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일 다시 목동을 찾았다. 용왕산으로 가는 길이다. 용왕산은 목동신시가지와 조금 떨어져 있다. 산 밑이어서 그런가. 소규모 아파트단지와 단독주택 그리고 다세대주택이 혼재되어 있다. 빌라촌 사이의 오밀조밀한 길을 올랐다. 하늘의 속살이 더 가깝게 보인다. 산바람이 싱그럽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날아다닌다. 감상도 잠시였다. 바라볼 곳 없어졌다. 정작 산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것은 아파트단지였다. 그렇다. 한때 산꼭대기에도 아파트를 지었다. 잘 보이는 곳에 아파트를 짓는 게 유행이었다. 아마도 198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도 그랬던 모양이다.

용왕산 등산 안내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용왕산 등산 안내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용왕산 등산로.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용왕산 등산로.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도심 속 힐링 장소에 서울 야경이 예쁘기로 유명 명소
- 본각사 소재 보물 1147호인 묘법연화경 행방 묘연

용왕산은 말 그대로 동네 뒷산이다. 해발 약 80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산이다. 하지만 도심 속 힐링 장소로 유명하다. 특히 곳곳에 들머리가 있어 접근하기 쉽다. 특히 야경이 예쁘기로 소문났단다. 밤이 아닌 데도 꽤 많은 사람이 보였다. 천천히 산책을 즐기는 모습이 여유롭다.

떠오르는 달 가장먼저 볼 수 있는 동네

용왕산.’ 이름이 심상치 않다. 용왕은 물의 지배자다. 강과 하천, 호수, 바다를 다스린다. 호풍환우(呼風喚雨)를 관장한다. 용왕산은 목2동에 있다. 2동의 옛 이름은 달거리 마을, 즉 월촌(月村)이었다. 용왕산에서 떠오르는 달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동네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달거리 마을은 바로 천호지벌(千戶之伐)로 불리던 곳이다. 수많은 사람이 들어와 살 만한 넓은 뜰이라는 뜻이다. 이들을 지키기 위해 용왕님이 사신 것일까. 어떻든 이 자그마한 뒷동산에 신()의 이름이 붙은 사연은 무엇일까.

용왕산 공원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용왕산 공원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공원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공원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용왕산 근린공원 입구의 계단을 올랐다. 나무 계단의 옆으로는 조릿대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아니, 벌써!’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성하다. 용왕산 숲이 좋은 길이 나왔다. 이 길은 2016년 서울시 테마 산책길로 선정됐다. 연장 길이는 2.6km. 경사가 완만한 흙길이었다. 맨발로 걷기 좋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신발을 벗고 산책하는 사람이 보였다. ‘용왕산 숲이 좋은 길은 둘레길이 아니었다. 능선을 따라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재미있는 게 있다. 흙길 밑으로 나무데크 길이 나 있다. 같은 방향으로 두 개의 길이 있는 셈이다. 아마 둘레길효과를 내기 위해서 두 개의 길을 닦아 놓은 게 아닐까?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이름 모를 수많은 봄꽃이 망울을 맺고 있다. 산수유의 노란 꽃은 꽃봉오리가 터진다. 풀숲도 낙엽을 뚫고 나와 활개를 치고 있다. 옅은 회색의 물까치는 커다란 소나무 속에서 이리저리 휘저으며 합창하고 있다. 직박구리는 낙엽에 붙은 벌레 사냥하는지 연신 고개 방아를 찧고 있다. 완연한 봄날의 풍경이다. 필자도 활기가 넘친다. 웃음도 난다.

용왕산 봄의 전령사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용왕산 봄의 전령사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봄의 전령사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봄의 전령사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물까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물까치.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엄지손가락 닮아 옛 이름 엄지산

길을 걷는 데 곳곳에 용왕산의 내력을 적은 안내판이 보였다. 용왕산은 옛 이름은 엄지산(嚴知山)이었다. 마치 산의 모양이 엄지손가락을 닮아 그렇게 불렀단다. 언제부터 용왕산으로 바뀐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떻든 안내설명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왕이 꿈을 꿨다. 누군가 자신을 해치는 악몽이었다. 왕은 엄지산 아랫마을에 사는 박 씨 노인을 의심했다. 그는 영험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가 죽은 뒤 용으로 변해서 왕이 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용을 화살로 쏴 죽였다.” 그런데 뭔가 어설프다. 노인을 죽였는데 용으로 변한 것인지, 실제로 노인이 용이었는지, 아니면 노인을 용으로 잘못 안 것이지 분명하지 않다.

구성이 어설픈 전설이다. 어떻든 용과 왕에 얽힌 전설 때문에 용왕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름 때문일까. 특별히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름만으로 용의 기운을 받은 것 같다.

