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중정 부산지부장 보고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두환 합수부 정승화 계엄사령관 조사 벽에 부딪혀 12·12사건 발생

부산 지역의 시위가 연일 격화되자 서울의
3개 공수여단과 포항의 1개 해병여단이 증강 투입돼 시위진압 강도도 높아졌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며칠 안 돼 박찬긍 군수사령관이 계엄사령관직에서 직위 해제되고 정성만 2관구사령관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됐다. 군 병력이 투입된 초기 계엄군은 가위를 들고 와서 말 안 듣는 사람들을 꿇어 앉혀놓고 삭발하는 일까지 있었다. 난 이런 현장을 보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정 사령관에게 군인들이 트럭에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앞서 차지철 경호실장이 박찬긍 전 계엄사령관에게 필요하면 발포를 해서라도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후임인 정 사령관이 이를 무시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더 이상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시위 군중과 계엄군이 대치하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무장한 군인이 국민에게 총을 쏠 수는 없습니다. 우리로서는 군복을 벗는 한이 있더라도 발포해선 안 됩니다.”

결국 정 사령관은 군 병력을 차에서 내리지 못하도록 지시했고, 시위 수준을 지켜보면서 병력을 한 쪽에 집결시켰다가 숙영지로 복귀시켰다.

이런 조치로 시위 군중과 계엄군 간에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고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급한 상황에서 군정비창에 수리하러 온 탱크 한 대를 몰고 무력시위하다가 서면에서 택시를 들이받는 차량 파손 사고가 있었을 뿐이다.

당시 무엇보다 시위 군중이 무장을 하려고 경찰 무기고와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했는데 군과 경찰이 죽을 각오로 지켜냈다는 것이다. 부산에서 일어난 시위가 마산으로 번져갔지만 결국 부마사태는 큰 희생자를 내지 않고 진정됐다. 이는 시위대에 무기를 탈취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부산사태 심각하다김재규 부장에게 보고 

부산에서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군중 시위가 마산까지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전국적인 민심 동요를 우려해 망미동 보안부대에 합동수사단이 차려졌다. 합수단은 시위 현장에서 시민 1000명 이상을 연행했다. 시위가 얼추 가라앉자 중정 8국장이라는 사람이 부마사태의 주동자가 미리 설정돼 있는 수사체계도를 합수단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중정의 문건에는 김영삼(YS) 총재와 추종세력, 남민전 사건 관련자, 인권운동을 주도했던 김광일 변호사가 중심이 된 양서(良書)조합 등이 부마사태의 주동자로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부마사태 합동수사단장(대령)이었던 나는 중정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보안사 이학봉 수사과장도 부산에 파견 나와 있었는데 내가 이 과장에게 중정 문건을 건네주면서 철저히 따져보라고 했다. 이 과장 역시 연행한 사람들을 조사한 뒤에 중정에서 작성된 문건은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김재규 중정부장이 사태 수습을 위해 현지에 내려왔다가 상경했다. 중정은 YS와 그 추종세력이나 남민전, 양서조합 사람들을 부마사태 발발의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으로 몰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난 합수단은 군인으로서 명예를 걸고 짜 맞추기식 수사는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런 원칙에 따라 일부 방화 파괴자들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당시 YS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부마사태를 촉발시킨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부마사태 발발 배경과 관련해 유 모 부산 중정지부장이 김재규 부장에게 부산사태가 심각하다고 보고해 크게 자극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마사태가 큰 희생 없이 가라앉았고 계엄령이 해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과 며칠 사이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하는 현대사의 비극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을 쓰러뜨린 10.26사태의 총성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사진은 1979년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 전 대통령이 시해사건 현장을 검증하는 모습.<연합뉴스>
10·26 밤 이학봉 긴급 공수 상경작전

부마사태 과정에서 나의 업무를 도와주기 위해 사령부에서 이학봉 대령(수사과장)이 부산지구 보안부대에 와 있었다. 그는 부산고 출신이어서 부산에 친구도 많아 활동범위가 넓었다. 나는 소요진압 후속 조치에 몰두하면서 검찰-경찰과의 협조와 계엄사의 유기적인 업무협조를 위해 뛰어다녔다. 이 대령과는 주로 저녁시간에 만나 시위 상황을 논의하고 업무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1026일 늦은 밤 보안사령부로부터 이 대령을 자정이 넘기 전에 서울로 올려보내라는 긴급 전화를 받았다. 한밤중이라 기차나 비행기 편이 없어서 부산 수송비행단(단장 강신구)에 협조를 구했다. 이렇게 이 대령은 급히 수송기를 타고 상경했다. 그 수송기에는 특전사 장교도 몇 명 동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 과장의 긴급 호출을 지켜보면서 서울에서 중대 사건이 일어났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만 예측하기로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평소 지휘관을 모아 놓고 국기강하식을 하는 등 사실상의 군령권을 장악하고 월권을 휘둘렀던 점을 미뤄 예고됐던 사단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박 대통령이 차 실장에 의해 시해당했거나 감금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이른바 궁정동 쿠데타사건이 결국 터진 것으로 짐작했다.

