 만든 방은 하나 같이 붉은색 암막 커튼으로 갈려져 있다. 불빛이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너무 이른 시간인가? 아니 진작 영업을 시작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영등포 사창가 휘파리 여성호객행위 사라져

불꺼져 있는 영등포 사창가 골목. 이른바 수도골목.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불꺼져 있는 영등포 사창가 골목. 이른바 수도골목.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수도골목은 삶에 지친 도시 빈민들의 거칠고 고단한 삶의 현장이다. 어쩌면 이 골목만이 이곳에서 일하던 젊은 여성의 희로애락을 알지 모른다.

이 홍등가가 생긴 건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미군을 상대하기 위해 생겨났다. 정부도 거들었다. ‘외화벌이를 위한 성매매 허용 특정 구역으로 지정했다. 거기에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그늘을 덫 씌웠다. 도시 빈곤층이 영등포 역전 부근의 값싼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수도골목은 때론 도시 빈민 나그네의 지붕 되어 주기도 했다. 골목에서 일하던 여인은 외로운 자에게 위로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 역사가 어느덧 반세기를 넘고 있다. 이제 세월의 변화를 따라야 한다. 곧 도시정비사업이 시작된다고 한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