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자수했다가 ‘돈만 날렸다.’ 마약을 복용하고 환각상태에서 경찰에 자수한 한 40대 남성이 거액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동안 체납했던 세금 수십억원을 물게 된 사건이 발생해 관심을 끌고 있다. 서울 동부지법 형사3단독 주정대 판사는 지난 2일 마약 복용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모(42)씨에게 벌금 8,000만원을 선고했다. 문제는 당시 그가 67억원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 이 사실을 알게 된 국세청은 김씨가 세금 74억여 원이 밀린 고액 체납자임을 밝혀내 세금징수에 나섰다.

경찰 자수 ‘횡설수설’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11월 10일 오후 12시경. 김씨가 필로폰에 취한 채 경찰서에 찾아와 자신이 마약범이라고 자수하면서 시작됐다.“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 마약을 투약했으니, 검찰에 자수하게 해 달라”며 횡설수설하는 김씨를 보고 처음에 형사들은 마약이 아닌 술김에 하는 장난쯤으로 여겼었다고. 하지만 조사결과 실제 김씨가 필로폰 양성반응을 보이자 경찰은 그를 즉시 체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를 조사한 서울 광진경찰서(당시 동부경찰서) 담당자에 따르면 김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꽤나 애를 먹었다고 한다. 자신이 마약을 투여했으니 처벌해 달라며 경찰서에 와 놓고는 수사에 협조도 안할뿐더러 이내 말까지 번복했기 때문. 경찰은 “머리카락 한 털이라도 김씨 스스로 뽑아서 경찰에 건네지 않는 이상 인권유린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가 직접 증거물을 건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고 전했다. 무려 8시간이 지난 후에야 김씨는 자수 동기에 대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기다린 시간에 비해 대답은 너무 허무했다.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수를 결심하게 됐다는 것. 이후 그는 머리카락을 무더기로 뽑아 경찰에게 건넸고 소변 검사에도 순순히 응했다. 경찰은 “보건환경연구원의 정밀검사 결과 김씨의 필로폰 투여 사실이 확인됐다”며 그를 유해화학물질관리법 위반 혐의를 적용, 서울 동부지검에 넘겼다. 경찰이 검찰에 올린 김씨에 대한 혐의내용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김씨는 2005년 11월 10일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필로폰 0.03g을 물에 희석해 1회용 주사기로 오른팔에 투약했다.’

집행유예중 마약투여

정황으로만 본다면 김씨는 집에서 필로폰을 투약한 뒤 마약에 취하자 자신의 처지를 비관, 자수를 결심하고 인근 경찰서를 찾았다는 얘기. 하지만 무엇보다 이 사건의 핵심은 김씨가 왜 필로폰을 투약하고 굳이 자수를 했느냐는 부분이다. 경찰은 체포 당시 그에게서 1억원짜리 수표 67장이 발견되면서 그의 자수가 자신이 저지른 다른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냐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또 자수 당시 김씨가 횡설수설하며 “누군가 나를 죽이려한다”는 말에도 무게를 두어 누군가의 압력이 있었던 게 아닌지 여부를 의심하기도 했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에 따르면 “그러나 김씨의 67억원은 마약 사건과 관련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압수했던 수표를 바로 돌려줬다”고 전했다.

누군가의 압력 의혹에 대해 경찰은 장시간 김씨를 집중 추궁, 김씨의 주변인들을 상대로 조사를 벌인 결과 김씨가 애초에 밝혔던 내용과 다른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평소 자신이 돈이 많다고 자랑하고 다녔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를 못마땅해 한 친구들이 거듭 ‘경찰에 신고한다’고 협박하자 ‘누가 겁내냐’는 식의 심보로 덤비다 할 수 없이 자수한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김씨는 친구들의 고발로 인해 마약 전과 혐의로 다시 체포돼 가중 처벌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자수해 벌금을 무는 편이 나을 것으로 판단하고 경찰에 스스로 자수했다는 얘기가 된다. 서울 동부지법은 지난해 11월 마약투여 혐의로 자수한 김씨에게 지난달 31일 벌금 8,000만원을 선고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됐다.

자수후 벌금만 내려 ‘꼼수’

하지만 여우를 피하니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국세청이 관련 기사를 통해 김씨가 세금 74억여원이 밀린 고액 체납자임을 밝혀낸 것. 국세청은 김씨가 67억원이란 거액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세금을 납부할 것을 수차례 촉구했다. 그러나 김씨는 그때마다 “가족들에게 수표를 다 줘서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며 발뺌하며 세금납부를 거부했다. 하지만 조사결과 김씨는 아내와 별거생활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김씨는 지난해 5월 마약 투약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집행유예 기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급해진 건 김씨. 만약 국세청이 조세범처벌법위반 혐의로 고발해 실형을 선고받게 되면 앞서 선고된 징역의 집행유예가 취소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을 안 김씨는 징역형을 피하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숨겨둔 수표 67장 중 66장을 급히 찾아와 세금과 체납 가산액을 납부했다. 현재 김씨는 서울구치소에 필로폰 투약 혐의로만 기소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동부지법 형사3단독 주정대 판사는 “김씨는 마약 전과가 있는 처지에서 또 다시 같은 혐의로 구속되기보다 차라리 자수해서 벌금을 무는 걸 택한 어처구니없는 잔꾀를 부렸다”며 “그는 결국 세금 66억원과 벌금 8,000만원을 내고 140일을 구치소에서 보낸 셈이 됐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