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관리 틈타 신군부 세력 부상

1980년 8월6일 최규하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 주고 있다. 그로부터 10일 뒤인 8월 16일 최 대통령은 박충훈 총리서리에게 대통령 권한대행을 넘기고 하야했다. <연합뉴스>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 임명으로 권력 집중 방점 찍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1980229일 윤보선 전 대통령, 김대중 씨 등 주요 정치인들을 비롯해 687명을 대상으로 대규모 사면복권 조치를 단행했다. 정치, 사회 각 계층의 묵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차원에서 단행된 사면복권으로 짧은 몇 개월 동안 정치적인 해빙기 이른바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당시 사면 복권된 인사들 중에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람들도 포함돼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권한대행을 맡으면서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유신시절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위반자들까지 범위를 확대해 폭넓은 사면복권이 이뤄졌다. 이 사면복권을 실시하기 위해선 유신헌법을 개헌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 법무부와 경찰 등 관계기관이 나서 사면복권을 검토하기 위해 심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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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사면복권 정국 혼란 가중


계엄령 하에서 사면복권을 단행하는 것이었기에 그 의미는 각별했고
, 법무부 검찰국에서 자료준비에 착수했다. 심사위원회는 법무부 검찰국장을 위원장으로 청와대, 중정, 경찰, 계엄사(합수부) 소속 보안사에서 참여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김태호 정무2수석비서관, 법무부는 문상익 검찰국장, 중정에선 현홍주 정보국장, 경찰은 유홍수 치안본부 4부장, 보안사에서는 내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법무부 검찰국장실에서 진행된 심사를 위해 정구영 검찰 2과장(훗날 검찰총장 지냄)이 복권 대상자 인적사항과 자료들을 갖고 왔다. 심사위원들은 사면복권 논의 과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을 풀어줘선 안 된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하지만 사회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넓은 의미에서 대상자들을 확대하자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국보법과 긴급조치 위반자들까지 사면하고 동시에 모두 복권시켰다.

그 이후에도 중정이나 경찰에서는 사면복권 조치가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며 반대했지만 청와대 김태호 정무비서관과 내가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극구 주장했다.

나는 이 사면복권 조치가 그때 당시로서는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면 복권된 인사들이 대부분 몇 개월도 안 돼 정치일선에 복귀해 오히려 혼란이 가중되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됐든 시기적으로 정국이 혼미했기 때문에 계엄사령부의 역할이 상당이 컸고 그해 사면복권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사면복권 심사위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훗날 정부 부처와 요직에 중용되거나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러나 문상익 검찰국장은 국보위가 구성될 때 법사분과위원장을 맡았다가 주변에서 숱한 모함에 시달려 낙마한 인물이다. 그의 부인이 부동산 투기로 재력이 상당했다. 이 때문에 새 시대를 열어가는 국보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법사분과위원장을 맡아서 되겠느냐는 투서와 고발 등 갖은 모함을 받았다. 결국 그는 자리에서 밀려나 수원지방검사장으로 갔다.

현홍주 국장은 후에 안기부 차장을 거쳐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을 거쳐 주미대사를 지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합동수사본부장)은 최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은 사면복권 명단을 보고 아주 잘된 일이라고 공감을 표시했다.

문제는 사면복권이 대규모로 단행된 이후 정계와 사회 분위기는 화해와 통합보다는 오히려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전국 곳곳에서 계엄령 해제하라, 군은 물러가라며 시위가 연일 격화했다. 사면 복권된 인사 중 일부는 시위에 가담하기도 했다.  

