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독일 월드컵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전국민들은 또한번의 ‘신화창조’를 기대하면서 눈과 귀를 독일쪽으로 열어놓고 있다.G조에 속해있는 우리나라는 아트사커로 세계 최강의 자리를 넘보고 있는 프랑스, 압박축구의 대명사인 스위스와 상대해야 한다.물론 토고도 만만하지 않지만 16강 진출을 위해서는 유럽축구를 넘어야 한다. 따라서 본지는 유럽축구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축구전문 칼럼니스트인 서형욱씨의 <유럽축구기행·살림출판사>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하이버리에 관한 추억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아무래도 2004년 9월에 열린 챔피언스리그 경기일 것이다. 이날 아스날은 두 명의 한국 선수가 포함된 PSV아인트호벤을 상대로 2004~2005 시즌의 첫 번째 경기를 치렀다. 두 팀이 한 조에 편성된 이후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기도 했다.

아인트호벤과 ‘한판승부’

조 편성이 진행되던 날, 나는 리버풀 대학교 도서관 컴퓨터실에서 학교 친구 옐레와 함께 인터넷으로 추첨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PSV아인트호벤의 열성 서포터인 옐레는 PSV아인트호벤이 영국 팀과 맞붙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네덜란드에서 날아온 그는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영국에서 멋진 승리를 거두는 장면을 직접 지켜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상대가 막상 아스날로 결정되자 낯빛이 어두워진다. 왜 하필 가장 센 팀과 한 조가 되었냐는 것이 그의 푸념이다. 하지만 나는 한국 선수들이 세계 최고의 클럽대항전으로 꼽히는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영국 최강팀을 상대로 활약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분되었다.

반응은 달랐지만, 어쨌든 우리는 결과에 대한 기대없이 아스날-PSV아인트호벤 경기의 킥오프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마침내 경기일. 내심 한국 선수들이 결승골을 터뜨리는 장면을 기대하면서 런던행 기차에 올랐다. 일찌감치 런던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하이버리 스타디움에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이슬링턴 역에 내린 것이 실수였다. 아스날 역에 내리면 금세 경기장에 닿지만 우연찮게 엉뚱한 역에 내리고 나니 경기장 가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없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경기장을 찾아가다보니 아스날의 새로운 경기장 건설현장이 눈에 띈다.

아직 철골을 훤히 드러낸 경기장은 완공일까지 여유가 있어서인지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였다. 경기장을 둘러싼 안전벽에 지역 어린이들이 크레파스와 물감으로 그려넣은 ‘미래의 아스날’ 상상도가 걸려있어 눈길을 끈다. 이 경기장이 완공되면 아스날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이어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홈구장을 갖게 된다. 두 배 가량 늘어나는 관중석은 아스날이 더 이상 만성적자에 허덕이지 않도록 도울 것이다. 경기 시작은 아직 두 시간도 넘게 남았지만 경기장으로 가는 길은 벌써부터 소란스럽다.

온갖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은 벌써부터 길가를 점거했고 네덜란드에서 날아온 PSV아인트호벤 팬들은 끼리끼리 모여 응원가를 외치는 중이다. 평일 오후인데 어떻게 저 많은 인원들이 해외까지 따라나올 수 있는 걸까. 다들 실업자 아니면 학생인 것일까. 옐레는 내 질문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반응이다. 그의 말인즉슨 한 달에 한두 번 쯤은 원하는 날에 휴가를 낼 수 있다는 거다. 응원하는 팀이 평일 원정을 떠나면 휴가를 내고 팀의 뒤를 좇아 응원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평일경기에도 ‘구름관중’

경기장의 열기는 여느 때보다 뜨겁다. 이번 시즌에는 아스날이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우승할 수 있다며 관중 모두 당당하고 힘찬 목소리로 응원가를 불러댔다. 네덜란드 리그에서 준우승에 머문 팀 정도는 쉽게 눌러 이길 수 있다는 자신만만함이 묻어나는 분위기다.그도 그럴 것이 사실 원정팀 PSV아인트호벤의 전력은 불안정해 보였다. 여름 이적 시장이 열리자마자 팀의 주전 공격수 세 명을 모두 다른 팀으로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의 득점 기계’인 마테야 케즈만과 ‘네덜란드의 신성’ 아리엔 로벤(이상 첼시), ‘덴마크산 날개’ 데니스 롬메달(찰튼 애슬래틱)이 동시에 팀을 떠난 것은 PSV아인트호벤 입장에서 쉽게 메울 수 없는 손실이다.

아스날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예상에 무게가 실리고 있었다.하지만 경기는 역시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 뜻밖의 탄탄한 조직력으로 아스날을 압박한 PSV아인트호벤은 전 선수가 고른 활약을 펼치며 홈팀을 괴롭혔다. 한국 선수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이날 왼쪽 수비수로 출전한 이영표는 상대팀 오른쪽 미드필더로 나선 프랑스 국가대표 로베르 피레스를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오른쪽 공격을 담당한 박지성 역시 영국 최고의 팀을 상대로 모자람 없는 경기를 펼쳤다. 유럽 리그에서 한국 선수가 1진으로 뛴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몇 년 전에 비하면 축구팬 입장에서는 상당히 감격할 만한 일이다.