최고 명소는 산 정상 위치한 용왕정

용왕정.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용왕정.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용왕정에서 본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용왕정에서 본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용왕정에서 본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용왕정에서 본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용왕산의 최고 명소는 산 정상에 있는 용왕정이다. 용왕정으로 가는 길에 용왕산 공원이 있다. 인조 잔디 구장, 테니스장, 반려견 운동장, 그리고 각종 운동기구가 있다. 불과 산 정상을 수 십m 앞두고 이렇게 넓은 운동장이 있다는 게 예사롭지 않다. 운동장 밑에는 배수지가 있다. 양천·강서구민에게 공급되는 수돗물 저장시설이다. 원래의 배수지를 지하로 묻고 그 위에 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곳곳에 매설된 관로 표식이 있었던 이유다.

용왕산 공원에서 용왕정은 멀지 않았다. 용왕정에 다다랐다. 서울 정도 600(1394~1994)을 기념하여 1994년에 지어진 팔각형 정자다. 용왕정 정상은 예로부터 유명했던 조망명소다. 우아한 팔작지붕의 선이 맵시가 넘친다. 정자에 올랐다. 바람과 햇빛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한강을 내려 다 봤다. 월드컵 대교와 월드컵 경기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까이는 주택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초고층 건물은 스카이라인으로 이어져 있다. 저 멀리 북한산의 실루엣이 또렷하다. 정자에서 보는 서울의 풍치는 아름답다. 용왕정은 남산공원 팔각정, 응봉산, 용마산, 매봉산 등과 함께 서울의 해돋이 명소로 꼽히는 이유를 알겠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큰 소나무 잎새가 전망을 일부 가리는 거였다. 파노라마로 풍광을 즐길 수 없다. 용왕정 주변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꾸며져 있다. 감나무, 살구나무 등 과실수가 있는 게 특징이다.

용왕정에서 달거리 약수터가 있는 본각사로 내려갔다. 용왕정에서 달거리 마을 방향으로 500m 정도 가자 본각사 지붕이 보였다. 본각사는 언제 창건됐는지 분명하지 않다. 조선 초기로 짐작할 뿐이다. 이곳에는 달거리 약수터가 있다. 본각사에는 작은 폭포가 있다, 달거리 약수터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달거리 약수터 근처에는 소금 창고(鹽倉)가 있었다. 이곳의 노동자에게 달거리 약수는 큰 인기가 있었다.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곳에 누군가 암자를 지어 기도를 올렸다. 지방에서 올라온 상인과 소금 창고 노동자에게 공양을 제공했다. 그것이 염찰 암자에서 용왕사, 영전사로 이어져 오다가 본각사로 이름을 바뀌었다고 한다.

 

과거 용왕산 일대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과거 용왕산 일대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용왕산 일대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용왕산 일대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작은 폭포 달거리 약수터...인기

필자가 본각사에 도착했을 때 북소리와 스님의 염불 소리가 절 밖까지 들렸다. 스님 주제로 기원을 올리는 듯했다. 염치 불고하고 대웅보전의 문을 열고 사진을 찍었다. 앞마당에는 7층 석탑도 있다. 이 석탑도 그 역사와 연원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넓은 주차장에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이렇게 크고 역사가 깊은 절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마당으로 내려왔다. 한쪽에 용왕산 본각사 보존을 위한 한 말씀이라고 쓰인 커다란 칠판이 걸려 있었다. 칠판에는 본각사를 신도들 품으로’, ‘본각사는 상운스님 절, 상운스님은 우리가 지킨다라는 등 본각사 이전(?) 혹은 철거(?)를 반대하는 글이 빼곡히 적혀 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대웅본전 밖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다. 네이버 검색을 했다. 본각사를 둘러싸고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주지가 가져간 보물 묘법연화경소재는?

 

묘법연화경.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이미지 갈무리
묘법연화경.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이미지 갈무리

서울시의 용왕산 본각사 수용으로 사찰 존치 등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본각사 소재의 보물 1147호인 묘법연화경이 행방이 묘연해진 것이다. 서울시가 본각사 부지를 도시공원으로 편입하면서 사찰 주인인 대각문화원에 보상비를 지급했다.

그런데 당시 주지가 묘법연화경을 갖고 사찰을 떠났다고 한다. 대각문화원과 주지와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문제는 아직 묘법연화경 소재를 파악도 못 하고 있다고 한다. 묘법연화경은 성종 원년(1470) 정희 대왕대비의 발원으로 판각한 왕실 판본 화엄경이다. 판각의 솜씨와 인출의 상태가 당대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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