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호암산을 다시 찾았다. 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탔다. 호압사 앞에서 내렸다. ‘호암산문(虎巖山門)’이라고 쓰인 편액이 보인다. 호압사(虎壓寺) 일주문이다. 호암산에 있는 유일한 전통 사찰, 호압사. 호랑이 기운을 억누르는 절이다. 이름이 원색적이고 직설적이다.

호암사 호압사 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호암사 호압사 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일주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일주문.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 비보풍수의 산물 ‘호랑이 기운을 억누르는 절’ 창건
- 시흥행궁 정조 현륭원 사도세자 행차길 있던 임시 궁전

호압사라는 이름은 갖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호암산은 호랑이 산이다. 맹수의 정기를 품은 산이다. 그 기운이 궁궐(경복궁)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해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자리에 절을 지었다. 호압사의 창건(태종 7, 1407) 비화다. 호압사는 비보풍수의 산물이다. 그뿐만 아니라 비보(裨補) 사상에 근거해서 한양이 설계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선조의 지혜와 세심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태종7년 창건...선조의 지혜와 세심함 빛나

비보풍수는 삶의 영양제와 비슷하다. 도와서 모자란 것을 채워 건강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AI시대에 뜬금없이 풍수를 운운하는 게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암암리에 비보풍수에 젖어 살고 있다. 자연환경을 이해하고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는 삶의 방식이 된 지 오래다. 손 없는 이삿날을 잡는 것, 새해를 맞아 세화(歲畫)를 대문에 붙이는 것도 비보풍수에 포함된다.

비보풍수는 중국에서도 유행한다. ‘인테리어 풍수이(風水)’라는 이름으로. 이를테면 풍수상 책상은 동쪽에 있는 게 좋다. 방의 구조상 그럴 수 없을 수 있다. 이때 보완재를 쓴다. 빨간색 책상을 드린다. 기의 흐름을 원만하게 하는 비보풍수 방식이다. 인테리어 풍수이는 미국에도 수출됐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인테리어 풍수이에 입각해서 자신의 집무실을 꾸민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실리콘밸리에서도 한때 인테리어 풍수이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호압사 약사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호압사 약사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호암산문에서 호압사까지 300m 된다.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것도 울퉁불퉁한 시멘트 길이다.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숨이 차오른다. 숨을 고르면서 호암산을 올려다봤다. 지명에 관련한 이야기를 되새겼다. 호암산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듯하다. 호압사의 비범함이 느껴진다.

기에 누린 것일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사찰 경내로 들어가지 않았다. 산비탈을 따라 꽤 많은 나무 의자가 놓여있다. 호압사 방문객과 호암산 등산객을 위해 마련된 듯하다. 이 휴식 공간 앞에 포효하는 호랑이 한 마리(모형)가 서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포효하는 한마리 호랑이 방문객 맞이

호랑이 모형. ​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호랑이 모형. ​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찰로 들어갔다. 사찰은 아담했다. 한눈에 담을만한 크기다. 특별함을 느낄 게 없다. 약사전, 불연각, 삼성각, 범종각, 설선당, 그리고 천진불, 89층석탑, 관세음보살입상 등이 전부다. 굳이 특이한 점이라면 약사불을 모신 약사전이 대웅전을 대신하는 것 정도다. 약사전이 위치한 장소가 바로 호암산 호랑이의 꼬리부분이다. 약사전 앞에 섰다. 호랑이 이미지가 떠오른다. 호랑이 기운이 느껴진다. 약사전에는 석불좌상(약사불, 서울시 문화재자료 8)이 모셔져 있다. 금으로 도금된 석불이다. 조선 초기 양식의 석불이다.

호압사를 특별하게 하는 게 또 하나 있다. 불연각(종무실) 바로 앞에 있는 두 그루의 보호수다. 지정일 기준(1998)으로 수령이 무려 500년 된 느티나무다. 호압사의 역사와 내력을 속속히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다.

호압사 또 다른 명물 500년 느티나무

보호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보호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태종이 창건 당시 호압사라는 편액을 내렸다는 게 호압사와 관련된 유일한 기록이다. 그 이후의 기록은 없다. 훗날 호압사를 중건할 때 느티나무를 그대로 살려서 편각을 배치한 듯하다. 느티나무는 고단한 역경을 숨기고 있는 듯하다. 한 그루는 두 개의 줄기가 서로를 감싸 속이 빈자리를 숨기고 있다. 다른 한 그루는 커다란 가지에 난 (콘크리트) 수술 흉터 자국조차 숨기지 못한 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아픔을 이겨낸 느티나무는 호압사의 수호신이 됐다. 호압사를 들른 불자 중 많은 사람은 느티나무 앞에서 손을 모은다.

