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

 

▲ 1980년 8월 18일 최규하 전 대통령(오른쪽)이 청와대를 떠나기에 앞서 전두환 국보위 위원장의 예방을 받고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가운데는 민관식 국회의장 직무대행.<연합뉴스>
최규하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국무총리로서 헌법상 절차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비상시국을 관리하다가 유신헌법의 통일주체국민회의(이하 통대)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최고통치자가 됐다. 그러나 최 대통령은 스스로 임기를 다 채우는 대통령이 아니라 헌법을 개정해 새 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의 관리 역할을 자처하면서 정치개혁의 소신과 정치일정을 밝히기도 했다.  

최규하, 3-신군부 이중고 압박 못 이겨 하야 

최 대통령은 당시 정부를 위기관리 정부라고 칭하면서 10·26~12·12사태와 5·18광주항쟁 등의 혼란 중에 사회 안정을 추구하면서 의욕을 가지고 당시 유류파동 등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중동의 산유국을 방문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한편 김종필-김영삼-김대중 측에서는 정치적 기반이 없는 최 대통령을 향해 빨리 물러나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비상계엄령 하에서 최 대통령은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시국에 관한 주요사항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경향이 있었다.

최 대통령은 신군부의 정국 장악과 정치역학상 대통령 자리에 계속 있기에는 힘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신군부는 최 대통령과 친한 관계에 있는 김정렬 장군(경기고 1년 선배로 뒤에 총리 지냄)이 군부와 논의해서 스스로 명예스럽게 퇴진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전달하며 설득했다. 최 대통령은 처음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뒤에 수용해 조기 사임에 이른다.

이런 사정은 내가 최광수 비서실장과 정국에 관한 유기적인 협력관계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알게 됐다. 또는 이원홍 민정수석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최 대통령이 대통령 자리에 있는 것과 사퇴하는 경우를 놓고서 논의하기도 했다. 나로서는 최 비서실장과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시국의 여러 가지 여건상 최 대통령이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기에는 어렵겠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전했다.

최 비서실장도 최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더는 수행하기가 어렵겠다는 현실을 이해하는 입장으로 돌아섰고, 결국 최 대통령이 사퇴를 결심하는 방향으로 굳어졌다. 이때 군 합수부에서는 최 대통령의 시국 수습방안 발표에 신군부의 뜻을 내용에 담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청와대에 전달했다.

만약 최 대통령이 사임하지 않고 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게 됐다면 그 후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지금도 그 시기 최 대통령이 사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최 대통령이 12·12사태 이후 신군부를 제압하기 위해 국내는 물론 우방국의 외교적 힘을 빌려 강력하게 대처해 나갔다면 예측할 수 없는 혼란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여러 가지 정국 상황에서 3김 중에 누가 집권을 했더라면 안정적인 국정운영이 어려웠을 것이고 상당한 혼란에 휩싸였을 것이다.

특히 5월 광주사태가 일어났을 때 최 대통령은 성명도 내고 자신이 직접 나서 광주 지역 시민들에게 방송도 하면서 사태 진정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이 잘 먹혀들지 않는 상태였다. 그때부터 대통령으로서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 1980년 5월 5일 해공 신익희선생 제24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왼쪽)와 김대중 씨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연합뉴스>
5공 첫 내각 구성 

