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금천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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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 | 김정아 기자] 문화유산과 역사 유적지를 중심으로 관광 코스가 잘 구비되어 있는 금천구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역사문화길은 호암산과 시흥동으로 나눠 그 흔적을 따라가 볼 수 있는 산책로가 잘 구비돼 있었다. 이번 시간에는 역사문화길 중에서 동헌관아자리, 시흥향교터, 흥선대원군 별장 터 등 역사적 자취가 남아 있는 나머지 명소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져보겠다.

동헌관아자리

시흥동 831번지 일대 금천현(시흥현) 동헌 관아가 있던 곳으로서, 현령들이 거주하였고 주변에는 동헌의 말들이 있었다하여 ‘마방(馬房)자리’ 아전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다하여 ‘아전(衙前)골목’, 동헌의 육방 중 하나인 병방이 있어 병사들이 주둔했다 하여 ‘병사(兵士)터’, 현령들의 송덕을 기리는 비가 있었다 하여 ‘비석(碑石)거리’ 라고 현재도 불리고 있는 곳이다.

시흥향교터

향교는 지방에 있던 문묘(文廟)와 거기에 부속되어 있던 옛날의 학교를 가리키며,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지방에 설치된 일종의 교육기관이다. 향교에는 공자를 제사하는 문선왕묘(文宣王廟)를 중심으로 하고, 강당으로 명륜당을 설치하였다. ‘시흥군읍지’에 따르면 시흥향교에는 성전(聖殿) 6칸과 명륜당 6칸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흥향교는 1944년까지 존속하다가 과천향교에 통합되면서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흥선대원군 별장 터

도로명 탑골로3길 50에는 흥선대원군이 지은 별장이 있었다. 이 별장은 136평의 건물로 구조상으로 별장이기보다는 살림채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 이 곳은 한 개의 사랑채와 두 개의 안채로 구성되어 서울 대가(大家)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가옥이었다. 정계에서 물러난 흥선대원군이 호암산 한우물 아래에 위치한 이 곳 별장에서 노년을 보냈다고 한다. 후에 이 곳은 고 정주영의 소유로 되었다가, 지금은 철거되고 현대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말미고개

말미고개는 시흥대로 중 독산동 롯데캐슬골드파크아파트부터 말미사거리에 이르는 고개를 가리킨다. 이 고개는 산꼭대기에서 내려온 지세가 말의 모습과 비슷해서 처음에는 ‘말뫼(馬山)’라 하였는데 말(馬)과 말(斗)의 발음이 같은데서 말뫼가 말미로 전음되었고 그 뜻도 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치러가던 선비들이 이곳에 와서 쉬면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고 한다. 시흥대로 50m의 폭을 넓히고 고개를 깎는 공사를 벌일 때 많은 말 뼈가 나왔다고 전한다. 2008년 구민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말미’로 바뀌었다.

비석거리

시흥5동의 수령 800년 이상 된 은행나무가 서 있는 부근(시흥동 1000~124일대)을 비석거리라고 불러왔다. 그 이유는 시흥현령 선정비 4기가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더 많은 선정비가 있었으나 수해로 없어지고 인위적으로 파손되어 현재는 4기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현령(종5품) 김병이, 이장혁, 조용구, 방천용의 선정을 칭찬한 비석이다. 선정비는 떠난 분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우는 관례로 보아 김병이 현령의 선정비는 1878년, 이장혁 선정비는 1879년경, 조용구 선정비는 1884년경, 방천용 선정비는 1892년경에 각각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반유구화역 터

역원이란 역참(驛站)과 원(院)을 함께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금천의 역원으로는 반유구화역이 있었다. 반유구화역은 독산고개에 있었으며 이곳의 마을명이 반시인데 반시는 반수의 변음이다. 반수는 마치 마을 모습이 대야에 담아놓은 물처럼 고요하여 조용한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졌다. 역참은 국가의 공문서의 전달, 변경의 중요한 군사정보, 사신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등을 위하여 마련된 역마를 이용한 교통·통신기관의 하나이다. 역이 있는 곳에는 원(院)이 있었는데 원(院)은 공무여행자에게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여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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