그래서 이 과장을 올려 보내면서 도착하는 즉시 어떤 상황인지 나에게 꼭 알려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러나 이 과장은 서울로 올라간 뒤로 감감무소식이었다. 뒤에 알고 보니 그는 서울공항(성남 공군부대)에 도착하자 곧바로 서빙고 분실로 가서 그곳에 잡혀온 김재규를 수사하고 있었다. 내게 상황을 전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다음날이 돼서야 난 박 대통령이 지난 밤 사이 김재규에게 시해당했다는 급보를 전해 들었다. 이 와중에도 부마사태에 대한 사후처리는 법률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됐지만 10·26 사건이라는 급박한 국가비상위기 상황을 맞아 처벌은 다소 느슨하게, 사태 처리는 신속하게 종결지을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의 유고로 부산-마산 지역에 내려졌던 비상계엄은 제주도를 제외하고 다시 전국으로 확대됐다. 군령권은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로 넘어갔고, 부마사태에 대한 처리 보고도 부산지역 관구사령관이 아닌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해야 했다. 

국가비상위기 상황 속 부마사태 처리 속전속결

나는 그해 11월 초 부마사태 최종보고서를 작성해서 서울로 올라갔다. 직속상관이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합동수사본부장)에게 먼저 보고한 뒤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마지막으로 보고하기 위해 당시 용산구에 위치했던 육군본부(현 전쟁기념관)로 갔다. 육군본부 참모총장실에는 함께 갔던 전두환 보안사령관만 들어가고 나는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 군 수뇌부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노재현 국방장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등 군 원로급에서 전두환 사령관을 인사 조치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떠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 원로그룹 내에서 전 사령관을 동해안 경비사령관으로 보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는 후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반면 합수부로서는 10·26 당일 사건 현장인 궁정동 안가에 있었던 정 참모총장을 반드시 조사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신병을 처리할지 고심하고 있었다. 자연히 군부 내 신·구세력 간에 묘한 긴장상태가 조성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묘한 시점에 전 사령관은 정 참모총장에게 부마사태를 최종 보고하기 위해 육군본부로 들어간 것이다. 정 참모총장 방에서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몰라도 보고를 마치고 나온 전 사령관의 표정은 들어갈 때 역력했던 긴장이 다소 풀린 듯 보였다. “어이! 이거 뭐 알아서 잘 처리해.” 나는 속으로 더 이상 부마사태에 대해선 추가로 보고할 필요가 없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지검의 수사부장(김두희)과 특수부장(조우현), 지역 계엄사령부 법무참모, 보안부대 대공수사과장, 지방경찰국 수사국장, 정보국장을 비롯해 10개 경찰서 수사과장, 정보과장 등을 내 사무실로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국가원수가 시해당한 비상시국임을 감안해 검찰-경찰-군 관계자의 건의에 따라 시위 연행자 1000여 명 대부분을 훈방 처리하고 부마사태를 모두 종결지었다.  

정승화, 합수부 서면질의서 조사에 자의적인 변명

나는 부산지구 보안부대장으로 부마사태를 마무리하고 11월 중순경 보안사령부 정보처장 겸 합동수사본부 국장 보직을 받아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합수부는 김재규가 왜 박 대통령을 시해하려 했는지 그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서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사건 당일 박 대통령을 시해하고 와이셔츠에 피를 묻힌 상태에서 궁정동을 빠져나와 남산에 있던 중정으로 가려다가 다시 육군본부로 차를 돌렸다. 합수부는 그가 허둥댔던 행동과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선 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정 참모총장을 불러 조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군령권을 쥐고 있었던 계엄사령관인 정 참모총장을 조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합수부의 10·26사건 수사는 벽에 부딪혀 정 참모총장의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합수부는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하기 전에 정 참모총장을 궁정동 안가로 부른 배경을 놓고 대통령을 시해하기 전 두 사람의 관계와 역할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 해결을 위해 이런 의문들을 풀지 않고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기엔 사안이 너무나 중대했다.

그런데도 정 참모총장은 합수부 수사가 벽에 부딪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이 계엄사령관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합수부로서는 정 참모총장을 조사하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합수부에 파견 나와 있던 정경식 검사가 정 참모총장에게 서면 질의서를 보냈고 힘들게 답변을 받았다.

그러나 되돌아온 정 참모총장의 답변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자의적인 변명으로 채워져 있었다. 합수부는 개운하지 않은 답변서를 받아들고 고민에 빠졌다. 결국 합수부 내에서 정 참모총장을 정식으로 소환해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에 계엄사령관인 정 참모총장을 어떤 방식으로 소환할 것인가를 두고 내부적으로 논의가 거듭됐고, 민심과 사회여론을 살피면서 명분 찾기에 몰두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두환 합수부장은 여러 군 원로 선배들의 의견을 듣고 논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가운데 12·12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합수부가 10·26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김재규와 연루된 의혹의 중심에 있던 정 참모총장을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연행하려던 과정에서 빚어졌다. 그러나 연행한 이후에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것이 두고두고 문제가 돼 군사반란이라는 굴레를 쓰게 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고동석 기자> kd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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