박지성 이영표에게도 ‘환호’

하지만 경기는 결국 예상대로 아스날의 승리로 끝났다. 경기가 끝난 뒤에 만난 두 선수는 그저 이날의 패배(0-1)를 아쉬워할 뿐 별다른 감흥을 드러내지 않는다. 수많은 명문팀들과 경험을 쌓은 월드컵 4강 멤버들에게 더 이상 신비스런 상대는 없다. 영국 축구 사상 가장 빼어난 성적을 거두고 있던 아스날도 이들에게는 단지 또 하나의 상대팀이었을 뿐이다. 경기가 끝난 뒤 PSV아인트호벤의 구단 버스 주변에는 많은 동양인들이 몰려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경기장 건물을 빠져나와 버스에 오르는 선수들에게 플래시 세례를 퍼부었고 몇몇은 사인과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가장 많이 불려진 이름은 박지성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달려드는 팬들에게 그는 쑥스럽지만 익숙한 포즈로 사인을 선사했고 때로는 함께 사진을 찍어주는 여유도 보여줬다. 아쉬운 것은 한국 팬들은 우리 일행을 제외하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신 일본인들이 박지성과 이영표, 히딩크 감독을 둘러싸고 환호를 보냈다. 특히 J리그를 거쳐 네덜란드에 진출한 박지성에게 일본팬들이 보이는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뜨거웠는데 이것은 일본 기자들이 아스날 감독 아슨 벵거가 J리그 감독을 맡았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감독’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선수를 외국 팬들에게 빼앗긴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인다.

포츠머스 ‘응원의 전사들’

아스날과 포츠머스의 경기는 애초부터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았다. FA컵 8강전이었고, 모처럼의 공중파 중계였지만 결과가 충분히 예상되는 경기였기 때문이다. 강호 아스날이 홈팀 포츠머스를 꺾는 것은 경기 전부터 모두가 예견했던 결과였다.그러나 골이 터지면 터질수록 경기는 매력적으로 변해갔다. 예상대로 득점포를 계속 작렬한 것은 원정팀 아스날 선수들이었고 점수차는 5-0까지 벌어졌지만, 경기장의 분위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홈팀 포츠머스 선수들은 그렇게 많은 골을 내준 뒤에도 여전히 용감하고 또 여전히 의욕적이었다.

오히려 다섯 골이나 앞선 원정팀 아스날 선수들이 낯선 분위기에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유는 역시 팬들이었다. 홈에서 ‘영국 최고의 팀’을 맞아 수없이 얻어터지는 와중에도, 골을 내주면 내줄수록 팬들의 목소리는 높아만 간다. 어찌보면 수치스러울 수 있는 홈경기 스코어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선수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노래, 쉴새없는 함성 그리고 선수들의 작은 동작 하나하나에 맞춰 터져나오는 탄성에 이르기까지. 어느새 경기의 스포트라이트는 그라운드 위를 벗어나 객석으로 옮겨지고 있다.

저들의 열정적인 응원에 포츠머스 선수들은 순식간에 멈출 줄 모르는 전사들로 변신하고 있었다. 분명, 승부는 이미 갈려버려 몸을 날릴 필요 없는, 아니 어쩌면 다음 경기를 위해 체력을 비축해둬야 할 그들이었지만 한 골만 터뜨리면 월드컵 본선에 오르기라도 하는 양 모든 선수들의 동작은 ‘최선’이라는 단어를 절로 떠오르게 만든다.마침내 후반 종료 직전에 터진 포츠머스의 첫 골. 이제 고작 첫 골을 넣어 1-5로 승부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겠거늘, 모든 관중들은 기립박수로 선수들을 치하하고 있다.

선수들 역시 이 한 골로 팬들의 성원에 보답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듯 팬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며 박수를 돌려준다. 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당장의 승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저 선수들, 분명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들에게 승리는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는 수단일 뿐이다. 첫 번째 수단이 어렵다면 최선을 다해 팬들의 작은 바람이라도 이뤄주는 것이 또 다른 보답일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서포터즈들 매너 ‘깔끔’

경기가 끝난 뒤에도 대부분의 관중들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최선을 다한 그들의 선수가 모두 그라운드를 떠날 때까지 박수와 환호로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누가 감히 저들에게 충성하지 않으랴.승자인 아스날 선수들도 경기장을 떠나는 내내 홈팬들의 놀라운 응원에 경의를 표한다. 포츠머스 팬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앙리와 비에이라, 카누의 모습이 차례로 화면에 잡힌다. 이 아름다운 장면을 잡아낼 줄 아는 카메라맨에게도 경의를!경기 후 인터뷰에서 앙리는 말한다. “3-0, 4-0, 5-0……스코어는 계속 벌어지지만 팬들의 노랫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이토록 놀라운 광경을 어디서 또 볼 수 있겠는가. 오늘의 영웅은 (2골을 터뜨린) 내가 아니라 저들이다.”결코 명문이라 부를 수 없는 프리미어리그 새내기 팀 포츠머스지만 오랜 시간 지역민들과 함께 해온 그들의 역사는 축구가 아름다운 이유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 셜록홈즈를 만들어낸 코난 도일과 「잉글리시 페이션트」로 아카데미상을 타낸 안소니 밍겔라와 같은 대중예술가들이 이 팀에 혼을 빼앗긴 것도 이처럼 축구의 참맛을 아는 팬들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문득, 축구팀 없는 도시에 살고 있는 내가 안쓰러워진다. 이 아름다운 축구의 한 풍경을 직접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분명 쓸쓸한 일이므로.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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