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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자리에서 주고받은 농담…KWFF 공식문서로 확인돼 거짓 들통나
박은선 복귀에 타 구단 퇴출 한 목소리…서울시청팀 법적 대응 총동원 예고

[일요서울 | 김종현 기자] 여자축구선수로서 아시아여자선수권대회, 여자월드컵, 올림픽, 동아시아대회 등 국제대회에서 한국여자축구의 위상을 높여 왔던 ‘여자 박주영’ 박은선의 성별 논란이 일면서 축구계가 매우 시끄럽다. 또 발언지인 구단 감독들은 농담이었다는 군색한 변명으로 덮으려 했지만 인권침해 논란이 거세게 일면서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더욱이 박은선이 성인무대 데뷔 9년차인 점을 감안할 때 성별 논란은 박은선 죽이기라는 의혹까지 이어져 축구계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서울시체육회는 지난 7일 서울 중랑구 서울시체육회 1층 대강당에서 서정호 서울시청 감독과 주원홍 서울시체육회 실무부회장, 김준수 서울시체육회 사무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박은선 선수 성별 논란 보도’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서울시청 측은 “박은선의 성별 논란은 두 번 다시 재론되어서는 안 된다”며 “한 인간의 성별을 확인하자는 주장은 당사자의 인격과 자존감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심각한 인권 침해다. 더구나 박은선은 이미 2004년 위례정보산업고 3학년 재학 시 아테네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돼 대한축구협회로부터 성별 판정 검사를 이미 받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이후 국가대표로 여러 국제대회에 출전해 여자축구선수로서 전혀 문제 없음을 인정받았다. 6개 여자축구 구단 감독들이 또다시 박은선의 성별 진단 결과를 요구하고 나선 것은 박은선을 두 번 죽이자는 것이며 어떠한 경우에라도 지켜져야 하는 기본적인 선수인권을 저버린 것”이라고 질타했다.

이와 함께 서울시청은 “앞으로 다시는 성별 판정 논란이 재론돼서는 안 되며 이에 어긋날 시 서울시와 서울시체육회는 선수인권 보호를 위해 모든 조치를 다 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번 논란에 대해 “철저한 진상규명과 해당 구단의 책임 있는 사과를 요구한다”면서 “언론보도 이후 진실을 축소하거나 은폐하려고 하는 시도에 심각한 유감을 표시한다. 6개 구단 감독들의 의견을 문서로 정리해 여자축구연맹(KWFF)에 공식적으로 접수까지 한 상황이다. 국가인권위원회 등 관련 기관에 정식으로 철저한 진상조사를 의뢰할 것”이라고 밝혀 강경하게 대응할 뜻을 전했다.

감독들 농담에
선수들 피멍드나

이처럼 서울시가 발끈한 데는 서울시청을 제외한 6개 구단의 감독들이 농담 삼아 한 얘기라고 했던 해명이 거짓으로 들통 나면서다.

앞서 서울시청을 제외한 6개 구단 감독들은 지난달 10일 사적인 자리에서 올 시즌 WK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박은선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내년 박은선을 WK리그 경기에 뛰지 못하도록 하자”고 결의했다. 또 “박은선이 계속해서 WK리그 경기에 나설 경우 2014년도 시즌에 출전하지 않겠다”는 보이콧 의사까지 여자축구연맹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내용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6개 구단 감독들은 입을 모아 “사적인 자리에서 주고받은 농담이었고 공식적이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을 바꿨다.

올해 우승팀인 최인철 현대제철 감독은 한 매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우리 팀은 은선이가 뛰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며 “그날 간담회에서 오간 이야기는 퇴출하자는 것보다도 은선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정도였다”고 말했다. 또 “은선이가 대표팀에 뽑혔으면 좋겠고 그러면 우리 여자축구가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이번에 얘기가 나온 김에 그 부분을 명확히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감독은 “퇴출시키자고 사인한 것도 아니고 내용이 부풀려졌다”면서 “은선이가 어쨌든 뛰고 있고 올 시즌 마음잡고 정말 열심히 하더라. 솔선수범하고 희생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 인격체로서 이 친구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다른 구단 감독들 역시 비슷한 견해를 내비쳤다. 다만 “박은선을 막다가 매 경기 3~4명이 부상한다. 기량이 떨어지고 체격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라며 “연맹에서 의지를 갖고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의견을 낸 것이지 리그를 보이콧하겠다는 주장은 한 적이 없다”며 성별 논란을 제기하며 퇴출을 운운한 일은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서울시청은 기자회견 자리에서 6개 구단 감독들의 의견이 담긴 문서를 공개하며 사적인 의견이 아닌 연맹으로 전해진 공식적인 사인이라고 명확히 했다.

