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한 달 만에 가산디지털단지역에 왔다. 지난달엔 금천구의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 체험관인 금천 순이네집을 갔다. 구로구의 첫 탐방지는 일명 언니로()’. 1960~70년대 구로공단에서 일을 마친 순이가 귀가하는 이다. 시골에서 상경한 순이들은 가리봉고개(가리봉동) 주변의 벌집닭장집에서 주로 살았다. 가리봉 고갯길의 숙소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공장을 잇는 길이 언니로라는 탐방로로 개발된 것이다.

마리오 거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마리오 거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옛 구로공단 모습. 사진=구로구청 제공
옛 구로공단 모습. 사진=구로구청 제공
구로공단 미싱 사진=구로구청 제공
구로공단 미싱 사진=구로구청 제공

- 가리봉고갯길 순이 숙소와 흩어져 있는 공장을 잇는 길
2000년 구로공단 서울디지털단지로 ICT 중심 벤처타운 변신

언니로의 출발지는 디지털2단지 사거리(일명 마리오 사거리). 패션의 천국이다. 사거리 세 모퉁이에 마리오아울렛, 파크랜드 W, 현대프레미엄아울렛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마치 마천루를 이룬 강남의 거리를 옮겨놓은 듯하다. 휘황찬란한 빛과 색으로 장식한 외형은 소비가 주는 행복감을 상징하는 듯하다. 월요일 오후인데도 쇼핑몰의 행복을 즐기는 사람이 붐비고 있다.

여성노동운동 성지....강남 마천루 연상 상전벽해

아웃렛 패션타운은 구로공단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상전벽해다. 현대프레미엄아울렛은 대우어패럴 공장이 있던 자리다. 대각선 맞은편에 마리오아울렛이 있다. 효성물산 터다. 이곳은 현대프리미엄 아울렛 바로 옆에 SG세계물산의 물류창고가 있다. 감시초소 역할을 하던 대우어패럴 기숙사였다. 40~50년 전 이곳은 암울했다. 공장에 나오는 퀴퀴한 검은 연기에 싸여 있었다. 늘 되박음질 하는 재봉틀 소리가 공장 밖으로 새어 나왔다.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의 공장 근로자의 생활 터전이었다. 특히 마리오사거리는 특별한 곳이다. 대우어패럴과 효성물산 등이 주도한 구로동맹 파업의 발상지다. 여성 노동운동의 성지인 셈이다.

구로동맹 파업은 살인적 노동 강요, 희생을 당연시하는 착취적 저임금,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저항에서 시작됐다. 월 평균 임금이 19,400원 정도였다. 식권 한 장에 야근을, 두 장은 철야를 감내해야 했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여성 노동자가 힘을 합쳤다. 노조를 결성했다.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했다. 동맹 파업으로 발전한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 있다.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 구속이었다. 이는 민주노조 탄압의 첫 신호였다. 문제의식을 공유한 섬유 노동자가 연대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동맹 파업의 시작이었다. 1985년 대우어패럴 노동자 350, 효성물산 400, 가리봉전자 500, 선일섬유 70명이 동맹 파업에 들어갔다. 농성 과정에 43명이 구속되고 370명이 구류됐다. 700여 명이 해고당했다.

구로동맹 파업...43명 구속, 370명 구류. 700명 해고

금천G벨리 안내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금천G벨리 안내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옛 대협 자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옛 대협 자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구로동맹 파업은 정치투쟁으로 발전한다. ‘구속자 석방’ ‘노동3권 보장은 물론 노동부 장관 사퇴를 요구했다. 노동 현장이 정치투쟁의 현장으로 바뀌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공순이로 불리던 순박한 어린 소녀들이 정치투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무엇일까. 소설가 신경숙은 소설 <외딴 방>에 자세하게 그려냈다.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며 농성하는 여성 노동자를 전두환 정권은 폭압적 진압했다. 음식물 반입을 막았다. 전기를 끊었다. 수도 밸브를 막았다. 추위와 배고픔, 갈증 앞에서 무력해졌다. 마지막 저항 수단을 꺼냈다. ‘누드 시위였다. 벗은 몸에 던져진 게 있다. 똥물이다. 거기에 끝나지 않았다. 진압대로부터 모진 구타를 당한다. 신경숙의 자서전적 소설, <외딴 방>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은 후대에 새로운 기억으로 남는다. 후대는 기념으로 기록을 기억한다. 하지만 마리오 사거리 주변에서 구로동맹 파업에 관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구로동맹 파업이 시작된 곳이라는 표지석조차 찾을 수 없었다. 길을 헤매다 만난 게 있다. ‘금천 G밸리 산업화와 노동자의 발자취라는 푯말이다. 이것은 옛 대우어패럴 공장의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에 가까웠다. 그 아래 구로동맹 파업에 관한 설명이 붙어 있긴 했다. 구로동맹 파업이 2001년 정부로부터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다. 노동운동만이 아니리라 민주화운동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사건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럴싸한 표지석 하나 없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 인정 구로동맹 파업 표지석 하나 없어

