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피해자 유가족 “세상에 알리고 싶습니다”

 파업·해고·복직·산재…생활고, 성탄절에 세상 등진 노동자 늘어나
노동계 “참혹한 광경” vs 원청 “우리와는 무관, 도급업 계약 관계일 뿐”

[일요서울 ㅣ이범희 기자] 노사분쟁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노동계가 비상시국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열 정도다. 노동자들의 죽음이 어제오늘일이 아니라지만 최근 들어 산재사고는 물론 노동자들의 자살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들에 대한 사측의 태도에 불신을 표출하는 유가족의 성토 또한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의 산재피해자들이 하청업체 직원들이다보니 원청에 대한 불신도 높다.

본지가 [지난 971호 - 현대제철 사망사고 은폐 의혹]을 통해 산재사망자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한 후에도 본지에 현대제철 피해자들의 호소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7일 통화한 나모씨의 아내는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해 당진노동청을 찾던 중 “내 남편의 억울함만이라도 알아 달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수년간 함께 일한 사람이 죽었다. 하청업체 소속이라해도 원청업체 사람들과 어울려서 일했다. 철야·야근으로 하루 두세 시간씩 새우잠을 자면서 일했다. 그런데 사고 직후 원청업체에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죽었다고 하청직원 취급한다. 회사에 산재처리를 위한 서류를 요구하자 온갖 핑계를 대며 회피하고 있다. 노동청을 찾았지만 눈물만 흐른다.”
본지와 통화한 나모씨의 부인 김씨의 성토다. 이 사건을 어디에 호소할 데가 없어 당진노동청에 사고서류접수를 위해 가던 길이었다며 한없이 울었다.

이에 앞선 지난 17일에도 본지에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 또한 산재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김모씨의 사연이었다.
그는 “억울해 죽겠다. 밤낮으로 일했다. 산재사고 후 동료들조차 회사 눈치 때문에 사고 과정을 묵과하고 있다. 아파서 울고 사고처리에 또 한 번 운다”고 했다.
이들은 현대제철 산하 하청업체 근로자들이다. 본지가 보도한 현대제철 사망사고 기사에서 자신들의 사례가 빠졌다고 알려왔다. 두 사람 모두 “그냥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분하고 억울한데 내 사연 또한 묻히는 거 같아서 싫었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원청업체의 태도는 완고했다. 사고 현장으로 가는 노조를 제지하고 노동자들을 현장 밖으로 내보낸 뒤 사고 현장을 훼손해 원인조사를 방해하고 은폐하는 것에만 급급했다. 합의서 작성은 물론 높은 보상액을 주면 되겠냐며 비꼬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최근 잇달아 일어난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자살소식도 한동안 노동계를 흔들어났다.
지난 21일 정리해고 되었다가 복직한 후 다시 무기한 휴업상태로 내몰린 한진중공업 근로자 최모(34)씨가 목을 매 세상을 떠났다.

민주노총 측은 최씨가 “박근혜가 대통령되고 또 5년을…”이라는 유서를 자신의 휴대폰 메모에 남겨뒀다고 전했다.
다음 날인 22일 오후에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또 다른 죽음이 이어졌다. 8년 전 동료 하청 노동자의 자살을 곁에서 지켜봤던 사내하청 해고자 이모(41)씨가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날 오전에는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민권연대) 활동가 최모(40)씨가 서울 도봉동 자신의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성탄절인 25일에도 한국외대 노조지부장 이모(47)씨가 노조 사무실에서 목을 매 숨졌다.

원청책임 강화하는 대책 필요 ‘시급’
안타까운 소식이 계속되자 노동계가 비상시국을 선언하고 대응에 나섰다.
26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민주노총·민중의힘·한국진보연대·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등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 소속 5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이날 ‘더 이상 죽이지마라 정리해고·비정규직·노조파괴 긴급 대응’을 제목으로 비상시국회의를 한 뒤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박석은 한국진보연대 대표는 “노동자들의 절박한 죽음들에 대해서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서 시민들이 모두 함께 공동으로 나서야 한다”며 “향후 국민들의 힘을 모으는 방향으로 활동할 것이다”고 말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대선이 끝나자마자 노동자들이 길거리에서 학살당하고 있다”며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는 노동자 인권 뿐 아니라 사람의 인권을 보장하라”고 말했다. 그만큼 노동계의 현실이 급박함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산재를 줄이기 위한 정부 차원의 종합적인 대책이 마련됐다지만 이마저도 아직은 미지수라는 것이 노동계의 평이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6월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제123차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원청의 안전관리 책임을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산업재해 예방대책’을 발표했다.
산재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건설업에 대해서는 사전에 업체의 재해예방활동을 평가해 입찰참가자격(PQ) 심사기준에 반영하기로 했다.

올해부터 주요 공공기관에서 발주한 건설현장의 산업재해율을 공기업 정부경영평가에 반영하기로 한 점도 눈에 띈다. 공기업 건설현장의 경우 안전관리 책임을 원·하청에 떠넘기지 말고 발주처가 직접 책임을 지라는 의미다. LH와 한국전력 등 10여 개 기관에 적용된다.
협력업체에 대한 원청업체의 안전관리 책임도 강화됐다. 건설·제조업에서만 원청이 하청업체에 대한 안전교육 지원 등을 의무화하고 있는데, 내년부터 전 직종으로 확대된다. 노동부는 특히 사내 협력업체 재해율을 포함한 ‘원·하청 통합 재해율’을 산출해 협력적 안전활동을 유도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탁상행정이란 지적이 더 많아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skycro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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