결국 1980816일 최 대통령이 하야하겠다고 발표하고 헌법에 따라 박충훈 국무총리서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됐다. 이어 닷새 뒤인 821일 국방부에서 전군지휘관회의가 열렸다. 군 주체그룹이었던 신군부는 이날 회의에서 시국에 대한 논의 끝에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나는 당시 헌법상 기능이 살아있는 통대 박영수 사무총장을 만나 선거절차를 협의하고 통대의원 소집 준비에 들어갔다. 국보위 상임위원장(보안사령관-합수부 본부장)827일 통대에서 유신헌법에 따라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돼 91일 취임하게 된다. 당시 내가 느낀 감회는 현역 육군소장인 전 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26사태가 일어난 후 합수부 본부장으로 범인 김재규를 수사해 처벌하고, 12·12사태를 거쳐 5월 광주사태, 최규하 대통령의 사퇴에 이르기까지 9개월여간을 거쳐 대통령에 취임하는 모습까지 지켜보면서 정말 어리벙벙했다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은 전 사령관이 대통령이 된 직후 나에게 국보위 상임위원장실(삼청동 공무원연수원)로 급한 예산 관계 집행서류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김성진 중앙정보부 기획관리실장(육사 11)과 상의해서 서류를 준비하면서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현대사의 격동기에 최고통치자의 참모로서 사령관으로 모신 분이 갑자기 대통령이 되고 보니 흥분된 기분과 함께 멍한 느낌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전 사령관은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로 입성하면서 사실상 국보위가 하던 시국수습 업무도 따라 청와대로 옮겨갔다. 자연스레 국보위의 역할은 축소되어 별로 할 일이 없어졌다. 이때도 계엄통치가 지속됐기 때문에 새 대통령이 취임했지만 정상적인 국정운영은 아니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고서 개각하는데 국무총리를 누구로 할 것인지 논의하는 자리에 내가 인사자료를 준비해 청와대로 가서 지금 경제가 극히 어려운 상황이기에 공직사회를 잘 관리해서 행정부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만한 인물로 남덕우 전 경제 부총리가 제일 적임자라고 추천했다. 외무장관에는 전 대통령이 국가관이 투철하고 외교능력이 탁월한 인물이라며 노신영 제네바 대사를 거론한 바 있다.

그 결과 남덕우 국무총리를 비롯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신병현, 외무부 장관 노신영, 내무부 장관 서정화, 상공부 장관 서석준, 동력자원부 장관 박봉환, 보건사회부 장관 천명기, 교통부 장관 고건, 체신부 장관 김기철, 과학기술처 장관 이정오, 통일원 장관 이범석, 무임소 장관 최광수 비서실장이 새로 임명됐다. 유임된 부처 장관에는 오탁근 법무부 장관, 주영복 국방부 장관, 이규호 문교부 장관, 정종택 농수산부 장관, 이광표 문공부 장관, 김용휴 총무처 장관, 김좌겸 무임소 장관 등이었다.  

김윤환-박재홍 공천 속사정 

5공화국 첫 내각은 행정관료 중에서 경험자를 중심으로 구성해 전환기 국정을 안정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신군부에서는 내각에 들어가지 않았다. 청와대는 허화평 보좌관, 허삼수 사정수석, 이학봉 민정수석이 실세로서 정국을 주도했고, 김경원 비서실장은 형식적인 자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새 정부 탄생을 준비하기 위해 청와대에 자주 갔었는데 비서실장과는 별로 만날 일이 없었고, 허화평 보좌관 등 세 사람과 주로 만나 주요 사항을 논의했다.

5공화국 헌법에 따라 1022일 모든 정치활동이 재개됐다. 이전까지는 주로 정보(중정-보안사-경찰)를 수집해서 페이퍼 워크를 하는 수준이었다. 이 시기 이후로 본격적으로 새 정부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영입했는데 그 대상을 국민적 신뢰와 이미지가 좋은 사람들로 뽑는 데 주력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당의 시-도 책임자를 선임하고 그 다음에 시--구 지구당 위원장을 임명했다. 이들이 앞으로 총선에서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나갈 사람들이었다. 이때 조직책 선임은 3대 정보기관이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평가한 끝에 한 사람씩 결정해 갔다. 청와대 쪽에서는 민정수석실과 사정수석실, 그리고 허화평 보좌관이 참여했다. 이를 내가 종합해서 잠정적으로 결정한 뒤에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최종 결과를 받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서 명단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최종 결정 단계에서 사람이 바뀌어 다른 사람이 새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11대 총선 후보자는 먼저 지역구를 결정하고 뒤에 전국구를 결정했다. 영입 대상자 중에는 사양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수집된 자료와 그밖에 나타나는 자료 때문에 탈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영입 인선작업을 하면서 서울 시내 플라자호텔과 서린호텔에 방을 정해 놓고 영입대상자들을 만났다. 내가 바쁠 때는 이종찬 의원이 하얏트호텔에 방을 얻어 놓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의 일화로 내가 플라자호텔 1760호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는데 모 중진 정치인을 그곳으로 오라고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방 번호를 잘못 알고 1670호로 가는 바람에 날 만나지 못했다. 그 후에 다시 나와 만날 기회를 얻지 못해 결국 공천에서 탈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뒤에 정무장관을 지낸 정재철 의원이 당시 한일은행장으로 있었는데 강원도 속초-인제 지역에 공천받아 출마하겠다고 했다. 그는 이종찬 의원과 친한 사이여서 그를 만난 뒤 공천한 적이 있다. 또 한 가지는 김윤환 의원을 경북 구미-선산에 공천 주기로 결정했는데 교체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긴 것이다.