▲ 1980년 3월1일 정부의 2. 29 복권조치로 다시 정치 일선으로 나서게 된 김대중 씨가 동교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최규하 대통령을 만나 국정 전반에 걸쳐 진지하고 솔직한 의견을 교환하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연합뉴스>
전두환, 12·12사건 후 집권 쪽으로 가닥 잡아

이때까지만 해도 전 사령관은 김재규에 대한 재판 문제를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권력을 잡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당시만 해도 내가 보기엔 전두환 보안사령관(합동수사본부장)이 권력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12.12사건 이후 결국 다른 선택의 길이 없다고 판단해 집권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고 있다. 우선 군 내부 인사부터 정리해 나갔다. 제일 먼저 취한 조치로 국방부 장관을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주영복 장군으로 교체했다.

이어 이희성 장군이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 겸임)으로 임명됐다. 이는 전 사령관을 견제하는 군내 위험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이렇게 군 내부가 안정된 후인 그해 414일 전 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게 된다. 중정부장은 현역 장성이 맡을 수 없는 자리였지만 비상시국이었기에 법규를 뛰어넘는 불가피한 조치였다.

김재규가 구속된 이후 방대한 중정 조직은 사실상 거의 마비상태나 다름없었다. 전 사령관이 중정부장을 겸직하게 된 것은 사실 권력욕보다는 합수부가 12·12사건 사후 수습에 자금이 부족했는데 중정 예산을 끌어다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는 전 사령관에게로 권력이 집중되는 계기가 됐다.

전 사령관이 중정부장 서리가 되면서 중정 1차장(국내)이었던 전대덕 차장(육사 8)을 교체하려고 하는데 누가 좋을지 논의하던 중에 내가 서정화 내무부 차관(뒤에 두 차례 내무부 장관, 국회의원 5선 역임)을 추천했다.

2차장(해외)에는 윤일균(공군 출신) 차장이 그대로 유임됐고, 기조실장에 김성진(육사 11. 후에 체신부 장관 지냄) 장군이 맡았다.

김재규 부장 재직 시 국장급 간부들은 현홍주 정보국장만 유임되고 거의 대부분 문책한 뒤 직위해제하고 교체했다. 현 국장의 능력을 내버리기엔 아깝다고 평가한 것이다. 나는 회의 때마다 그를 자주 만나면서 친하게 지냈다. 이렇게 중정 지부까지 합수부의 통제체제로 들어왔다.

12·12사건 이후 혼란했던 군부 질서는 수습됐지만 최규하 대통령의 소위 위기관리 정부계엄령 하에서 권력기관인 합수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실세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어수선한 때 터진 정선 탄광촌 사북사태

여기저기서 어수선하던 421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서 광원 700여 명이 임금 인상액과 어용노조, 기업주의 착취에 불만을 품고 시위 중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사북사태는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었다. 광원들이 철도를 봉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 탄광에서 힘들고 어렵게 석탄을 캐던 광원들이 생활이 어려워 임금인상과 생활개선을 요구하면서 들고 일어났다. 이들을 공권력으로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 이었다. 사북읍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철도까지 봉쇄하는 등 통제가 전혀 불가능한 상태로 치달았다. 경찰 력을 투입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정도였다. 경찰과 광원들이 대치한 시위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다치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등 상황이 심각했다.

사북탄광의 사주는 이연이라는 사람이었다. 동원탄자라는 회사로 광산업계에선 최대 규모로 사주인 이연씨는 의정부의 로얄골프장을 인수할 만큼 재력가였다. 그러나 그는 사업 경영 규모에 비해 혈압이 높고 성격이 소심한 노인네였다.

사북사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그를 보안사로 불렀다. 그런데 그는 보안사에 와서 내가 묻는 말에 대답도 잘 못하고 벌벌 떨면서 횡설수설했다. 그래서 그에게 사북탄광의 주인이니까. 그곳에 가서 근로자들을 만나서 임금을 달라면 올려 주고, 생활을 개선해 달라면 해 주는 쪽으로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가 사북으로 갈 엄두를 내지 못하자 결국 군부대 헬기를 동원해 광부들이 집결해 있던 장소로 데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군 병력이 투입돼 광원들을 해산시키기는 했지만 돌이켜보면 기업주의 착취에 폭동을 일으킨 광원들이 불쌍하게도 많이 희생된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이후에 정부가 이들이 당한 고통과 아픔을 생각해서 생활 개선과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정리가 됐다. 

