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 오전. 서울 수서경찰서 강력4팀에는 수갑을 찬 20대 청년 3명이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고생이라고는 좀처럼 해보지 않은 듯 말끔한 얼굴의 이들은 한눈에 봐도 ‘부유층 자제’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그러나 놀랍게도 이들의 범죄는 상습절도. 이날 강력4팀의 한켠은 이들이 훔친 물품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는데 노트북에서 스노보드, 의류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어 마치 만물상을 방불케 했다. 남부럽지 않게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전문 절도꾼으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강남토박이 삼총사 “심심해서 시작한일”

박성현(28·가명)과 이영훈(28·가명)은 강남지역에서 ‘잘나가는’ 동네친구였다. 교회에서 알게 돼 친해진 이들은 둘다 어려서부터 서초동 일대 고급아파트촌에 거주해온 ‘강남토박이’로 넉넉한 가정형편에서 자랐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화학약품을 제조하는 모 중소기업 회장의 아들인 박성현과 남대문시장에서 대규모의 모파상을 경영하는 집안의 자제인 이영훈은 여유있고 넉넉한 생활을 영위해왔다.그러나 특정한 직업없이 무료하고 나태한 생활에 빠져 지내던 이들은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범죄의 나락에 빠져들게 된다. 결국 박성현과 이영훈, 그리고 박의 고등학교 동창생 등 세명은 차량에 고가의 물품을 두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이용, ‘재미삼아’ 이 물건들을 훔치기로 계획을 세운다.처음 범행을 시작한 것은 지난 2003년 11월. 첫 범행이 의외로 쉽게 성공하자 이들은 더욱 재미를 느끼게 된다.

이들은 지난 2월24일 오전 2시경 강남구 포이동에 위치한 한 주차장에서 박모(27)씨가 주차해 놓은 차량의 문을 60cm 가량의 철제 자를 사용해 연 뒤 카메라 세트 등 270만원어치의 금품을 훔쳤다. 그러나 고양이가 생선가게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주차된 차량을 본 이들은 이후로도 범죄의 유혹을 떨칠 수 없었다. 주차된 차량들은 마음만 먹으면 털 수 있는 범행대상이었고, 차량 문을 딸 수 있는 ‘철제자’는 마치 ‘요술도구’와도 같았다. 이들은 일주일에 서너번씩 강남일대를 돌며 돈이 될만한 물품들을 ‘싹쓸이’했다. 훔친 물품들은 차량에 설치된 각종 네비게이션과 TV는 물론, 시가 2,500만원 상당의 컴퓨터 진동계측기, 노트북, 카메라, 캠코더, 스노보드, 심지어 의류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조사결과 여지껏 밝혀진 피해자만도 50여명. 이들의 범행은 올 6월 15일까지 약 1년 6개월동안 계속됐는데, 이들이 훔친 물품은 약 200차례에 걸쳐 무려 2억원 상당에 달했다.

범행위해 봉고차와 아파트까지 마련…경매사이트 이용 장물거래

조사결과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던 박 등은 범행에 쓸 봉고차량을 쉽게 구입했다. 또 훔친 물품들을 보관할 장소까지 마련했다. 박은 반포의 소형 아파트에 전세로 입주한뒤 절취한 물건을 봉고차를 이용해 그때그때 실어날랐다. 물건들의 처리에 대해 논의하던 이들은 안전하게 현금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내다 팔기로 합의한다.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검거될 것을 우려, 자신의 주거지에서는 일절 컴퓨터에 접속하지 않았다. 대신 PC방을 옮겨가며 훔친 물건을 경매사이트에 등록했다.

