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춘분이다. 비가 내린다. 봄을 재촉하는 것인가. 비가 반갑다. 지하철 1호선 구로역에 내렸다. 역사 2층 유리창으로 구로 기계공구상가가 보인다. 마치 양옥집은 수십 채 이어놓은 듯한 모양이다.

구로기계공구상가 D블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구로기계공구상가 D블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청계천, 영등포 등에 산재해 있던 공구상가 한 곳으로
G박물관, 서울시가 설립한 국내 최초의 산업박물관

필자가 본 상가동은 D블록이었다. 주로 철강과 비철 제품을 취급하는 공구점이다. 구로역 건너편에 있는 공구상가 D블록으로 갔다. 거대한 상가동에 7~8평 규모의 가게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창고인지, 점포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그만큼 상품이 많이 쌓여 있다. 그 용도를 알 수 없다. 눈에 익은 공구 제품은 가게 앞에는 전시된 듯했다. 하지만 전시품은 겨울비에 몸을 숨기듯 비닐을 덮고 있다.

공구상가 D블록...7~8평 철강.비철 제품 전시

상가 거리는 축축했다. 칙칙한 비닐이 널려 있는 상가는 외관상 볼품없다. 간판은 정비 사업을 한 듯하다. 획일적 형태의 간판이다. 태광로프, 주원산업기계, 가나공구, 계양종합공구, 호수백화점, 효성 하이제 모터, 삼양베아링……. 너무 촘촘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를 지경이다. 상가의 거리와 간판은 도시의 얼굴이다. 도시의 실체를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다. 빽빽한 간판이 바로 구로 기계공구상가의 정체성을 압축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 산업발전의 초석을 다진 구로 기계공구상가다.

구로 기계공상가는 A~D 4개 블록 35개 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구로역 4거리 세 모퉁이에 흩어져 있다. 각 동은 업종별·품종별로 전문화되어 있다. A블록(1~8)은 공작기계·중기 부품·기계 공구를 주로 취급한다. B블록(9~15)은 전기 자재와 부품 공구 전문점이다. C블록은 기계 공구, D블록은 철강 및 비철 전문공구점이 밀집해 있다. 그 규모나 내용을 보면 깜놀이다. 76,0002,000여 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한 업체당 5~6명이 근무한다. 취급 품목은 55,000여 개다. 없는 게 없다는 얘기다. ‘만물공구상’, ‘공구백화점으로 불리는 이유다. 망치, 드라이버, 볼트와 너트 같이 가정용 수공구부터 원자재는 물론 용접로봇과 마이크로미터기 같은 고정밀 공구에 이르기까지 공구라는 말이 붙은 제품이면 모든 게 있다. 특히 고정밀 공구는 자동차, 시계, 항공기와 선박의 부품을 조립하는데 필요한 공구다.

필자는 원조 기계치. 공구 다루는 일을 두려워한다. 막상 그런 공구가 눈앞에 있으니 신기했다. 자꾸 카메라에 손이 간다. 한 상점의 주인인 듯한 분이 시비조로 말을 걸어왔다. ‘뭘 자꾸 찍느냐는 것이었다. “그냥이라고 얼버무리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말을 걸어온 상인과 얘기를 나누어 보기로 했다. 상황 설명하자 그는 사실 볼품 없어 보이지만 이 디스플레이도 많은 연구와 돈을 들여서 한 것이라고 말했다. 거친 말투가 미안했는지 들어와서 구경이라도 하고 가라고 권했다. 불청객 처지에서 바쁜 일손을 붙잡을 수 없었다. 이것저것 둘러봤다. 플라이어, 스패너, 렌치, 드릴 등이 수없이 많은 제품이 일목요연하게 정돈되어 있다. 한눈에 봐도 값싸고 좋아 보인다. 견물생심인가. 보이는 것, 모두 갖고 싶다. 그중에서도 공구 가방에 욕심이 났다.

들어와서 구경이라도 하고 가라는 공구상 주인

구로공구상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구로공구상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상가 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상가 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상점으로 들어 온 김에 상거래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 비가 오는 탓일까. 상점을 방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상점의 식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손님이 없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산업용품을 취급하기 때문이었다. 상점을 나서려는데 트럭 한 대가 상가 앞에 섰다. 트럭에 짐을 옮기는 점원의 옷은 허름하다. 기름이 묻어 있다. 평범한 점퍼 차림의 필자조차 귀티가 나는 듯하다. ‘서울에 이런 곳이?’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D블록을 마주하고 오른편에 있는 흰색 건물의 간판이 눈에 띄었다. ‘구로 기계공구상가 산업단지 조합건물이다. 요즘에야 상가 조합이 흔하다. 아파트 상가도 조합을 구성한다. 하지만 이곳 산업단지 조합은 탄생부터 드라마틱하다.