▲ 1980년 5월15일 전국 대학생 10만여명이 서울역에 집결해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연합뉴스>
소요사태 속에 국보위 설치

5월 초 전국 대학교 총학생회장들이 이화여대에 모여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면서 결의를 다졌다. 사면복권 이후 정국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대학생들까지 들고 일어나는 상황을 두고볼 수만 없어 계엄사령부가 나서 이대에 모여 있던 대학 총학생회장들을 연행했다.
 
그런 뒤에 이화여대 정의숙 총장과 학생처장이 보안사로 날 찾아왔다. 정 총장은 이대에서 연행한 학생들을 다시 이대로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대에 다시 붙잡아간 학생들은 돌려보내주면 모두 귀가시키겠다며 한사코 풀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하지만 나는 혼란스러운 시국에 시위를 주모했던 학생들을 풀어줄 수는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도 돌아가지 않아 한참 동안 나와 실랑이를 벌였다. 교육자로서 그분들의 충정어린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사회 분위기가 연행한 학생들을 풀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붙잡아 온 학생들을 이래저래 분류해 훈방할 학생들을 빼고 몇 명은 구속했다. 며칠 뒤 서울역에서 10만 명에 달하는 대학생들이 거센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버스가 뒤집혀져 시민들이 깔려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학생들이 정치문제에까지 관여하면서 시위가 끊이지 않자 내가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서울역 인근 중국요리집에 각 대학교 학보사 책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곳에서 간담회 형식으로 대학생들의 건의사항을 들으려고 갔지만 전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때부터 북한의 주체사상이 대학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내가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질 않았다. 각 대학 총학생회를 비롯해 대학 내에는 이른바 주사파가 시위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 주사파 대학생들은 남북한 정부의 정통성 문제를 두고 남한은 부당한 정부이고 북한이 합법적인 정권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내말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5·17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이후 모든 정치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계엄사령부는 김대중씨와 문익환 목사 등은 소요사태를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로, 김종필과 이후락씨 등은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연행했다.

계엄사의 시위 진압은 더욱 강경해졌고, 5·18 광주사태(후에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단행됐다. 정치·사회적으로도 어수선했던 1980520일 신현확 내각이 광주항쟁 등 대학가 소요사태에 책임지고 총사퇴하면서 박충훈 내각이 구성됐다. 나흘 뒤인 24일 김재규 등 10·26사건의 관련자들에 대해 사형을 집행했다.

전국 대학의 잇따른 교내외 시위와 3(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활발한 정치활동이 벌어지는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는 안갯 속에서 정국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의 연속이었다. 불안한 정국을 하루빨리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시국대책 마련이 절실했다. 결과적으로 5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로 이어졌다.

국보위 의장은 최규하 대통령이, 상임위원장에는 전두환 중정부장이 맡았다. 나로서는 국보위를 설치되기까지 여러 가지 고민을 해야 했다. 국보위를 합법적으로 설치해야 되겠는데 법률상 없는 기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대통령령을 내세워 비상조치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합법성이 없는 국보위 설치를 정상적인 절차로 국무총리-대통령 결재를 어떻게 받을 것이며, 국무회의는 어떻게 통과시킬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때 국보위는 합법성이 약한 잠재적 권력체제였지만 당시 세상은 ‘63빌딩을 짓는데 어찌 하오리까?’하는 시기였다.

돌이켜보면 전 사령관에게 권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주변에서 부추긴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신군부는 무엇보다 계엄령이 해제되고 군이 무장 해제할 경우 정정 불안과 함께 나라 전체가 통제 불능의 소요사태로 내몰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안고 있었다. 실제로도 최규하 임시정부에서 바로 권력을 민정으로 이양하기에는 그 시기의 정치, 사회 분위기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고동석 기자>kd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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