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현상으로 발현된 분노

한국대학생연합 소속 대학생들이 8월 12일 오후 국회 본청 앞에서 반값 등록금 실현을 요구하는 기습시위를 벌이고 있다. photo@ilyoseoul.co.kr

‘88만 원 세대’가 대한민국 정치 혁명의 중심에 서고 있다. 88만 원 세대로 대변되는 20대는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게 통설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사실은 정치권이 20대를 철저히 소외시켰다. 20대의 정치적 무관심이 아닌 정치의 20대 무관심인 것이다. 기성 정치권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20대들이 정치권에 광풍을 일으킨 ‘안철수 현상’을 만들어냈고 시민후보 ‘박원순’을 세웠다. 88만 원 세대들은 더 이상 기존 정치권이 자신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바라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를 위해 직접 뛰어들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 20대들은 정치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는 게 현실이다.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으로 대변되는 청년실업률은 6%대로 전체 실업률의 2배에 달했다. 20대는 최저임금도 못 받는 88만원 세대로 전락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20대들은 취업을 위해 토익, 학점, 어학연수 등 소위 스펙 쌓기에 열중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20대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기존 정치권은 자당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며 20대들로부터 염증을 느끼게 함으로써 정치 무관심을 불러왔다. 이런 연유로 정치권이 20대를 홀대하면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20대를 위한 실질적인 정책이 발휘하지 못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파동이 불러온 촛불시위와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 기존 정치판을 바꾸려는 도전에 나서고 있다. 그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사용하여 기존의 선거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정치판을 흔들었다. 이러한 20대의 정치참여는 지난 6·2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참패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결과는 스펙 세대로 폄하됐던 20대가 정치혁명의 아이콘으로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됐다. 정치권의 안철수 현상도 20대의 정치참여와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5년 전 깊어가는 양극화의 현실을 외면한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에 절망했던 ‘아픈 청춘’들은 이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더 큰 절망감을 표출하고 있다. ‘아픈 청춘’들과 가까운 세대인 ‘386 운동권 젊은피’들은 정치권에 진입해 ‘486 세대’가 되더니 어느덧 기득권에 안주해 정치투쟁에만 몰두했다. 그들은 오히려 다양한 전문가 집단의 진입을 막을 만큼 폐쇄적인 운동권 순혈주의에 동화됐다. 그들은 투표장에 나오지 않는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만 꾸짖을 뿐, ‘아픈 청춘’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철수 원장은 시대흐름을 잘 제현하고, 또 상징하고 있다. 그 자체로 성공모델이면서도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공유하는 삶,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진보냐 보수냐 하는 낡은 이분법을 거부하면서, ‘청춘콘서트’와 같은 형식을 통해 계속 대중과 커뮤니케이션해왔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존 보수 정치인들은 “(안철수의) 간이 배 밖으로 나오고 있다”(이회창) “강남좌파 안철수 파동은 결국 좌파 단일화 정치쇼로 막을 내렸다”(한나라당 논평) “철수가 나오면 영희도 나오겠네”(홍준표) “병 걸리셨어요?”(박근혜)라고 말하고 있다.

그나마 ‘여의도 정치’를 멀리해온 이명박 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고 발언한 것은 정확하게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청년ㆍ대학생단체 “재보선 적극 참여”

88만 원 세대들은 실제 10·26 재보궐선거에 적극 참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등 43개 청년·대학생 단체는 지난 19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청년과 대학생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적극 참여해 99%를 위한 서울을 만들자”고 촉구했다.

이들은 “이명박ㆍ오세훈 전시장이 재임한 지난 10년간 뉴타운 재개발로 1% 부자만 배불렀고 청년들은 고시원과 반지하, 옥탑방으로 내몰렸다”며 “1%만을 위한 서울시정의 최대 피해자는 청년층”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서울시는 특별시라는 이름처럼 대한민국의 축소판이자 현 시대 모순들의 확대판”이라며 “서울시의 40%가 넘는 2030세대가 적극 투표에 참여한다면 99% 서민과 청년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서울시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를 비롯한 온라인 공간에서 하루 10번, 오프라인에서 하루 10명에게 투표참여를 호소하고 투표일을 이틀 앞둔 24일 서울 전역 1천10곳에서 투표를 독려하는 1인 시위를 벌일 계획이다.

