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만 옳다 고집하면 망해, 뒤집기 전에 국민 소리 따라야
- 장녹수와 장희빈, 명성황후...어떤 변명도 백성 피눈물 보다 못해

불운인가 불행인가. 불운은 그 책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지만 불행은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조선시대 불운과 불행의 그 언저리에서 고개를 숙여야만했던 세 남자 그리고 오명인지 자업인지 역사에 최악으로 기록된 세 여자가 있다. 조선 제10대 연산군과 장녹수, 19대 숙종과 장희빈, 26대 고종과 명성황후다.

조선 최악의 폭군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는 왕을 젖먹이 애 다루듯 주무르며 광기와 독재정치로 종말을 향해 치닫던 연산군의 음탕한 생활과 악행을 더욱 부추겼다. 사실상 2인자로 온갖 벼슬과 재판에 관여해 축재했으며 무자비하게 백성을 갈취해 결국 길거리에서 참형 당한 그 시신 위로 백성들이 던진 기왓장과 돌멩이가 산을 이루었다 전해진다.

왕권 도전 세력에 환국(주류세력 교체)으로 철퇴를 내리칠 만큼 강군이자 백성 위한 제도개선과 문화 진흥에 성공한 현군으로 이름난 숙종. 그럼에도 여성 스캔들 군주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한 주인공이 장희빈으로 알려진 장옥정이다.

장옥정은 아들(20대 경종)을 세자로, 자신은 중전에 오르자 오빠 장희재를 앞세워 매관매직을 일삼고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해 장안에는 장다리(장희빈)는 한철이고 미나리(인현왕후)는 사철일세라는 노래가 퍼졌고 오빠 장희재는 처형된 후 오랫동안 거리에 방치되다가 어느 군관이 목을 잘라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민비로 불리다가 2001년 국민여신 이미연의 "내가 조선의 국모다"로 사후 100여년 만에 황후로 승격된 명성황후(사후 시호)'지략과 재략을 지닌 여걸'(서재필)이자 일본 자객에 무참히 살해된 비운의 황후라는 긍정과 동정도 받지만 명성황후가 조선과 백성에게 저지른 패악도 결코 작지 않다.

여성이 감히 정치에 개입했다는 유교 지식인들의 편협함과 일제에 의해 왜곡된 측면도 없지 않지만 우유부단한 남편 고종을 옆에 끼고 국정을 농단하고 주요 자리에 민씨 일가를 앉혀 매관매직과 국고횡령을 일삼아 임오군란과 농민반란, 동학란을 초래했다. 특히 무당에게 궁궐과 금강산 등 8도 명산 굿판 비용을 하루 천금이나 소비하고 오빠 민영익을 치료해 준 의사 알렌에게 10만 냥, 그리고 언더우드에게 100만 냥(당시 조선 예산 10%)을 주는 등 내탕금(왕실재산)을 소비해 매관매직하거나 국고까지 축낼 수밖에 없었다.

장녹수와 장희빈, 명성황후. 이들에 대한 역사의 악평은 본인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강하지만 권력 투쟁의 희생양으로 오명을 뒤집어 쓴 측면도 적지 않아 억울할 수 있다.

실제 장녹수는 아들을 둔 기녀로 흥청(연산군 기녀 제도로 미모와 춤과 노래가 탁월한 일등 기녀)에 뽑혀 궁궐에 들어가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뿐이다.

한낱 기녀가 사치와 향락, 패륜과 폭정, 잔악과 변태를 일삼는 제왕 연산군을 어찌 막을 수 있었겠나. 측근 내관 김처선의 다리와 혀를 잘라 죽이는 연산군 앞에서, 훈구파 대신들조차 아부로 권세만을 탐하는 마당에 웃음과 색정, 춤과 노래 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 기녀에게 다른 무엇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까마귀밥이 된 장녹수는 "나는 단지 성심을 다해 모셨을 뿐이고 주어진 권세를 부리고 누린 죄밖에 없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장희빈은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희생양, 숙종의 토사구팽을 주장할 수 있다. 장옥정은 경신(庚申)환국 때 숙종 어머니 명성왕후에 의해 궁에서 쫓겨났다가 기사(己巳)환국으로 세자 책봉과 중전에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갑술(甲戌)환국으로 다시 중전 장옥정은 희빈으로 격하되고 얼마 후 사약을 받아 죽는다. 지금도 장희빈은 "내 남자를 되찾고 아들의 안전을 기원했을 뿐인데 사약이라니"라고 통곡할지도 모르겠다.

서태후(청나라 말기 통치)와 함께 19세기 '동양 최악의 황후'로 불리는 명성황후의 광폭 횡보는 19세기 격변하는 제국주의 열강 할거 시기에 불가피했던 측면이 있다.

'영리한 판단과 균형감각, 뛰어난 외교력과 두둑한 배짱, 높은 교양을 지닌 여걸' 명성황후는 권력을 내놓치 않으려고 쇄국과 쿠데타를 획책하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수구세력에 맞서 남편과 아들을 지키고 조선 개화를 위해 힘껏 나선 것이다.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실제 한일합방 이후 황후를 시해한 일본과 친일세력에 의해 과장되고 확산된 측면이 강하다.

시대의 알파걸(남자보다 뛰어난 성취) 명성황후는 "왕과 세자, 종묘사직(조선) 보존을 위해 (고종에게 없는)있는 능력껏 최선을 다 했다"면서 사후 평가에 대해 코웃음치며 '무능한 뒷방 노인네들의 뒷담화'라고 일축할지도 모르겠다.

장녹수와 장희빈, 명성황후 등 선악을 떠나 한 시대를 풍미했던 3명의 조선 여걸. 뛰어난 미모와 재능, 탁월한 정치감각으로 국왕의 마음과 조정 대신의 권세, 수만금의 재물을 잡았어도 이들이 얻지 못한 것이 있다. 백성의 마음, 민심, 천심이다.

장녹수는 중종반정 세력이, 장희빈은 서인이, 명성황후는 고루한 유학자와 척사파, 친일개혁파가 오명을 뒤집어 씌웠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패악에 백성의 원성과 피눈물은 숨길 수가 없다.

조선 중기 대문신 신흠(申欽) 선생은 나라에 위기가 오면 "공론(민심)이 현명하거나 어리석다는 사람을 임금은 부인하고 (본인이) 현명하거나 어리석다고 여기는 사람만 그렇다고 고집한다"면서 "붕괴단계()를 앞두고 다스리는 것은 차라리 붕괴된 단계를 다스리는 것이 쉽다"고 말했다.

22대 총선이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중국 송나라 유학자 육구연(陸九淵)백성은 배고픔보다 불공정한 것에 분노한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여권은 실망하고 지쳐 분노한 국민이 배를 뒤집지 않도록 국민의 간곡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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