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기는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없고, 국립민속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너무 커서 바닥에 펼쳐놓고 전시하고 있다. 이렇게 압도적인 거대한 용대기(龍大旗)라는 농기를 본 것은 국립민속박물관에서였는데, 실내 전시실에서 보아서인지 매우 커 보였다. 가로 326센티, 세로 212센티 크기다. 내가 처음으로 대면한 농기였다.

사진1-1, 서산군 장선리 용대기(1946,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1-1, 서산군 장선리 용대기(1946,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1-2, 알기 쉽게 채색분석한 것.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1-2, 알기 쉽게 채색분석한 것. 사진=강우방 원장

- 용주변 가득 찬 구름 모양, 구름이 아니고 1영기싹
19세기 민화는 세계 회화사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회화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 당시 본 것은 복제품이었고, 박물관으로부터 실물 사진을 받아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진 1-1) 그 당시 용 주변에 가득 찬 구름 모양이 구름이 아니고 1영기싹이라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역시 매우 놀랐다. 아마도 내가 구름이 아니고 제1영기싹이라고 증명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모든 사람이 하늘의 구름 속의 용이라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1영기싹이란 것은 고사리 끝처럼, 도르르 말린 모양을 말한다. 그런데 붕긋 붕긋하게 나타내므로 한눈에 현실의 구름처럼 보인다. (사진 1-2) 붕긋붕긋하게 제1영기싹을 만든 것은 제1영기싹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한 것이다. (사진 2)
 

사진2, 제1영기싹의 다양한 표현방법.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2, 제1영기싹의 다양한 표현방법. 사진=강우방 원장

그런데 용이 현실에서 보이는 모습이 아니듯이 주변의 구름 모양이 역시 현실에서 본 구름이 연상되었을 뿐이지 구름이 아니어야 한다. 이 농기에는 현실에서 보는 것은 일절 없다. 그러면 용신(龍神) 밑에 그린 물고기도 물고기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 차차 설명할 것이다.

용신밑에 물고기도 물고기가 아니다?!

나는 수많은 작품을 채색분석하는 과정에서 구름이 아니고, 만물 생성의 근원의 하나인 제1영기싹임을 기적적으로 밝히게 되었다. 왜 기적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그때까지 그 모양을 아무도 몰랐으며 더 나아가 그 모양이 만물생성의 근원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영기싹이란 것은, 역사적으로 아무도 몰라서 이름이 없어 왔으므로 내가 만든 이름이다. ‘신령스러운 기운의 싹혹은 대 생명력의 싹이란 뜻이다. 역시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옛사람들이 눈에 보이도록 형상화한 것이다. 붕긋 붕긋하게 만든 것은 제1영기싹 모양 가운데 가장 강력한 모양이기 때문에 용 같은 거대하고 중요한 존재 주변에 배치했다. 즉 만물 생성의 근원의 하나이므로, ()이라는 절대적 존재라 해도 이 제1영기싹에서 생기는 장엄한 광경이다. 2영기싹과 제3영기싹은 다음에 차차 설명하기로 한다.

서산군(瑞山郡) 고북면(高北面) 장선리(長善里)라는 작은 마을이 내세우는 용대기(龍大旗). 용을 그린 큰 깃발이라는 뜻이다. 화면 가득 차게 파상문으로 용을 표현한 것인데, 파상문이란 물을 상징하므로 용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조형이다. 색도 바래고 천도 낡아서 그림이 희미하게 보이나, 채색으로 분석해 보니 용이 영기화생(靈氣化生)하는 모습이 뚜렷이 드러난다. 용의 앞에는 늘 그렇듯이 보주가 있다. 용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용을 압축한 것이 바로 보주다. 보주에서 여러 가닥의 영기문이 뻗어나간다.

용의 입에서 보주, 태극에 8괘까지 생겨

사진3, 태극과 8괘.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3, 태극과 8괘. 사진=강우방 원장

 

