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팍한 시대...죽음과 신화, 복수와 용서를 고민하게 만들다

 

<일요서울 정우영 기자>

 

 

[일요서울 | 이창환 기자]  배우 정원중(52)과 김소희(42)가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정원중과 김소희는 피터 쉐퍼가 극본을 쓴 ‘고곤의 선물’에서 에드워드 담슨과 헬렌 담슨을 열연하고 있다. 고대 신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명품 대사와 격정적인 흐름으로 2시간30분을 채우는 ‘고곤(메두사)의 선물’은 많은 연기파 배우들이 한번쯤 꿈꾸는 공연이다.  정원중은 “한 번에 극본을 다 읽어 내려간 적은처음 이었고 전율감이 왔다. 제정신이 아니지 않고서야 이건 꼭 한다”는 말로 소감을 전했고, 김소희는 “용서와 복수,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아마데우스’, ‘에쿠우스’ 등으로 유명한 영국의 국민작가 피터 쉐퍼 역시 고곤의 선물을 자신의 최고작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오는 11일 공연의 막이 내리기 전에 두 배우를 인터뷰 했다.

 

 정원중, 50넘어도 그치지 않는 체력 비결은 ‘술’... 김소희, 건강만큼은 ‘철의 여인’

 

2월 29일 오후 5시 정원중, 김소희 두 배우를 만나기 위해 명동예술극장을 찾았다. 미리 도착해 있던 두 배우는 무대 대기실과 텅 빈 무대를 거니는 중이었다. 공연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는데, 표정에는 여유가 엿보였다. 공연을 불과 2시간 앞둔 시간이었으므로 인터뷰를 길게 끌지 않는 것이 배우들 입장에서 좋았다.  정원중은 “준비할 게 정말 많으니 인터뷰를 빨리 진행하자”고 말했다. 인터뷰 전 사진촬영을 할 때도 ‘작품을 대변하는 무거운 표정’을 요청했으나, “인터뷰 사진은 모름지기 웃는 얼굴이 제일”이라며 웃어 보이는 그였다.

프레스 리허설 때부터 환상호흡을 자랑했던 정원중과 김소희는 20일간 펼쳐지는 강행군의 운명을 ‘무대의 신’ 몫으로 돌렸다.  공연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의 체력을 고려하지만, 무대 위는 예측불가였다.  어떤 날에는 하루에 두 번 5시간을 공연하면서도 에너지가 남았고, 어떤 날에는 한 번의 공연으로 바닥까지 드러나는 게 두 배우가 생각하는 연극의 마력이었다.  배우를 지켜보는 객석 분위기도 마찬가지. 극의 평가, 웃음 포인트, 돌발 상황 모두 연기력과 무관한 힘이 작용됐다. 

오랜 경험으로 이를 터득한 두 배우는 공연에 대한 계산이나 계획 없이, 무대에 뛰어드는 것에만 집중한다고 전했다. 토론이 길어진다고 실전에서도 강하란 법은 없다. ‘배우는 연기로 보여주면 된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공연을 준비하는 자세까지 즉흥적인 것은 아니다. 정원중의 경우 유별난 ‘식곤증’과 컨디션 저하가 걱정돼 공연 4시간 전부터 음식 먹는 것을 자제했다. 김소희 또한 “2시간 전에는 먹어두지 않으면 연기 도중에 자꾸 속에서 올라오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연극마저도 ‘인스턴트’가 태반이죠"

고곤의 선물은 두 배우에게 혼을 불태우는 연기, 엄청난 양의 대사를 요구한다. 신화를 위해, 연극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부부의 일생을 과격하고, 또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높은 ‘난이도’ 때문에 뛰어난 배우가 아니면 캐스팅 물망에 오르지 못한다. 표출하고자 하는 감정이 대사 속에 묻히지 않도록 하는 것. 두 배우들이 염두하고 있는 과제다.

정원중이 분한 담슨과 김소희가 분한 헬렌은 신화를 연극에 투영하는 방식을 놓고 시종일관 대립한다. 담슨과 헬렌이 받아들이는 ‘그리스 로마신화’의 페르세우스, 아테나, 아가멤논과 17세기 영국의 정치가이자 군인인 올리버 크롬웰의 모습은 각기 다르다.

정원중은 영웅들의 비극적인 종말과, 피의 복수를 숭배하는 담슨에게서 ‘성장통’을 발견했다. 가난한 집안 출생, 아버지의 억압, 어머니의 큰 희생 모든 게 담슨이 남들과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불멸의 종교’ 연극을 통해 현실을 뛰어넘고자 하는 담슨의 집착은 무서울 정도다.