구로동맹 파업 당시 시위대가 행진하던 길을 따라간다. 마리오아울렛을 오른편으로 돌아서자 고가도로가 보였다. 바로 수출의 다리. 이 다리는 1970년에 개통됐다. 구로공단에서 제조된 제품이 이 고가차도를 넘어 수출길에 올랐다. 가산디지털단지에서 경부선 선로를 넘나들 수 있는 유일한 왕복 4차로 교량이다.

1964년 우리나라 제1호 수출국가산업단지가 이곳에 조성됐다. 당시 우리나라 수출은 1억 달러에 불과했다. 1971년에 10억 달러, 1977년에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이 수출품이 이 다리를 지나 전 세계로 나갔다. 1980년에는 구로공단에는 2,000여 개의 공장이 있었다. 공단에서 17만 명의 노동자가 일했다. 절반 이상인 여성 근로자, 일명 공순이였다. 우리의 순이였다. 권력자와 회사 사용자 측에서 수출 역군’, ‘산업의 전사라고 치켜세운 순이의 피와 땀이 수출의 다리를 지나 해외로 싼값에 팔려나간 셈이다. 수출의 다리가 구로동맹 파업의 현장과 이어진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구로공단 모습이  남아 있는 건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구로공단 모습이 남아 있는 건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마리오아울렛 건너편에 의류 상가로 변신한 만승아울렛이 있다. 예전 구로협동조합의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국내 최초의 아파트형 공장이다. 만승아울렛과 같은 구로공단의 역사는 곳곳에 남아있다. 양지사와 교학사도 아파트형 공장 사이에 옛 모습을 감추고 있다.

이 큰길은 디지털단지 오거리(엣 가리봉오거리)로 이어진다. 여기가 시위대의 목적지였다. 이 길은 허름한 상가로 이어졌다.

40여 년 전의 모습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 젊은 여성의 쉼터였던 나포리 음악다방나포리 커피숍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구로디지털단지로 이어지는 가리봉 고개를 넘어간다. 가리봉 깔딱고개다. 이 가파른 언덕에 순이닭장집’, ‘벌집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고향의 부모 형제를 위해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가는 고개였다. 그래서 1980년대 서울 어디보다 활기찬 젊음의 거리였다. 젊음이 축제였고 낭만이던 거리였다. 이 거리가 패션의 메카가 된 이유이다.

박영진.김종수 거리’ 슬픔의 거리가 된 까닭

현재 구로공단 서울 디지털단지. 사진=구로구청 제공
현재 구로공단 서울 디지털단지. 사진=구로구청 제공

디지털단지 오거리에 다다르면 또 다른 슬픔이 기다리고 있다. 이 거리의 다른 이름이 그 사연을 짐작게 한다. ‘박영진·김종수거리. 몸을 불태워 노조 탄압에 항거한 두 명의 노동운동가 이름을 딴 거리명이다. 노동단체가 노동운동의 역사와 당시 노동자의 삶과 인권을 되돌아보자는 취지에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가리봉 고개를 넘어 길(디지털로)을 따라 내려오니 G밸리(서울디지털단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초고층 건물이 연병장에 줄 서 있는 듯하다. 둘러보니 밸리’, ‘플라자’, ‘타워등 비즈니스용 건물이 즐비하다.

지난 2000년 구로공단에서 서울디지털단지로 이름을 바꾸고 정부 주도 아래 정보통신산업(ICT) 중심의 벤처타운으로 변신을 시도,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한참을 걸어 내려오면 디지털1단지 사거리에 대륭포스트타워1차 빌딩이 있다. 이곳이 바로 미국 마텔사에 바비인형, 인형 옷을 수출하던 대협이 있던 자리다. 한때 대협에는 3,000여 명의 근로자가 있었다고 한다.

옛 동남전기 소설가 신경숙 공장노동자 일한 곳

옛 써니전자 자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옛 써니전자 자리.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여기서부터 또 오르막길이다. 이마트를 지나서 구로디지털역을 향해 가다가 보면 옛 싸니전기(코오롱싸이언스밸리), 옛 삼경복장(코오롱빌란트 1), 옛 동남전기(에이스케트노타원 2) 등 각 터마다 노동운동의 역사와 여성 노동자의 아픔이 담겨 있다. 특히 동남전기는 소설가 신경숙이 공장노동자로 일한 곳이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