또 절취한 신분증을 이용, 타인 명의의 통장을 개설하여 장물을 매각하는 방법으로 1억원 상당의 돈을 챙길 수 있었다.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법. 이들이 강남일대를 휘젓고 다닐때는 이미 경찰에 차량내물품 도난 신고가 빗발치고 있을 때였다. 신고를 받은 강력 4팀 형사들은 즉시 수사에 착수, 피해물품들 중 특히 스노보드 및 노트북, 디지털카메라 등 고가의 물품들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경매로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해당 아이디와 아이피를 확인한 결과 타인명의를 도용한 불상자의 소행일 것이라는 경찰의 예상은 적중했다. 경찰은 서초구 반포동에 위치한 OOPC방에서 경매사이트에 물품을 등록하고 있는 박 등 3명을 검거, 6월 29일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 낮에는 유능한 과외선생, 밤에는 전문절도범
- “서울대 출신이라는 말에 강남아줌마들 껌뻑 넘어가요”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근 1년 반동안 ‘이중생활’을 지속했다. 일부는 폭력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이들이 전문적인 절도범이라는 사실을 눈치채는 이는 없었다. 무엇보다 주범인 박성현의 철저한 이중생활은 경찰을 아연실색케 만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뉴질랜드 어학연수 경험이 있는 그는 1년간의 연수 과정에서 익힌 영어실력을 이용해 돈을 벌어보기로 마음먹는다. 어릴 때부터 강남에 거주한 탓에 강남 특유의 문화를 꿰뚫고 있던 박은 강남의 학부모들이 명문대에 집착하는 점을 이용했다. 지방 삼류대 출신인 그는 자신을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 2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이라 소개하는 광고지를 만들어 부유층들이 밀집해 있는 강남일대에 부착하는 한편, 명함까지 만들어 돌렸다.

전단지에는 9년의 과외경력과 5년의 학원강사 경력, 수업교재는 물론이고 강남의 명문 중고등학교로 알려진 H고, S고의 재학생들을 전문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상세한 내용을 기재해 경쟁심을 유발했다. 자식교육이라면 물불가리지 않고 경쟁하듯 덤벼드는 일부 강남 학부모들의 심리를 철저히 이용한 것이었다.서울대 출신에 강남일대 학원에서 강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그의 화려한 프로필에 학부모들은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주간에는 유능한 영어강사로, 야간에는 전문절도범으로 살던 박의 이중생활은 결국 이번 절도범행이 들통나면서 동시에 막을 내리게 됐다.


# “한주만 범행 걸러도 좀이 쑤시고…심심했습니다”
- “스릴과 성취감 느꼈다”



이번 사건에서 특이한 점은 이들의 범행동기가 ‘돈’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임만영 형사에 따르면 상당수의 절도범죄가 경제적인 목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에 비춰볼때 이들의 범행동기는 상당히 특이하다. 이들은 내로라하는 강남 부유층의 자녀로 경제적인 어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20대 후반에 이르도록 특별한 직업이 없던 이들은 ‘부모’를 잘 둔 덕에 생활에 지장도 없었으며 급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놀랍게도 이들의 범행동기는 범행을 하면서 느끼는 ‘스릴’ 그 자체에 있었다. 그리고 범행으로 마련한 돈은 유흥비 및 쇼핑 등으로 탕진했다. 임 형사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한차례 범행을 저지른 이들이 잘못된 성취감에 빠져들었던 것이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범행이 성공할때마다 묘한 스릴과 통쾌함, 성취감 등을 느끼며 자신들의 행위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비정상적인 자아도취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 경찰측의 설명이다.실제로 주범 박은 “2003년 11월쯤 호기심에 플라스틱 자로 차량의 문을 땄는데 쉽게 문이 열려 친구를 끌어들였다. 하면 할수록 재미를 느껴 좀처럼 그만둘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한주라도 범행을 거르면 좀이 쑤실정도였다는 이들의 말에 경찰은 경악했다. 이 ‘철없는 왕자’들은 결국 상습전문 털이범의 신세로 전락, 차가운 쇠고랑 신세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임형사는 “남부럽지 않은 가정환경에 있는 이들이 어이없는 이유로 범죄자로 전락했다는 것에 검거의 쾌감보다는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다”며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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