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평(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7월 4일 서울대 강연에서 “양국 국민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전쟁터로 나아갔다.”고 하였다. “400년 전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도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등자룡(鄧子龍) 장군이 함께 전사했다.”고 환기시켰다. “역사상 위태로운 일이 벌어질 때 마다 양국은 서로 돕고 고통을 함께 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 주석의 주장대로 “역사상 위태로운 일이 벌어질 때 마다” 중국이 우리를 도운 건 아니다. 한민족이 중국에 참혹하게 당한 일이 더 많았다. 1400년에 걸친 한*중관계의 손익계산표가 그 같은 불행한 과거를 반영한다. 

1416년전인 서기 598년 수(隋)나라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수륙 30만 병력을 끌고 쳐들어왔다. 침입한 수군은 풍랑*홍수*질병으로 후퇴하였으나 유혈낭자한 전쟁이었다. 14년 뒤 수는 113만의 군대를 동원,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을지문덕 장군의 유도작전에 말려들어 대패하고 철군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한*중전쟁이었다.

당(唐)나라는 한반도를 속지(屬地)로 접수하기 위해 신라와 연합, 660-663년 백제 그리고 668년엔 고구려까지 멸망시켰다. 백제*고구려를 정복한 당은 신라 마저 속지로 다스리려 했다. 여기에 신라는 당군과 처절하게 싸워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땅을 되찾았다. 

1231년-1271년 사이 원(元:몽고)나라는 40년간 고려에 침입, 끝내 항복을 받아냈다. 몽고군이 휩쓸고 간 자리는 유혈이 낭자했고 폐허로 변했다. 고려는 원을 종주국으로 받들어야 했다. 고려는 원에 충성한다는 의미로 왕에게 ‘충(忠)‘자를 붙였다. 충렬왕, 충선왕 등 이 그것이었다. 고려는 원에 금, 은, 곡물, 인삼 등은 물론 심지어 처녀까지 바쳐야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조선조의 왕이 서울을 버리고 도피하는 등 위기에 처하자, 명(明)나라가 군대를 파병, 지원하였다. 시 주석의 말 대로 명의 등자룡 장군이 전사하였다.

명에 이은 청(淸)나라는 조선조 정벌에 나섰고 끝내 조선조 왕은 1637년 한 겨울 눈덮힌 서울 삼전도(송파)에 나가 무릎 꿇고 항복하였다. 이때도 청군이 휩쓸고 지난 지역은 약탈과 살육으로 황폐했다. 조선조는 청을 종주국으로 받들어야 했다. 

1950년 북한의 6.25 기습남침 당시 중국은 군대를 보내 다 망해가던 북한을 살려냈다. 중공군은 한국군과 3년에 걸쳐 처절하게 싸웠다. 중국은 휴전 후에도 북한을 군사*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해도,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발사해도, 천안함을 폭침해도, 연평도를 포격해도, 중국은 시종일관 북한을 엄호하며 끼고돌았다. 

다만 북한이 3차 핵실험을 감행한 후 국제적 대북 압박이 강렬해지자, 중국은 북한 핵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끔 취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제스쳐일 뿐, 근본적인 북한 지지에는 변함이 없다. 중국은 북한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으며 북한에 석유와 식량을 대주고 있다. 중국은 한국의 최다 무역대상국이면서도 군사적으론 잠재적 적대 국가이다. 

시 주석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전쟁터로” “서로 돕고 고통을 함께” 등 과거 혈맹관계를 의도적으로 표출시켰다. 한국을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떼어내 중국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외교적 수사였다. 한반도를 종주국으로 지배하던 청과 원의 시대가 그리운 모양이다.

한국인들은 수나라의 내침으로부터 중공군의 6.25 개전에 이르는 불행했던 과거를 잊지 못한다는 데서 중국을 “서로 돕고 고통을 함께”한 좋은 이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중국은 수없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쳐들어와 도륙(屠戮)질을 했다. 시 주석은 한국인들이 중국에 참혹하게 당했던 1400년 한*중관계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음을 유의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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