이에 따르면 문서에는 9개 내용이 있었고 그 중 7번째 항목이 박은선 선수와 관련된 것으로 “2013년 12월 31일까지 (박은선 선수의) 출전 여부를 정확히 판정해 주지 않을 시 서울시청팀을 제외한 실업 6개 구단은 ‘2014년도 시즌을 모두 출전 거부한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서 감독은 “어른들의 이기주의와 욕심으로 선수가 상처를 받았다. 박은선 선수는 한국 여자축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선수로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실력견제 복귀하자마자
퇴출 꼼수

▲ 박은선 선수(서울시청) <뉴시스>
그간 국가대표팀 부동의 원톱 스트라이커였던 박은선은 ‘여자 박주영’이란 별명으로 불리 정도로 출중한 기량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도 ‘풍운아’라는 또 하나의 별명이 붙을 정도로 실력과 달리 정신력이 약해 방황을 거듭해왔다. 2005년 서울시청 입단 후에도 팀 이탈과 복귀를 수차례 반복하는 등 부침이 심했고 2010년 봄 이후로는 아예 팀 복귀를 하지 않아 서 감독의 속을 태웠다.

그러나 박은선은 지난해 리그에 합류하며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올 시즌 자신의 컨디션을 되찾으며 득점왕의 자리까지 올랐다. 서울시청팀도 중하위권에서 정규리그 2위에 오르며 사상 첫 챔피언전에 진출했다. 그러자 그의 복귀를 두고 이상한 소문들이 주변에서 나돌기 시작했다.

결국 소문은 박은선 선수에게 성별 논란이라는 깊은 상처를 안겨줬다. 특히 여자축구계에서 27년의 축구인생을 보낸 선수에게 이제 와서 ‘너는 여자가 아닐 수도 있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꼴이 돼 성별의 문제를 떠나서 심각한 인권 침해를 목격하게 했다.

문제가 불거지자 박은선은 지난 6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심경을 토로하는 글을 남겼다. 그는 “한 가정의 딸로 태어나 28세가 됐다. 나를 모르는 분들도 아니고 웃으면서 인사해 주시고 걱정해 주셨던 분이 이렇게 나를 죽이려든다”며 “고등학교 졸업 후 실업팀에 왔을 때와 비슷한 상황 같다. 그때도 절 데려가려고 많은 감독님들이 저에게 잘해주시다 돌변하셨는데 지금도 그렇네요”라고 씁쓸한 마음을 전했다.

그는 또 “성별검사를 한두 번 받은 것도 아니고 월드컵 때, 올림픽 때도 받아서 경기 출전하고 다했는데 그때도 정말 어린 나이에 기분이 많이 안 좋았으며 수치심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박은선의 축구인생을 알고 그간 받아온 상처를 잘 아는 사람들이 다시 상처를 헤집는 추태에 대해 박은선의 멘탈을 흔들기 위한 꼼수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예전의 팀 이탈과 잦은 방황으로 ‘풍운아’ 소리를 듣던 박은선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서 감독을 비롯해 서울시체육회가 직접 나서서 반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후폭풍 거세
줄줄이 사퇴 예고

이번 논란을 놓고 진원지인 감독들은 농담이라는 해명으로 일단락 지으려 했으나 서울시청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에 나서면서 후폭풍이 거세게 일고 있다.

우선 인권위가 지난 7일 박은선 선수의 성별 논란과 관련해 조사에 착수했다. 인권위는 “최근 WK리그 6개 구단 감독이 제기한 박 선수의 성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 일반인 2명이 심각한 인권침해라며 진정을 냈다”며 “7일 오전 두 건의 진정을 병합, 차별조사과에 배당해 조사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WK리그 구단들과 박은선 등 관련자를 상대로 인권 침해와 차별 여부를 조사할 계획이다.

또 진원지인 감독들 역시 줄줄이 사퇴를 예고하고 있다. 감독 모임의 회장을 맡았던 이성균 수원시설공단 감독은 지난 7일 밤 감독직을 사퇴했다. 이 감독은 “논란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박은선 선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밝혔다.

이 외에도 고양 대교 유동관 감독도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늘 우승후보였던 대교는 올 시즌 서울시청과 현대제철에 밀려 3위의 성적에 그치면서 이번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에 대해 대교 관계자는 “사표 제출 여부를 확인해주기 어렵지만 성적 부진으로 감독 교체를 고려하고 있었다”며 이번 사태와 감독의 거취를 연계하는 것에 경계심을 나타냈다.

한국여자축구연맹 역시 지난 6일 단장 간담회를 열고 2014 신인 드래프트와 시즌 운영 등을 논의할 계획이었지만 이번 논란으로 모든 논의가 중단됐다.

여자축구연맹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박은선에 대한 인권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전체 선수들의 권익도 포함된다. 차후에 성별 논란 등 인권을 침해하는 문제들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대한 축구협회와 함께 정확한 기준을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선수 등록을 받는 대한축구협회도 이번 문제를 계기로 스포츠 인권 등에 대해 고민하겠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서울시청 측이 강조한 것처럼 책임 있는 사과가 전제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논란이 확산되자 많은 대책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박은선 선수는 이미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점에서 철저한 진상규명과 사과가 요구되고 있다.

또 이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한축구협회를 비롯해 대한체육회 차원에서 정확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편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박은선 선수는 꿋꿋이 일어서겠다는 각오를 전해 박수를 받고 있다. 그는 “니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나도 내 할 일을 하련다. 단디(똑똑히) 지켜봐라. 여기서 안 무너진다. 니들 수작 다 보인다”라고 당당히 외치고 있다. 이에 내년 시즌에도 흔들림 없이 제 기량을 발휘해 한국 여자축구의 대들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todida@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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