시흥행궁정문으로 추정되는 장소.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시흥행궁정문으로 추정되는 장소.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시흥행궁으로 추정되는  장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시흥행궁으로 추정되는 장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호압사를 나와 탑골로를 따라 걸었다. 시흥5동 은행나무 사거리로 가는 길이다. 1.5km쯤 걸은 것 같다. 오밀조밀한 골목길이 이어졌다. 번잡한 도심에서 한적한 샛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게 색다른 느낌이다. 은행나무시장을 지나자 바로 은행나무 사거리다. 저 멀리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고목 두 그루가 보였다. 금천구의 명물인 은행나무다. 또 다른 한 그루는 민가 골목에 있다. 은행나무 사거리라는 명칭도 보호수 3형제가 살고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은행나무 3형제는 장수 가족이다. 1968년 보호수로 지정된 이들의 수령은 무려 800. 이 은행나무가 여기서 광복도 보고 전쟁도 겪었다. 800년 역사의 흥망성쇠를 다 지켜보고 있었다.

금천구 또 다른 명물 800년된 은행나무
 

800년된 은행나무 보호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800년된 은행나무 보호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세월의 흔적이다. 조선의 문화 중심지 풍경은 정말 단출하다.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온 낯선 세상 같다. 상상으로나마 그 시절, 그때의 모습을 그려본다. 은행나무의 나이테를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곳은 조선시대 수도권 서남부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다. 관아도 있었다. 아전 골목의 병사 터도 있었다. 은행나무 밑에 동헌관아자리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또 다른 한 그루는 도로 한 가운데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옆으로는 시흥현령 선정비네 개가 서 있다. 이곳을 옛날에 비석거리라고 불렀단다. 비석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18여 기의 비석이 서 있었단다. 수해로 없어지거나 인위적으로 파손되어 현재 4기만이 남았다. 비석에는 현령 이름과 재임 기간이 적혀 있다. 이 비석이야말로 시흥의 역사를 말해주는 유일한 유물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시흥 행궁이다. 시흥 행궁은 약 200년 전 수원 화성 현륭원에 잠든 아버지 사도세자를 만나러 가던 길목에 있던 임시 궁전이다. 정조는 시흥 행궁에서 하루 묶었다.

시흥의 역사 말해주는 시흥 행궁

시흥행궁도. ​호랑이 모형. ​보호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시흥행궁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시흥 행궁을 수원 화성까지 가는 길은 초기의 시흥대로였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뵙기 위해 수원 화성으로 가던 길이다. 정조와 사도세자를 잇는 효성의 길인 셈이다. 이 길은 1795년에 처음 열렸다.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아버지가 계신 화성에서 열었다. 가는 길은 백성과 소통하는 통로였다. 격쟁(왕이 거동할 때를 포착하여 북이나 꽹과리를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백성이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위)를 공식화했다. 상언(선비나 유생이 아닌 백성이 쓰는 상소문)도 받았다. 정조는 화성행궁 중 1,000여 건의 민원을 해결했다.

그 길의 행렬 면면은 환어행렬도(정조가 화성 행차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영화 찍듯 자세히 그린 작품)’가 잘 보여주고 있다. 환어행렬도 속에 부각해서 그린 시흥행궁도가 남아 있다. 시흥 행궁의 배치도라고 할 수 있다. 그 규모가 114칸이나 됐다. 정당, 시흥당, 내결당, 행랑 등이 있었다. 시흥 행궁 앞에는 시흥천이 흐르고 있다. 홍살문도 있다. 행궁의 행렬을 그린 반차도에는 1,799, 732필이 그려져 있다. 실제 행궁에는 6,400여 명과 말 1,400여 필이 동원됐다고 한다. 일종의 군사 퍼레이드를 방불했을 것 같다.

사라진 시흥행궁금천구 복안 방안 검토중

시흥행궁으로 추정되는 장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시흥행궁으로 추정되는 장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시흥현령 선정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시흥현령 선정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자신의 저서 <도시의 승리>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도시라고 말했다. 하지만 도시는 완벽하지 않은 모양이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시흥 행궁길이 옛길이 됐다. 옛길은 기억에 사라진 길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길이다. 사람이 길을 버린 결과다. 시흥행궁에 있던 기왓장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철종 때 불이 났다. 조선의 궁궐을 동물원으로 만드는 등 조선 궁궐 격하에 열중이던 일제가 불탄 시흥행궁을 복원할 리도 없었다. 방치됐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문제는 시흥 행궁의 위치도 정확히 모른다. 단지 짐작할 뿐이다. 시흥 행궁의 정문 앞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채제공의 시·정문 앞엔 은행나무 한 그루/ 밤들어 바람소리 어찌 이리 차가운가). 또 시흥행궁도에서 볼 수 있는 홍살문 앞의 시흥천(복개도로가 된 지금의 교하천) 등이 단서다. 이를 토대로 한 시흥행궁의 정문 추정지는 바로 은행나무시장 앞 태평약국 자리다. 금천구는 시흥계곡 혹은 시흥생태공원에 시흥행궁을 복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옛 시흥의 자부심을 살리기 위한 도시브랜딩의 일환이란다. 시흥의 독특한 역사와 이야기로 한층 매력 있는 시흥, 금천, 그리고 서울을 만들어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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