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자회사 대출사기로 잃은 것들은

책상에서 도장만 ‘꽝’…실종된 리스크 관리로 오명
피해 메울 충당금 최소 수백억…내부 공모 가능성도

[일요서울 | 김나영 기자] KT ENS 직원의 3000억 원대 대출사기가 금융권의 태풍으로 떠올랐다. 그중 대출액이 가장 큰 하나은행은 사건의 윤곽이 드러날수록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대출사기로 입을 피해를 걱정하기도 바쁜 와중에 자체 여신심사 시스템의 문제까지 속속들이 드러나서다. 아직 책임 소재를 두고 KT ENS와 금융권 간 공방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하나은행이 잃을 것들은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 하나은행

대기업의 비주력 계열사들이 덕을 보는 때는 언제일까. 바로 자체 역량보다는 그룹의 명성도에 의존해 평가받을 때다. 물론 해당 회사가 속한 업계 사정에 밝지 않은 경우에 한해서다.

자회사도 마찬가지다. 규모나 실적에 관계없이 모기업의 신용도를 따라가는 사례가 종종 있다. 하지만 금융권의 대출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져야 한다. 보다 엄격한 잣대로 현 상태와 향후 상환 능력을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KT ENS 대출사기는 이러한 심사대 위에 오르고도 무사통과됐다. 이번 사기극에서 대출 주체는 KT ENS의 협력업체들이 만든 특수목적법인(SPC)이고 상환은 KT ENS가 하는 구조였다.

KT ENS가 연매출 5000억 원의 회사라는 실체보다는 단지 KT의 자회사라는 이유만으로 보통 기업과는 다른 특별대우를 받은 탓이다. 모기업인 KT의 짙은 그림자가 17개 금융사의 눈을 가린 셈이다.

은행조회서 내 ‘우발적 채무’ 두고 시각 갈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서류를 위조한 KT ENS 직원과 공모 협력업체에 있다. 하지만 금융권의 허술한 여신심사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하나은행의 경우에는 이례적인 대출한도로 눈길을 끌었다. 하나은행은 2008년부터 총 대출액 3000억여 원의 절반이 넘는 1600억여 원을 대출해줬다. 농협과 국민은행이 각각 300억여 원을 대출한 것에 비하면 다섯 배의 규모다.

이처럼 대단위의 대출을 승인하면서도 KT ENS의 자금부에는 어떠한 확인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아무리 서류 위조가 난무해도 전화 한 통이면 모든 게 밝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의미다.

게다가 대출 과정에서 현장 실사는 물론 서류 조작과 위조에 대한 검증조차 없었다. 심지어 2012년부터는 휴대폰과 관련한 매출이 없었음에도 여전히 매출 기준을 휴대폰 판매대금으로 산정한 상태였다. 이런 연유들로 금융당국에서는 KT ENS뿐 아니라 은행 내부 공모에 대한 가능성도 지속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

또한 하나은행은 “KT ENS와는 대출을 포함해 어떠한 거래 관계도 없다”는 내용을 담은 은행조회서를 KT ENS의 외부감사법인에 발송하기도 했다. 지난해 말 안진회계법인은 KT ENS의 연간 회계보고서 작성을 위해 회사의 채무사항을 파악하고자 하나은행에 대출 관련 사항을 요구한 바 있다.

하나은행 측은 KT ENS와 직접 지급보증이나 대출약정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회계법인에 제공하는 은행조회서 정보제공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금융권에서는 여전히 하나은행이 대규모 대출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거나 고의로 누락했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입장차는 ‘우발적 채무’에서 기인한다. 통상적으로 은행조회서에는 해당 기업과의 채무 관계와 지급보증 내역이 기재된다. 뿐만 아니라 언제든 확정채무가 될 수 있는 우발적 채무도 그 대상이 된다. KT ENS의 매출채권과 관련한 것 역시 이에 해당하느냐를 두고 시각이 갈린 것이다.

▲ 김정태(왼쪽), 김종준

타행 거절한 여신심사건 의심 없이 단독 대출

더불어 하나은행이 농협ㆍ국민은행처럼 대주단을 구성하지 않고 단독으로 대출을 해준 이유도 도마에 올랐다. 하나은행이 2012년 우리은행에 대주단 구성을 제안했으나 당시 우리은행은 대출금 회수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해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은행에서 거절한 여신심사건을 하나은행만 진행했다는 것은 하나은행의 여신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당장 하나은행은 이번 대출사기로 입을 피해에 대비해 지난 실적을 뜯어고쳐 대손충당금을 쌓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KT ENS의 매출채권은 일반적인 담보와 달리 추후 수금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신용대출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만약 정상 대출이 전혀 없을 경우에는 최소 1600억 원의 절반인 800억 원가량을 충당금으로 쌓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일로 전임 은행장이었던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과 현직인 김종준 행장 모두가 난처해질 가능성도 엿보인다. 하나은행의 여신심사는 물론 전반적인 시스템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가운데 현직 행장의 임기는 다음 달에 만료될 예정이다. 역시 책임이 있는 전 행장이자 현 회장은 아직 임기가 1년1개월 남은 채로 행장추천위원회에 몸담은 상태다.

금융권 관계자는 “최고액을 대출해준 하나은행의 시스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이 나오고 있는 형국”이라며 “향후 금융당국이 전ㆍ현직 행장에 대한 책임을 함께 추궁하면 지주사 회장과 행장 모두가 관련돼 하나금융이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nykim@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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