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여왕은 많지 않다. 서양에만 클레오파트라(Cleopatra) 같은 여왕이 있는 게 아니라 중국은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있었고, 일본도 여성 천황이 8명 있었다. 우리 역사에는 세 명의 여왕이 있다.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인데 모두 신라의 왕이다. 

신라에만 여왕이 있는 이유는 ‘골품제(骨品制)’라는 독특한 신분제도 때문이다. 법흥왕 무렵부터 성골(聖骨)만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성골 신분이 여자만 남게 되면(聖骨男盡·성골남진) 여자가 왕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의 비인 알영(閼英)은 혁거세와 함께 “두 명의 성인”으로 불린 독립적 여성이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주목해 볼 때 신라에서 여왕의 탄생은 예외라기보다 우리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는 모계 존중이 두드러졌고, 화랑 이전에 ‘원화(源花)’ 제도가 있었으며, 왕의 사위도 왕이 될 수 있었던 나라였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은 최초의 여왕으로,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의 맏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복승갈문왕의 딸인 마야부인 김씨이다. 

선덕은 자라면서 ‘용봉(龍鳳)’의 자태와 ‘천일(天日)’의 위의를 지녀 성품이 관인명민(寬仁明敏)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성조황고(聖祖皇姑, 성스러운 조상을 둔 하늘 여신)’라고까지 했다. 

선덕여왕은 치국의 요법을 체득한 현명한 군주였다. 즉위 원년에 사궁(四窮, 환과고독)을 진휼했고, 다음 해에 일 년 부세를 덜어 주어 국인이 안업낙생(安業樂生) 하도록 힘썼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선덕왕 지기삼사(知幾三事, 선덕왕의 기미를 알아차린 세 가지 일)’라는 제목으로 지혜로움을 묘사하였다. 

당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모란에 향기가 없음을 알았으며, 왕궁 서쪽의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많이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만 듣고서 서남쪽 변경의 옥문곡(玉門谷)에 백제군이 잠입해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여 이를 격퇴하였으며, 죽을 때 “도리천(忉利天)에 묻어달라”고 유언하면서 낭산(狼山)에 능을 쓰라고 하였는데, 후일 낭산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창건되면서 결국 선덕왕릉이 도리천에 자리잡는 형국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지기삼사에 나타난 ‘기행이적(奇行異蹟)’만 보아도 진평왕의 후계자 선택이 옳았음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은 집권 후기에 고구려·백제의 ‘공침(共侵)’에 시달렸다. 642년(선덕여왕11) 가을, 백제 의자왕이 신라 서쪽 40여 성을 점령했고, 백제 고구려 연합군이 당항성(唐項城)을 빼앗았다. 또 백제 윤충이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을 공격해 김춘추의 딸(고타소)과 사위(품석)가 죽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첨성대와 분황사를 세운 바 있는 선덕여왕은 불교 진흥을 통해 국론 결집에 나섰다.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의 건의로 세계 최대의 ‘황룡사9층목탑(높이 82미터)’을 건립했다. 

9층목탑은 신라 중심의 질서를 세우겠다는 ‘세계화 프로젝트’이다. 백제·고구려·일본 외에도 남쪽으로 탐라·오월, 북쪽으로 말갈·거란·여진, 나아가 중국이 조공한다는 원대한 비전 제시는 오늘날 대한민국에도 유용한 가치라고 하겠다.

647년 1월 8일. 선덕여왕은 ‘비담(毗曇)의 난’이 진압되기 열흘 전에 타계했다. 파란이 많은 공전(空前)의 16년 재위였다. 김유신과 김춘추라는 걸출한 영웅을 발탁해서 이청득심(以聽得心)과 소의간식(宵衣旰食, 부지런히 정사에 힘씀)으로 삼한일통의 기반을 닦은 선덕여왕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敬天明敏呼皇姑(경천명민호황고) 하늘을 공경하고 명민하여 ‘하늘 여신’이라 불리었고
龍鳳寬仁海內珠(용봉관인해내주) 용봉의 자태와 너그럽고 어진 성품 신라의 보배였네
四恤安民稱頌有(사휼안민칭송유) 사궁을 진휼하고 백성을 편안히 해 칭송이 자자했고
三奇異蹟隱憂無(삼기이적은우무) 세가지 기이한 행적은 (여왕의 자질) 근심을 없앴네
九層受貢高懷立(구층수공고회입) 황룡사구층탑은 주변국 조공 받는 큰 생각을 밝혔고
新國中心世界謨(신국중심세계모) 신라 중심의 세계관을 (국내외에) 도모했네
晝夜不分基一統(주야불분기일통) 부지런히 정사에 힘써 삼한일통의 기초를 세웠고
女初聖主拓前途(여초성주척전도) 최초의 여자 성군으로 신라의 앞길을 개척했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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