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역은 퇴직관료들의 놀이터

   
   
 

[일요서울 | 김나영 기자] 재계를 달군 오리온그룹 비자금 수사의 최고감독자가 퇴임 후 해당 기업 고문으로 위촉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도덕적 해이(모럴해저드) 논란이 일고 있다. 게다가 당사자인 이귀남 전 법무부 장관은 고위공무원의 유관기업 취업을 제한하는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이 시행되기 직전 퇴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오리온의 비자금 수사가 봐주기 식이었다는 의혹과 함께 재계의 고위공직자 모셔오기가 다시금 회자되는 실정이다.

하차 1년 만에 유관기업 고문으로…전관예우 어김 없나
검찰 최고 감독자가 봐주기에 추가 수사도 꼬리 자르기

오리온그룹이 이 전 장관을 자사의 상근고문으로 영입한 것은 지난해 8월로 이 전 장관이 법무부를 떠난 지 1년 만이다. 현재는 비상근고문으로 재직 중인 이 전 장관은 2009년 9월부터 2011년 8월까지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당시 서울중앙지검은 2011년 초 담철곤 오리온 회장의 업무상 횡령 및 배임 관련 수사를 벌였고 이 전 장관은 사건을 총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다.

담 회장은 같은 해 6월 회삿돈 226억 원을 횡령하고 회사에 74억 원 상당의 손해를 끼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그러나 원심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후 항소심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으로 풀려났으며 최종심에서도 항소심과 같은 형이 확정됐다. 게다가 부인인 이화경 사장은 횡령 등에 공범으로 가담한 것이 드러났음에도 아예 입건유예로 처리됐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사법위원회 부위원장인 이재화 변호사는 지난 22일 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 “(공동 경영자인) 담철곤 회장이 구속됐다는 사유와 회사에 입힌 피해를 모두 변제했다는 사유로 입건유예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라며 “14년 동안 변호사하면서 이런 경우는 못 봤다”고 말했다. 통상적으로 검찰에서 모두 기소한 후 재판부가 부부 중 한 사람은 실형, 다른 한 사람은 회사 경영을 참작해 집행유예를 내리는 것과 다르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검찰은 지난해 초에도 담 회장의 비자금과 관련한 추가 수사를 벌였지만 용두사미로 끝나 석연찮은 점을 남겼다. 초기에는 오리온 본사와 계열사를 압수수색하는 등 거창하게 시작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담 회장 등 오너 일가에 대한 수사는 하지 않은 채로 종결지었다.

대신 조경민 전 전략담당사장을 50억 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다시 구속기소하는 데 그쳤다. 재계에서는 오너 일가의 비자금 조성 및 관리 담당자를 일명 ‘금고지기’로 일컫는데 조 전 사장이 바로 그 금고지기다.

이로 인해 이 전 장관이 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리온에 자리잡게 된 것은 당시 봐주기식 수사에 대한 보은이 아니냐는 의혹이 더해가고 있다. 특히 자칫하면 두 번 구속기소될 위기에 처한 담 회장이 이 전 장관을 서둘러 오리온에 영입함으로써 추가 수사를 꼬리자르기 선에서 마무리했다는 의구심이 짙어진다.

법조계 관계자는 “퇴임 이후라도 전직 법무부 장관의 영향력이라면 검찰에 전관예우 차원에서 수사를 축소하게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법 개정 전 퇴직하는 꼼수도

또한 이 전 장관이 퇴직공직자의 사기업 취업제한에 대해 명시한 공직자윤리법 개정안 시행 두 달 전에 퇴임해 법망을 피한 것도 눈길을 끈다. 대개 정부의 영향력 있는 부처에서 재직하던 고위공무원들이 퇴직 후 바로 유관기업에 취임하는 것은 분명 모럴해저드 논란을 유발하기 마련이다. 이를 막기 위해 정부는 4급 이상 고위공직자가 퇴직 전 5년간 행한 업무와 관련된 사기업으로의 취업을 퇴직 후 2년간 제한하는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2011년 7월 공포했다.

이 개정안은 공포 3개월 후인 같은 해 10월부터 시행될 예정이었으나 이 전 장관은 8월에 자리를 정리함으로써 해당 법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치밀함을 보였다. 앞서도 퇴직공무원의 기업 취업을 2년간 금지한 조항은 있었으나 실무가 아닌 자문역은 허용된 상황이었다. 개정안은 이 허점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졌음에도 이 전 장관의 오리온행(行)에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다른 부도 아닌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했던 이 전 장관이 법 시행 전 퇴직한 공무원은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노린 셈이다.

한편 재계에서는 오리온뿐 아니라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고문이나 사외이사 등 상담역을 선임할 때 경쟁적으로 전관 출신을 영입하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본래 상담역은 전문적인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경영 전반에 걸쳐 폭넓은 조언을 제공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리가 유독 퇴직관료에만 편중되는 것은 사정당국이 대기업에 칼날을 겨눴을 때 전관예우 차원의 방패막 확보를 위함이라는 분석이다.

기업 경영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내 상위 10대 기업의 사외이사 3명 중 1명은 법조인ㆍ관료ㆍ세무공무원 출신이다. CEO스코어는 지난 2월 10대 재벌기업 92개 상장사의 사외이사 323명의 출신을 분석한 결과 법조인ㆍ관료ㆍ세무공무원 출신이 109명으로 33.7%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이에 반해 경영전문가인 기업인 출신은 66명으로 20%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이 전 장관은 오리온뿐 아니라 GS에서도 사외이사에 올라 있었으며 삼성전자는 송광수 전 검찰총장을, 현대제철은 정호열 전 공정거래위원장을 새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또한 신세계와 이마트는 손인옥 전 공정위 부위원장과 문창진 전 보건복지부 차관을, 롯데제과는 강대형 전 공정위 부위원장과 박차석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을, CJ와 CJ제일제당은 김성호 전 국정원장과 김갑순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을 각각 새로 영입했다. 이외에도 SK텔레콤은 오대식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을, 호텔신라는 정진호 전 법무부 차관을 새 사외이사로 앉혀 눈길을 끌었다.

재계 관계자는 “보은 차원이든 로비스트 준비 과정이든 퇴직관료의 기업행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며 “단순히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의 자리 채우기는 근절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nykim@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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