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재임 2.6년 파리 목숨?

2000년 이후 30대 그룹 상장사 최고경영자 평균재임 2.6년
여성이 남성보다 자리에서 일찍 밀려나, 외부 영입률도 높아

금융 박종원, 유통 이승한, 식음료 장인수 등 장수 인물
전문경영인의 무덤 흥국화재·피죤 등 채 1년도 못 채워

[일요서울 | 특별취재팀] 흔히 대기업 사장님이라고 하면 마냥 부러운 존재로 여긴다. 호화로운 생활이 가능한 연봉을 받고, 사회적 위치 역시 급격하게 상승되다 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그들 역시 계약직이라는 점은 오히려 단점에 가까워 보인다. 한마디로 언제 해고당해도 이상할 바 없는 파리 목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도 장기 집권하는 최고경영자(CEO)는 누가 있으며 계약직의 운명을 바꾸지 못하고 단명한 CEO는 누가 있을지 [일요서울]이 알아봤다.


기업경영성과 평가사이트인 CEO스코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기업들 사이에서도 CEO들의 수명은 다채롭게 나타났다. 국내 30대 그룹 CEO 중 대우조선해양의 CEO 수명이 가장 길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경영성과 평가사이트인 CEO스코어가 2000년 1월 1일 이후 신규 선임됐다 퇴임한 30대 그룹 상장사의 CEO(오너 일가 제외)의 재임기간을 조사한 결과, 총 576명의 CEO가 평균 2.63년 재임한 것으로 나타났다.

30대 그룹 상장사 CEO 평균 재임기간이 가장 긴 곳은 대우조선해양이었다. 그룹 내 유일한 상장사로 올라있는 대우조선해양은 2000년 이후 선임된 CEO가 2명이었고 평균 임기는 5.34년으로 각각 4.61년과 6.07년이었다.

동국제강 3.98년을 기록해 2위에 올랐고, LG가 3.94년, OCI 3.74년, 한진 3.38년 순으로 뒤를 이었다. 그 외에는 신세계가 3.35년, 대림 3.24년, LS 3.23년, 현대백화점 3.22년, 현대중공업 3.20년, 대우건설 3.09년 등이 상법상 등기임원 임기 3년 이상을 채우는 모습이었다.

반대로 효성은 재임기간이 다소 짧았다. 효성은 5개 상장 계열사에서 17명의 전문경영인이 평균 2.4년 재직한 것으로 조사됐다. 17명의 CEO 중 14명이 3년도 채 채우지 못했다. 미래에셋과 CJ 역시 1.79년과 1.97년으로 단명한 축에 속했다.

또 30대 그룹 576명의 역대 CEO 중 3년 임기(상법상 임기)를 채우지 못한 인사는 367명으로 전체의 63.7%였다. 1년도 못 돼 그만둔 CEO도 6명 중 1명꼴인 102명으로 17.7% 수준을 차지했다.

이와 관련해 CEO스코어는 “CEO 재직기간은 한 회사를 기준으로 계산했다”며 “취임과 퇴임일자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경우는 정기보고서(사업·분기)상 대표 등기 시점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또 다른 조사 결과에서는 여성 CEO들이 남성 CEO들보다 자리에서 일찍 밀려나거나 사내보다는 회사 외부에서 영입될 가능성이 크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컨설팅 회사인 스트래티지&가 세계의 주요 상장기업 2500개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나타났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한 데 따른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남성 CEO는 10명 중 3명 미만 꼴로 자리를 떠났지만, 여성 CEO의 경우 5명 중 거의 2명이 물러났다. 남성과 여성 CEO 간에 10%포인트 이상 차이가 나는 셈이다.

연구의 공동저자인 퍼-올라 칼슨은 “모든 것을 고려해보면 여성 CEO를 희망하는 기업은 더 많은 위험을 안게 될 가능성이 있고, 몇몇 사례에서 그 위험은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또 보고서는 통신산업의 CEO들이 빨리 변화하는 업계 속성상 가장 빈번히 바뀌고 있으며, 기업들은 점차 CEO 직책과 회장 직책을 함께 맡기기보다는 분리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렇듯 CEO라는 자리는 현재 장기집권과 단명의 사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남성과 여성, 각 업종별로 특색 있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추세인 것이다. 과연 빠르게 변모하는 시대에서 살아남은 CEO는 누가 있을까.

대표적인 업계와 인물 몇 명을 꼽자면 우선 금융권 CEO들이 있다. 연임의 성공과 보험업계 장기집권 시대를 열었던 인물 들이다. 우선 박종원 코리안리 전 사장(현 고문)은 보험사를 통털어도 나오지 않았던 전무후무한 5연임 신화를 쓰게 된다.

실적이 곧 밥줄

회사채 보증보험 실적 악화로 파산 직전에 몰렸던 회사를 맡아 고강도 자구노력과 혁신 끝에 지난해 매출 4조2000억 원, 순이익 790억 원을 달성한 그의 경영 능력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서진원 신한은행장도 신한생명 출신이다. 서진원 은행장이 신한생명 사장으로 취임하던 해가 2007년임을 감안하면 벌써 7년째 금융권에 머물고 있다. 특히 당시 1342억 원이던 신한생명의 순이익은 2008년 1482억 원으로 늘더니 다음해는 1900억 원에 달했다. 때문에 그의 연임과 장기집권에는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2007년 LIG손해보험 사장으로 취임한 김우진 LIG손해보험 부회장은 수익성과 성장성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가 아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푸르덴셜생명 황우진 사장도 2005년부터 대표직을 맡고 있으며 미국 본사의 신뢰가 두터워 앞으로도 장기 집권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더불어 임종룡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이 장기집권의 후발 주자로 나서고 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모피아(옛 재무부의 영문 머리글자 MOF와 마피아의 합성어) 출신이라는 지적과 함께 금융권에서 “얼마 못가지 않겠냐”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신동규 전 농협금융 회장이 임기 1년 만에 농협중앙회와 마찰을 빚고 자진사퇴하면서 “농협금융은 제갈공명이 와도 안될 것”이라고 했던 것과도 맞물렸다. 그러나 임종룡 회장은 선임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임종룡 식의 인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내부조직을 안정화하고 6개월 뒤에 증권업계 1위인 우리투자증권 패키지(우리투자증권·우리아비바생명·우리금융저축은행) 인수에 성공하면서 장기집권의 포석을 깔아놓은 상태다.

