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폭력배들의 해외 은신처를 일컫는 이른바 ‘해외 잠수기지’가 또 다시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다. 최근 동남아 일대에서 수년 여간 은신하며 국내 무역업자를 상대로 사기를 친 칠성파의 한 조직원을 적발한 경찰은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폭력조직들의 은신처를 캐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범죄와의 전쟁’ 이후 와해 조짐을 보이던 조직폭력배들이 해외로 도피해 활개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해외를 무대로 조직재건, 연합·연계하며 막대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조직폭력배들의 실상과 해외 잠수기지의 실태를 취재했다.





경찰 "잠수 조직원 신상 파악중"

부산지방경찰청은 최근 인도네시아 법정에서 형을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부산 칠성파 조직원 A씨의 행적을 캐는 데 주력하고 있다. 국내 ‘3대 패밀리’와 함께 ‘4대 조직’으로 불릴 만큼 막강한 파워를 가진 칠성파 조직원의 자세한 신상 파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경찰에 따르면 일단 A씨는 인터넷을 통해 거래를 미끼로 국내 무역업자를 인도네시아로 유인, 납치해 돈을 뜯어낸 후 살해한 혐의. 인도네시아 현지인과 외국인 등과 공모해 국내 관광객이나 해외 무역업자 등을 상대로 범죄행각을 벌인 것이다.

이로써 메이저급 조직의 일원이 국내 감시망을 피해 해외로 도피, 현지에서 범죄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경찰은 보고 있다. 경찰은 그러나 A씨의 이번 사건과 관련, 사기 및 살해 혐의보다 그가 해외로 도피해 적발된 최근까지 수년 동안 해외 은신처에 머물면서 활개치고 다닌 것에 주목하고 있다.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후 해외로 도피한 조폭들이 현지서 은신하며 불법 행위를 ‘밥 먹듯’ 일삼고 다니는 실태를 예사롭지 않게 보고 있는 것이다. A씨의 적발과 관련, 경찰이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조폭들이 주로 동남아를 ‘배후기지’로 삼아 세력확장을 꾀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들이 해외조직과 연계해 다시 세력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범죄와의 전쟁’ 이후 이들 조직이 와해된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히 뿌리를 뽑지 못한 탓에 조직재건이 예상되고 있다.경찰은 그러나 이 정도의 내용만으로 이들을 집중 감시하거나 제대로 수사할 수 있다고 보면 ‘큰 오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재건후 국내 U턴 가능성도

부산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메이저급 조직원이 동남아에서 활개치고 있다는 게 적발됐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들의 동정을 밀착 감시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라며 “이들은 인터폴 공조가 안되거나 출입국 관리가 허술한 나라로 도피하기 때문이다”라고 토로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검찰 수사에 어려움이 따르기는 마찬가지. 검찰은 현재 과거 조폭 출신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사실상 메이저급 조폭 보스 출신들에 대한 수사 자료는 대부분 과거 데이터에서 멈춘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폭세계의 동향에 정통한 한 관계자에 따르면 메이저급 조직의 방계조직 등 이른바 ‘패밀리’를 이루는 조폭들은 동남아 일대에 배후기지를 확보하고 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비교적 치안이 허술하다는 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호남과 수도권 일대 조폭들은 동남아 지역 중에서도 필리핀과 태국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섬이 많아 숨을 곳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권총이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있어 국내 경찰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오진 않을 거라는 이유에서라고. 실제로 지난 2003년 태국에서 손쉽게 권총을 구해 원정 패싸움을 벌이다 부상을 입은 수도권 폭력조직, 청량리파와 신이글스파 등이 경찰에 검거됐다. 이보다 앞선 1998년에는 국내 최대 폭력조직인 범서방파 부두목이 필리핀 마카오 등지서 8년간 숨어 지내며 수십만 달러를 빼돌린 혐의로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유흥 도박판서 이권 챙겨

이들은 한국인의 해외관광과 해외투자가 급증하는 추세에 따라 현지에 도박장을 대폭 확장, 국내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손쉽게 조직자금을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현지에 개설된 도박은 일명 ‘바카라(카지노의 일종)’ 도박판. 이들은 국내에 개설된 차명계좌를 통해 도박꾼들이 돈을 입금하면 선이자를 공제하고 남는 액수만큼 게임 칩을 주거나 현지에서 돈을 빌려준 다음 사후결제 하는 수법으로 거액을 챙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한 사례는 지난 97년 필리핀으로 원정도박을 갔다가 조폭들과 연루, 많은 빚을 지고 2년간 현지에서 생활하며 갖은 고생을 했던 개그맨 B씨가 대표적인 경우다. 조폭 출신이자 유명 연예기획사의 전대표였던 C씨도 2004년 마카오 해외원정 도박에서 수십억 원을 날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폭 결속력 강화 소문도