박희진 한국청년연대 공동대표는 “SNS 버튼달기 운동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프로필 사진을 (투표 독려) 로고가 들어간 사진으로 바꾸자는 운동”이라며 “24일 ‘1010 1인시위’와 관해서는 페이스북에 공동 페이지를 만들어 홍보하고 접수도 받고 당일 인증샷까지 올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SNS 통한 젊은층 투표참여

재보선에 나선 후보들은 이들의 투표참여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이들은 선거가 다가올수록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해 서로 투표참여를 독려하는 그들만의 문화를 갖고 있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지난 16일 기자간담회에서 “어느 후보가 다시 치고 오르느냐. 그 변곡점이 22일, 23일”이라며 상황을 가변적이라고 전망한 것도 젊은층의 투표참여를 염두에 둔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이런 와중에 검찰과 선관위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한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와 단속방침을 밝혔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과 SNS를 심의하는 전담팀까지 신설할 계획이다. 정부차원의 전방위적인 규제 움직임으로 읽혀지는 대목이다. 마치 2002년 대선에서 인기몰이를 했던 UCC(사용자 제작 컨텐츠)를 2007년에 대대적으로 단속했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이에 유권자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이미 사적인 소통도구로 광범위하게 자리 잡은 SNS를 낡은 선거법의 잣대로 단속하는 것은 과잉규제라는 지적이다.

언론의 사설이나 비방기사는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면서 개인의 일상적 의사소통 매개체인 SNS를 통제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조희정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과거의 법이 현재를 지나치게 억압하고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긴장도 늦추지 말아야 한다”며 “선거법보다 국민이 위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리한 규제에 따른 역풍 조짐도 일고 있다. 당장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선 두 후보 측의 상이한 반응도 이를 입증한다.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 측은 이번 규제에 대해 “원칙적 찬성”이라고 환영한 반면, 범야권단일후보인 무소속 박원순 후보 측은 “사실상의 관권 개입”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또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검찰의 SNS 단속을 피하는 몇 가지 팁’이라는 한 정치평론가의 글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이번 보궐선거에서 투표율이 중요할 텐데 SNS 규제 등은 막판에 20, 30대층의 투표참여와 결집을 유도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친이계 한 인사도 “지난 2009년 10·27재보선을 앞두고 방송인 김제동씨가 중도하차한 것이 젊은 표심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여권이) 선거 막판에 자충수를 둘 수 있다”고 말했다. 달라진 미디어 환경 등을 반영하지 못한 과잉규제가 자칫 반MB정서 확산과 젊은 층의 응집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다.
[조기성 기자] kscho@ilyoseoul.co.kr


#88만원 세대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2007년 전후 한국의 20대를 지칭한다. 비정규직 평균 급여 119만 원에 20대 평균급여에 해당하는 73%를 곱한 금액이 88만 원이다. 한국의 여러 세대 중 처음으로 승자독식 게임을 받아들인 세대가 된다. 이 말은 2007년 8월 출간된 책 [88만원 세대]에서 처음 쓰였다. 이 책의 저자인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은 “지금의 20대 중 상위 5% 정도만이 5급 사무원 이상의 단단한 직장을 가질 수 있고 나머지는 평균 임금 88만 원 정도를 받는 비정규직 삶을 살게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88만 원 세대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20대의 평균 임금 소득을 통해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20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88만 원 세대의 선배라고 할 수 있는 386세대는 선동열 학점이라는 0점대 학점을 받아도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대학을 갓 졸업한 88만 원 세대는 사회생활의 첫발을 아르바이트나 비정규직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1990년대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경쟁력 없는 대학교와 대학생도 88만 원 세대가 등장하는 데 한몫을 했다. 한국의 88만 원 세대는 일본의 ‘버블 세대’나 유럽의 ‘천 유로 세대’, 미국의 ‘빈털터리 세대’와 유사한 의미로 볼 수 있지만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가혹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들이 피부로 느낄 비참함은 훨씬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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