이에 고곤의 선물을 제작한 ‘극단 실험극장’은 과거에 없던 담슨의 면모가 정원중으로부터 나왔다고 평했다. 배우 정동환이 2009년 연기한 담슨의 경우 천재성이 두드러진 반면, 2012년 담슨은 현실과 싸우고 때로는 휩쓸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천재적이지 않는 인물이 ‘완벽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큰 희생과 결단이 뒤따른다. 때문에 정원중은 “담슨이 자신의 아들 필립 담슨을 부정하고 ‘원고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정원중은 결혼 17년차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식이 없다.

김소희 역시 “극단적인 사람들은 예술 자체를 생명처럼 여긴다”라는 생각을 덧붙였다.

 

 

“좋은 연극, 100번 봐도 안 질려”

김소희는 헬렌을 통해 고곤의 선물에 들어있는 ‘연극의 백미’를 능숙하게 전달했다. 극 중 헬렌은 무대 변화, 배우의 등·퇴장 없이도 과거와 현재, 신화와 현실을 오간다.  헬렌은 담슨과 열정적인 사랑을 나눴던 대학원생이었다가도 순식간에 필립 담슨과 대면하는 미망인이 된다. 여기서 관객들은 의식의 흐름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이런 전개는 배우의 연기력이 중요하다. 실감나는 연기만이 ‘일인 다역’, ‘시간의 정지’ 등의 판타지를 현실로 만들 수 있기 때문.

김소희는 이 같은 칭찬에 대해 “대본에 적혀있는 대로 연기했을 뿐”이라며 겸손함을 드러냈지만, 2012년 고곤의 선물에서 그녀는 매회 기립박수를 끌어낼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김소희의 연기는 충격적이었다. 한 번의 공연으로도 자신의 전부를 쏟는 듯했고 섬세한 디테일과 기술은 허구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안됐다.

김소희는 헬렌이라는 캐릭터를 파헤치면서 자기 자신의 모습과 주변의 모습을 돌아봤다. 그리고 이를 연기에 투영시켰다. 그 중 하나는 남편을 뒷받침 해주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국문과를 전공한 김소희는 살면서 연극인 혹은 작가 부부들을 적지 않게 접했다. 대부분은 생활고와 작품이 몰고 오는 갈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지만 아내의 내조가 남편을 깨우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 아내들은 자신의 재능을 외면하고 꿈을 접었다.

극 중 헬렌도 남편의 비상, 몰락을 경험하면서 동반자로서의 기쁨과 한계, 비극을 맛본다.

‘헬렌의 비극은 담슨을 남편으로 택할 때부터 예정된 운명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김소희는 “교수인 아버지와 불화도 없었는데 자신이 살던 안정적인 세계를 떠나지 않았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운명과는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다른 세계’를 동경해 자신의 청춘을 바쳤고, 그 열정에 대한 보답을 받았지만 크나큰 대가도 치렀다. 남편의 광기를 끝까지 인내하지 못해, 상처 받고 또 상처를 줬다”고 설명했다.

김소희는 담슨과 헬렌이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움켜쥐려했던 고곤의 선물이 무엇인가도 일러줬다. 물론 정해진 답은 없다.

김소희는 “담슨과 헬렌을 지배했던 고곤은 서로 달랐던 것 같다”면서 “치유와 살인으로 나눠질 수도 있고 복수와 용서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상대방의 가장 어두운 면, 지긋지긋한 면이 고곤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일요서울 정우영 기자>

정원중, 생애 처음 알몸 노출

두 배우는 결코 길지 않은 공연 기간 동안 많은 연극 팬들이 고곤의 선물을 보러 와주길 바랐다. 특히 연극의 가치를 알고 있거나 알고 싶은 이들에게는 ‘킬링타임’ 이상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정원중은 연극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그 어떤 타협도 거부한 담슨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발견하기도 했다.

정원중은 “배우 입장에서 이 정도 작품을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 수십 년 작품을 하면서 한동안은 별 만족을 느끼지 못한 채 다음 작품을 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완벽을 추구하려는 욕구는 항상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 점이 담슨과 나의 공통점이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끝으로 ‘극 중 담슨은 ‘이제 연극은 죽었다’고 외쳤지만, 대학로에는 '7000회 공연 50만 관객돌파' 연극 등이 늘고 있다라는 내용의 질문을 건넸다.

이에 정원중은 “솔직히 그것 들은 정말 인스턴트 식품 같다”면서, “한국에 연극의 부흥기, 전성기가 한 번이라도 있었나”며 회의감을 털어놓았다.

정원중은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 영화가 대세로 자리 잡으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연극계 수재들이 ‘충무로’, 방송국으로 넘어갔다. 두 곳을 먹여 살리는 수준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 연극계가 더 잘되길 소원한다”는 애정도 곁들였다.

hojj@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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