그런데 화면 오른쪽 위에 태극(太極)이 있고, 그 아래로 8()가 세로로 줄 서 있다.(사진 3) 태극이라는 음과 양에서 八卦가 생긴다. , 나는 용의 입에서 보주가 나오는 동시에, 태극도 나오고 동시에 팔괘가 나옴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보주를 설명하느라 그동안 고심해왔는데, 이제 태극만 설명하면 바로 보주를 모두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용의 입에서 보주가 나온다는 것이 바로 태극이 나온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사진4. 미국인  대니의 태극시 1890년경.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4. 미국인 대니의 태극시 1890년경.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5.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5. 사진=강우방 원장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역에 태극이 있으며, 이것이 음양을 낳고, 음양은 사상 즉 모든 자연현상[일월성신, 춘하추동, 태음-소음-태양-소양]을 낳고, 사상은 팔괘를 낳는다.”라고 했다. 팔괘가 천도(天道)의 운행을 말한다면, 항상 내가 말한 대로 우주에 충만한 대생명력의 대 순환을 뜻한다. 그런 도해를 간단히 만든 것이 우리나라의 태극기다. (사진 4.) 현재 태극기의 중심에는 태극이 있고 사방에 4괘가 있으나 8괘를 그리면 너무 번거로우므로 그리 한 것이다. 원래는 태극을 중심으로 팔괘가 둘려 있어야 한다.(사진 5) 팔괘는 다시 전개하여 64괘를 구성한다. 즉 육십사괘는 천지 만물의 변화원리, 즉 만물 생성, 혹은 생명 생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농기의 태극 밑에 아래로 일렬로 8괘만 배열한 것은 64괘를 배열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태극(太極)에서 시작하는 셈이 되는데 태극이란 것은 음양 사상과 결합해 만물을 생성하는 우주의 근원으로서 동양사상의 중심을 이룬다. 그러니까 바로 보주다! 보주를 어떻게 설명할까 고심해왔는데, 이미 암시한 것처럼, 태극을 올바로 이해하면 보주의 실상이 풀리는 셈이다. 이때 우리는 이 태극이 용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고 따라서 8괘도 64괘도 모두 용의 입에서 나오는 셈이다. 용의 입에서 일체가 나온다는 나의 주장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면 태극이 보주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증명해 보기로 한다.

태극기 보주라는 확실한 증명 방법

사진6-1 고려청장 매병 위 부분.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6-1 고려청장 매병 위 부분.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6-2 태극과 무량보주가 합쳐진 보주.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6-2 태극과 무량보주가 합쳐진 보주. 사진=강우방 원장

12세기 개인 소장 고려청자 음각 용문 매병이 있다.(사진 6-1) 도자기 표면 전체를 가는 물결로 가득 채우고 두 용이 마주 보는데 그 가운데에 보주가 있다. 음각선이 매우 가늘어서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이때 채색분석의 위력을 절감한다. 채색분석하지 않으면 도저히 알아볼 수 없다. 놀라운 것은 그 보주를 채색분석해 보니, 보주가 동시에 무량보주이고, 동시에 태극이라는 점이다.(사진 6-2) 보주가 곧 태극이다! 그러므로 태극과 이에 따른 8괘가 용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이 분명하다.

사진 7-1 중국 동경.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 7-1 중국 동경.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 7-2, 용처럼 순환하는 물고기.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 7-2, 용처럼 순환하는 물고기. 사진=강우방 원장

그러면 용 밑 부분에 물고기가 역시 영기화생하고 있는데 용과 물고기의 관계를 살펴보자. 이 물고기는 우리가 흔히 보는 물고기 아니다. 영화된 물고기 즉 영어(靈魚). 용이나 마카라와 같은 존재다. 중국 동경(銅鏡)의 두 물고기를 보면, 두 용처럼, 보주를 중심으로 순환하고 있어서 물고기의 위상을 알아볼 수 있다.(사진 7-1, 7-2)

다른 예를 보자. 충청남도 금산군 보석사 금당 대들보에서 물고기 입에서 용이 나오는 모양을 볼 수 있다.(사진 8-1) 일반적으로 대들보에는 용을 그려 넣기 마련이다. 19세기 민화는 세계 회화사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회화인데 문자도의 에서는 항상 작은 물고기 입에서 거대한 용이 생겨나며, 주변에 제1영기싹들이 있어서 물고기와 용이 영기화생하는 광경을 보여 준다.(사진 9) 

사진8-1. 금산 보석사 대들보 단청.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8-1. 금산 보석사 대들보 단청.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9. 문자도-충, 사진=강우방 원장
사진9. 문자도-충, 사진=강우방 원장

이로써 보면 농기에서 비록 거대한 용 입 부분에 작은 물고기가 있어서 무시하고 지나치기 쉽지만, 물고기 역시 물을 상징하고 있으며 위상이 높아 보이지만, 역시 용의 천변만화하는 모습을 표현하기 어렵다. 그래서 물고기는 작게 그려질 수밖에 없으나 용과 함께 반드시 그려 넣는 이유다.

서산군 장선면 용대기 고차원적 농기 존재

이 서산군 장선면 용대기에서는 용과 물고기와 태극과 8괘 등이 장엄하게 가득 그려져 있어서 그 상호관계를 추구해 보았다. 그러면 그 시골 마을에 그런 고차원적 농기는 왜 있을까. 농민들은 그 의미를 알았을까? 아마도 그 당시에도 서당이 있었을 것이다.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독서하는 민족이었다. 일찍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일시 점령했을 때, 프랑스 군인들이 초가집마다 책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 농민들은 서당에도 다니고,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아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암담한 시기에 민화 같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회화작품을 남겼으며, 역시 민화풍의 농기를 마을마다 만들어 가졌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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