이들은 현지 유흥업소들을 관리하면서 건설현장, 기업 등을 상대로 위력을 행사, 교민들 간의 이권에도 적극 개입한다고 한다. 물론 이처럼 조폭들이 현지서 종횡무진 활개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업주를 협박해 돈과 주식 등을 강탈하고 이권을 위해 해외원정 폭력도 예사로 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그 수법이 지능화돼 합법적인 기업을 차리고 ‘연합·연계 활동’으로 결속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검·경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경찰은 “최근 국내외 조폭들이 다른 적대적인 조직과 싸운다는 것은 이제 옛말”이라며 “이들은 조폭이라는 게 확인되기만 하면 국내파, 해외파 할 것 없이 모두 뭉치는 양상을 띠고 있다”고 요즘 추세를 전했다. 싸우지 않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낫고, 조직원들도 다치지 않으니까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다.

인도계약 미체결로 수사 어려워

문제는 폭력조직의 ‘해외 거점’이 국내 조폭들의 ‘활동 자금’을 벌어들이고 ‘세력 확장’의 창구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해외도피 사범의 ‘안전한 도피처’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경찰은 청부살인, 청부폭행 등 강력범죄를 저지른 범죄자 중 일부가 폭력조직의 해외 도박장 등에 몸담으며 은신, 안전한 도피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후 일찌감치 해외로 잠수하거나 여권 위조 등의 방법으로 수사진을 따돌리고 해외로 도피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해외로 도피한 조직폭력배들은 불법체류자로 숨어 지내기 때문에 그들의 소재파악이 어렵다.

또 그들은 과거 여러 차례에 걸쳐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생활을 한 경험이 있어 은신처를 수시로 바꿔 검거하는 데 많은 시간과 어려움이 따른다. 이에 대해 경찰은 “게다가 범죄수사 공조나 인도계약이 체결되지 않아 수사에 어려움이 많다”며 “때문에 강력범죄 피의자가 수사진을 따돌리고 일단 해외로 도피하게 되면 기소 중지되는 게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특히 마약 등 ‘목돈’이 되는 사업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고 있는 조폭들의 동향 파악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마이너 조폭은 중국이 거점

현재까지 경찰이 파악한 바에 의하면 대부분 메이저급이 아닌 마이너급 조폭들은 중국이나 일본 등에 건너가 마약 밀매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당국의 엄격한 관리 감독으로 최근에는 비교적 관리가 허술한 태국 등 동남아 지역으로 건너가 현지 주민과 국내 관광객 등을 상대로 마약 밀매를 하고 있다고 한다. ‘범죄와의 전쟁’으로 구속되었던 폭력배들이 그 후 대부분 출소해 활동을 재개하고 있는 것도 경찰이 예의주시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아직 이들의 이렇다할만한 움직임은 뚜렷이 보이지 않고 있는 상태다. 경찰은 “폭력조직 중 일부가 해외거점을 무대로 암암리에 조직 재건을 꾀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예의주시하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 부산 검·경 ‘조폭과의 전쟁’ 선포“조폭도시 부산 오명 벗겠다”


‘범죄와의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 중이다. 1990년 선포 이래 사실상 소강상태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범죄와의 전쟁’이 최근 부산에서 잇따르는 조직폭력배 사건으로 인해 다시 도마 위에 오른 것. 부산지검과 부산경찰청은 지난달 19일 ‘조직폭력배와의 전쟁’을 선포, 근절 대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는 올 들어 부산에서 영락공원 조폭 난동(1월 20일), 국내 유명가수 콘서트 뒤풀이 습격(2월 25일) 등 조폭들의 ‘잦은’ 도발에 검·경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검·경은 최근 이뤄지고 있는 폭력배들의 세대교체에 대응해 조폭 관리 체계와 실태 파악을 처음부터 재검토하는 등 신흥 조직폭력배에 대한 관리도 강화키로 했다.

특히 폭력조직의 ‘자금원’ 역할을 하는 사행성 오락실과 사설 경마장, 아파트 재건축, 유통업 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단속해 조폭의 ‘서식기반’ 자체를 제거하겠다는 방침이다. 폭력조직이 운영하는 업소나 유흥업소 관계자들과 폭력조직의 연계성에 대한 확인 작업도 병행한다. 이를 통해 철저히 단속을 실시해 조폭범죄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계획이다. 2001년부터 부산에서는 조직폭력 범죄행위로 해마다 150~200명이 적발, 이 중 100명 안팎이 구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올해는 4개월여 만에 152명이 적발, 이 중 72명이 구속됐다. 현재 조직폭력배와 관련, 여러 사건들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는 게 경찰의 시각이다. 부산지검 마약·조직 범죄수사부의 한 관계자는 “조폭 범죄에 검·경의 수사 역량을 모아 소탕하겠다”며 “부산이 조폭도시라는 오명을 벗기는 데 힘쓰겠다”고 임하는 각오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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