구로 기계공구상가는 도심 부적격시설의 외곽 이전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다. 청계천, 영등포 등에 산재해 있던 공구상가가 이곳으로 이전했다. 1980년부터다. 당시는 중화학공업의 중흥기였다. 공구상가도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돈을 벌어 남에게 주는 꼴이었다. 당시 점포 월세가 점원 임금의 세 배나 됐다. 임대료에 부담을 느낀 상인이 모여 내 점포 갖기 운동을 시작했다. 집 없는 설움을 떨치기 위해서 만든 게 협동조합이다. 40년 동안 바뀐 세상만큼 많은 조합원이 떠나고 새로 들어왔다. 하지만 아직 공구상가가 한국 산업의 중심으로 건재할 수 있는데 협동조합이 든든히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구로 기계공구상가를 떠나면서 문뜩 이 세상에 공구가 없었다면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나라가 급속히 발전할 수 있던 근원은 제조업이기 때문이 아닐까. ‘기계공구의 메카없는 제조업의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구로공단의 역사를 기념 G밸리박문관

G벨리산업박물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G벨리산업박물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내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다시 G밸리산업박물관(MUSEUM G)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다. 누군가 인간을 동물과 구분했다. ‘호모 하빌리스라고. 인간은 동물과 달리 도구를 사용한다는 의미다. 그만이 아니다. ‘호모 비아토르라는 말도 있다. ‘여행하는 인간이다. 노자도 말했다. “길은 길이지만 늘 같은 길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실은 오늘(6) 가는 길은 어제 간 길이다.

이상하다. 어제 보지 못한 게 보인다. 지름길로 간다고 서두르면서 무심하게 지난 벌집촌이 보이다. 70~80년쯤에 봤을 법한 풍경들이 들어온다. 찌그러져 가는 여인숙, ‘다방이라는 이름, 당시의 고급 여관이 보인다. G밸리의 뒷골목, 그러니깐 가리봉동은 아직 산업화 이전의 풍경이 곳곳에 남아 있다. , 그렇다 역사와 스토리가 녹아 있는 길을 필자가 지금 걷고 있는 것이다.

G밸리산업박물관(MUSEUM G)은 어떻게 산업화의 역사를 녹였을까. 1960년대 구로공단부터 21세기 G밸리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넘는 구로공단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시가 설립한 국내 최초의 산업박물관이다. 궁금증이 몰려온다.

6일 점심시간 무렵이다. G타워에서 수많은 청년이 쏟아져 나왔다. 역주행은 필자뿐인 듯했다. 박물관 자동문이 열렸다. 자동으로 불이 커졌다. 제일 먼저 관람객을 맞은 것은 디지털 영상실이었다. ‘1968년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전시실이었다. G밸리의 시작이자 구로공단으로 불리는 한국 수출산업공단이 만들어진 다음 해 열린 한국무역박람회를 디지털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더 볼만한 것이 있다. ‘G밸리 연대기’, ‘G밸리 디지털 수장고’, ‘미디어 라이브러리이다. 산업 유산을 3D 이미지로 재현하고 있었다. 특히 여공이 거주했던 생활 공간인 벌집’, 최초의 민주노동운동인 구로동맹파업 등을 생생하게 구현하고 있다. 그 속에는 관련 사진은 물론 공단 근로자의 구술, 행정문서도 담고 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람객이 없는 박물관의 존재 이유

G밸리산업박물관 전시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G밸리산업박물관 전시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 않았다. 필자가 박물관을 둘러보는 1시간여 동안 누구도 박물관에 들어온 사람이 없었다. 지난번 가산 유물발굴전시관에서도 그랬다. 관람객이 없는 박물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언젠가 일본 오사카 기업가 박물관을 찾았던 기억이 났다.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오사카 출신 기업가 105명의 업적과 삶을 소개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기업가 사진과 업적 설명, 그리고 발명품을 소개가 전부다. 이 박물관은 한국처럼 최고 현대식 건물에 있는 게 아니다. 쭈그러지는 건물 지하에 있다. G밸리산업박물관처럼 디지털 영상도 없다. 필자가 방문한 날 한국에서 온 대학생이 단체관람했다. 일본까지 가서 보는 박물관과 한국에 있어도 찾지 않는 박물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꼼꼼히 생각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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