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터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일이었다.”때아닌 장 주석의 사임설과 관련, 내막을 묻는 기자에게 몇 번이고 익명보장을 요구한 끝에 입을 연 상하이 주재 한 중급 인민법원의 판사 양(梁·40대 남)씨의 말이다. 기자로부터 전해들은 ‘뉴스’에 짐짓 당황하며 이내 곧 꼬깃꼬깃한 손수건을 꺼내 안경을 닦아내는 그는 이번의 사임 설은 ‘때 아닌’ 것이 아닌 언제 불거져 나와도 하등 이상할 바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국제정치나 국제관계에 관한 한 중국은 한국이나 일본보다 오히려 더욱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보도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국내정치에 대해서는 철저한 통제와 함구로 일관하는 사회주의 국가다. 외국인과 자주 접하는 중국의 엘리트 중에는 서방세계와 중국간의 이와 같은 정보의 괴리현상에 대해 중국당국에 곱지 않은 인상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권력을 향한 장 주석의 속성을 고려할 때‘자기를 가만히 놔두라.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안있겠다’는 식의 경고일 수도 있지요.” 버끔버끔 뿜어대는 담배연기속에 결론내린 양 판사의 분석이다. 그의 분석은 이렇다. 1989년부터 중국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한 이래 수많은 도전을 물리쳐 온 사람이 장쩌민이다. 비록 주위 여건상 2002년 후진타오 현국가주석에게 권력의 칼을 내놓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차마 인민해방군의 통수권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그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와 동세대인 다른 지도자들을 비롯, 현지도부로부터도 그에 대한 전면퇴진 압력은 날로 거세지기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최근들어 그의 역린사건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베이징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그것은 장 주석으로서는 더 이상 참기 힘든, 물러설 수 없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그러면서 새 담배를 기자에게 권하며 다음과 같은 일을 들려준다. 지난 8월 2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된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대만독립을 단호하게 박살낼 결정을 내리겠다”는 발언을 했다 한다. 이는 인민해방군의 사용과도 관련된 발언인데 이것이 큰 화근이었을 것이라 한다. 즉 다른 모든 권력은 이양했지만 아직도 인민해방군의 최고통수권자로 군림하고 있는, 군에 관한 한 최고이며 최후 결정권자인 장 주석 앞에서 군에 대한 발언을 했다는 것은 장 주석에게는 치명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볼 때 그가 정말 사임과 관련한 언급을 했더라면 결국 고도의 계산된 발언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다시 말해 아직도 권력욕에 불타고 있는 그가 그에 대한 온갖 사임압력에 대해 뽑아 던진 빅 카드의 하나가 바로 이번의 사임표명이며 이는 곧 중앙군사위 주석직에서 물러날 뜻이 없으니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성 칼날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한편 그의 이와 같은 분석은 상하이의 한 대학에서 국제정치경제를 강의하고 있는 독일인 프랭크 교수로부터도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장의 사임설과 관련, 국방부장(우리의 국방부 장관) 차오강촨(曹剛川)이 7월 31일 건군절(建軍節) 행사에서 행한 발언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당시 후진타오 총서기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역설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차오 부장은 작년 건군절 행사에서는 장쩌민 군사위원회 주석의 지휘에 따라야 한다는 상반된 발언을 했었습니다.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이죠. 그런데 이와 같은 변화는 바로 인민해방군도 점차 권력의 화신 장쩌민 주석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요.”프랭크 교수의 분석은 사임압력의 온갖 역경속에서도 장 주석은 8월31일자 인민일보 보도에서도 알 수 있듯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중국의 군비 증강은 중국의 강군전략을 위해서도 시급한 과제이며 중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전략적 과제”라며 군비 증강과 무기 근대화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그가 며칠 뒤 바로 사임을 표명했다는 것은 그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식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중국언론매체의 침묵속에서도 중국에서 움직이고 있는 인텔리 층 사이에서는 이 문제가 이미 조용한 폭발적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물론 뚜껑이 열리기 전까지는 어떠한 속단도 허용키 힘들겠지만 이 시점에서 적어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번 장주석의 발언은 그동안의 권력투쟁 양상, 즉 후진타오 총서기 측근격인 당서열 3위인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와 장쩌민 주석의 측근인 당 서열 4위 쩡칭홍(曾慶紅) 국가 부주석 사이의 대리전 양상이 급기야는 양 당사자들 간의 전면전으로 불거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자웅겨루기식의 으르렁거림속에서 죽의 장막 중국에서는 9월 16일부터 중국 공산당 제16기 중앙위원회 4차 전체회의가 개최된다. 당사자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소를 머금은 채 박수치며 등장하겠지만 미소뒤의 비수가 과연 어느쪽으로 어떻게 꽂혀들어갈지 이곳 중국은 벌써부터 폭풍전야의 숨막힐 듯한 정적에 싸늘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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