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부터 1990년 사이 영국 총리를 지낸 마가렛 대처 여사가 4월 8일 뇌졸중으로 타계했다. 그는 “보수당의 유일한 남자” “전사(戰士)” “철의 나비” “철의 여인” 등 여러 별명들을 지녔다. 영국의 한 신문은 대처가 3선에 성공하자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허약한 남자에게 맡기고 물러갈 수 있겠는가”라고 썼다. 남성 정치인들은 대처 앞에 허약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철의 여인”은 다우닝가 10번자 총리실에서 퇴근하면 자기 집 부엌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이 “전사”는 남편의 구미에 맞는 요리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철의 나비”는 주말엔 집 단장하고 도배까지 손수 했다. “보수당의 유일한 남자”는 자신의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한 때 실종되었을 때 대중 앞에서 눈물을 쥐어짜는 마음 여린 엄마였다. 그는 1982년 포클랜드 영유권을 둘러싸고 아르헨티나와 벌인 전쟁에서 전사한 255명 가족들에게 일일이 자필로 위로 편지를 써 보냈다. 어머니로서 애틋한 모성애의 발현이었다.

하지만 총리로서 대처는 경외감(敬畏感)을 자아낼 정도로 두둑한 배짱과 꺾일 줄 모르는 의지를 지녔다. 1984년 석탄공사가 적자를 많이 내는 국영 탄광들을 폐쇄하려 하자 전국석탄노조가 반발, 파업에 들어갔다. 운수노조·부두노조 등이 파업에 동참했다. 노조를 압박하던 대처 정권을 무너트리기 위한 노조의 총공세였다.

2차세계대전 후 역대 영국 정부는 전투적 노조의 파업에 3-4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굴복, 노조에 끌려 다녔다. 하지만 대처는 10개월간 노조와 대치하면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파업노조원들과의 충돌로 경찰관 3천500여명이 부상당하는 가운데서도 노조원 9000여명을 연행하는 등 불통의 의지로 법대로 다스렸다. 결국 노조는 대처에게 손들고 항복했다. 그 후 걸핏하면 직장을 폐쇄하고 길거리로 뛰쳐나서던 영국 노조는 조용해졌다.

1986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당시 아랍권에서 반미·반서방 테러에 앞장섰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제거에 나섰다. 레이건은 리비아 공습을 위해 유럽 여러 나라들에게 미국 전폭기의 기착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유럽 지도자들은 막가던 카다피의 보복 테러가 두려워 미 공군기의 경유를 거부하였다.

여기에 대처는 런던 근처의 공군기지를 쓰라고 자청, 레이건의 카다피 공습을 결정적으로 지원했다. 유럽의 남자 지도자들이 겁먹고 숨어들었던 것을 대처는 남자들 보다 더 두툼한 배짱으로 밀어붙였던 것이다.
대처는 “영국 병”을 고쳐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 죽어가던 영국을 다시 살려냈다. “영국 병”은 2차대선 후 역대 정부가 기회주의적 포퓰리즘(대중영합인기몰이)에 빠져 복지체제로 끌려간데 연유했다. 정부의 과도한 복지예산 지출, 고율의 소득세 부과, 전투적 노조 행패, 기업인의 투자의욕 상실, 근로자의 근면성 상실, 사회기강 해이가 불러온 고질병이었다. 해가 지지 않던 대영제국은 “영국 병”으로 침몰해가고 있었다. 대처가 구해냈다.

대처는 “목적을 성취하려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1984년 토로했다. 대처는 고통을 감수하며 과감히 뛰어들어 “영국 병”을 고쳤다. 그는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사설을 통해 지적한 대로 “지난 반세기 동안 그 어떤 총리 보다 영국을 철저히 변화시킨 정치인”이다. 대처는 주말엔 손수 도배를 하였으며 아들이 실종되었을 땐 대중 앞에서 눈물을 쥐어짜는 마음 여린 어머니였다. 그러면서도 정치무대에선 지독한 “철의 여인”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그런 “철의 여인”이 요구된다. 남작부인 마가렛 대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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