하루는 내가 개발이 한창이던 강남에 있는 식당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다. 차를 타고 막 내리는데 박재홍 씨(박정희 대통령 조카)가 그와 친하게 지내는 육사 17기생과 함께 서 있기에 내가 박재홍 씨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했더니 형님 저를 잘 도와주시지도 않고 해서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면서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그런데 면도로 깨끗이 삭발한 모습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당시 박재홍 씨가 청와대를 자주 드나들면서 군인들과 친하게 지냈고, 고위급 군인들은 거의 다 박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시해된 후에도 박재홍 씨를 도와주려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대령 계급이었으니까 박 대통령의 덕을 직접적으로 입은 적은 없지만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를 지낸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을 비롯해 청와대 경호실,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 공수여단에서 근무한 군인들은 박재홍 씨를 특별히 생각해주는 편이었다. 이런 분들의 생각은 대체로 박 대통령의 집안에 대를 이어가는 사람을 그냥 둘 수 없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다음날 청와대에 들어가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박재홍 씨의 사정을 전했다. 마침 전 대통령도 이해를 하면서 도와주도록 하라고 해서 구미-선산에 박재홍 씨를 공천하고 김윤환 의원을 다른 방법으로 배려하자고 건의해서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김윤환 의원은 전국구로 나가게 됐는데 김 의원이 노태우 대통령, 정호용 의원과 경북고 동기라서 노-정 두 분이 나에게 전화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졌다. 나도 김윤환 의원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사람도 좋고 정치적 역량도 있는 분으로 전국구 안정권 순위를 주려고 하고 있는데도 노-정 두 분은 다소 불안했던지 나에게 여러 차례 전화해서 확인하기도 했다. 김 의원은 제11대 국회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가 중간에 문화공보부 차관으로 갔다.  

▲ 1981년 1월 15일 민주정의당은 잠실체육관에서 창당대회를 치르고 12대 대통령 후보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지명했다. 대통령 후보 수락 직후 전두환 대통령 부부 내외가 만세를 부르고 있다.<연합뉴스>
민정당 11대 국회 과반수 의석 확보 

또 전 대통령께서 직접 임영득 씨를 전남 해남-진도에, 변정일 씨를 수재라고 하면서 제주 서귀포 남-북제주에 공천하는 지시가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은 여론 상(당시 정보기관 수집자료) 당선이 위험하다고 해서 중간에 바꾸려고 건의했으나 그냥 두자고 해서 내가 그 지역구로 직접 가서 당원·기관장을 모아놓고 선거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92개 지역 선거구에서 2개 지역이 낙선되고 90개 선거구에서 민정당 후보들이 당선됐다. 또 하대돈 씨의 경우는 공천이 되었으나 병으로 교체됐다가 뒤에 병이 나아서 관광공사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호남의 모 지역에서는 백 모 씨가 공천을 받아 지역에 선거운동을 하러 갔는데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온 사람으로, 미군부대에서 모든 식료품과 물까지 가져다 먹는 사람이라는 소문(일부는 사실로 판명됨)이 나서 중도하차하는 경우도 있었다.

3.25 총선 결과 민정당은 지역구 90개에 전국구 3분의 2을 얻어 원내 과반수인 152석을 확보했다. 앞서 선거구 획정은 내가 문을 닫아 놓고 전국의 인구비례에 따라 12인제 중선거구제와 다수당이 전국구 의석 3분의 2로 획정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지역감정을 완화하는 방법의 하나로 검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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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총선은 당시 행정기관이 보이지 않게 여당 후보를 지원했고, 돈 선거는 중앙당이 조직관리상 지구당에 필요한 돈을 지원했으나 돈이 선거 당락을 좌지우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민정당은 전국의 지역구 선거구(호남까지)에서 거의 모든 지역에서 1위로 당선됐고, 몇 곳에서 2위 당선자도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고동석 기자> kd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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