시선을 조금 더 다양하게 돌리면 올해로 62세인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이 눈에 들어온다. 2005년 1월초 LG생활건강 대표이사를 맡은 후 9년째 최고경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2~3년을 채 못 채우고 단명하는 여타 대기업 CEO와 분명하게 대조되는 모습이다.

차석용 부회장은 1998년 쌍용제지 사장을 시작으로 P&G한국총괄 사장, 해태제과 사장 등을 거쳐 LG생활건강까지 올해로 17년째 전문경영인의 길을 걷고 있다. 차석용 부회장은 남다른 재테크 수완으로 CEO와 차별화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울러 유통업계 최장수 CEO 홈플러스의 이승한 회장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최근 모든 직위를 내려놓으면서 험난했던 한국 대형할인점 시장에서 15년간의 장기집권이 막을 내리긴 했지만 업계 입지전적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승한 회장은 “그동안 쉼표없이 살아오면서 미처 돌보지 못했던 건강을 회복하고 가족과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지고 싶다”면서 사퇴 이유를 밝혔고, 홈플러스는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승한 회장의 의지가 강해 사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전한 바 있다.

이 회장은 홈플러스가 설립된 1999년 삼성테스코홈플러스 대표이사 사장직을 맡아 출범 당시 점포 수 2개로 시작했으나 점포수 106개로 50배 이상 키웠고, 매출액 10조원에 육박하는 할인마트 업계 2위 기업으로 성장시킨 이력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또 빠질 수 없는 인물은 장인수 오비맥주 사장이다. 주류업계에 발을 들여 놓은 지 30년이 훌쩍 지난 장인수 사장은 고졸 출신 CEO로 유학파 CEO가 넘쳐나는 요즘 다른 대기업 CEO와 비교하면 학력은 뒤쳐진다.

그러나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만년 2위 자리를 맴돌던 오비맥주를 대한민국 최고의 맥주회사로 우뚝 세운 전문경영인이 바로 장인수 사장이기 때문이다.

장인수 사장은 고졸 출신의 영업달인이라는 의미의 ‘고신영달’에서부터 ‘고졸 신화’ ‘대박 CEO’ ‘역전의 명수’ 등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AB인베브가 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KKR)로부터 오비맥주를 58억 달러(6조1700억 원)에 다시 매입하면서 장인수 체제를 공고히 해준 것은 그의 장기집권을 공표했다는 상징으로도 보인다.

이처럼 대표적인 장기집권 CEO들의 모습을 봤을 때 CEO의 수명은 결국 실적이 좌우한다는 점이 확실하게 보인다. 공통적으로 장수 CEO들은 양호한 실적으로 오너나 주주들을 만족시켰다는 설명이다.

실수는 곧 퇴직

반대로 대기업의 사장은 되기도 힘들지만 지키는 것도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도 많았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기업별로 살펴보면 롯데그룹 계열의 호남석유화학 CEO의 평균 재임기간이 12.5년으로 가장 길었다. 이어 삼성생명(6.7년), LG디스플레이(6.7년), 롯데쇼핑(6년), 삼성중공업(5.8년), 대한항공(5.6년), 삼성엔지니어링(5.3년), LG화학(5년), GS글로벌(5년) 순으로 재임기간이 길었는데 대표이사 평균 재임기간이 5년을 넘긴 곳은 9개사에 불과했다.

대표이사의 평균 재임기간이 가장 짧은 곳은 SK브로드밴드로 겨우 1.1년에 불과해 거의 매년 CEO가 바뀐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제철(1.2년), GS그룹 계열의 삼양통상(1.3년), 에스원(1.4년), 롯데미도파(1.6년), GS그룹 계열의 코스모화학(1.7년), SK이노베이션(1.7년), 포스코그룹 계열의 대우인터내셔널(1.7년), 현대글로비스(1.8년), 한화손해보험(1.8년), 롯데손해보험(1.9년), LG생활건강(1.9년)등 재임기간이 2년을 채우지 못한 기업도 12곳이나 됐다.

특히 서경석 GS 전 대표, 김형벽 현대중공업 전 대표, 구태환 기아자동차 전 대표 3명은 모두 8일 만에 대표이사에서 물러나 가장 단명한 CEO로 불린다.

더 나아가 CEO들의 무덤으로까지 불리는 회사도 있다. 태광그룹의 보험계열사인 흥국화재와 오너리스크로 유명한 피존이 그 주인공이다.

흥국화재는 지난 2006년 쌍용화재를 인수한 이후 4년간 총 5명이 교체됐다. 평균 임기가 채 1년도 안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보험계열사인 흥국생명의 대표이사 역시 비슷한 시기 5년간 6명이나 교체된 바 있다.

흥국화재는 지난 2006년 쌍용화재 인수 단장으로 실무를 진두지휘한 오용일 태광산업 부회장이 초대 대표이사로 선임됐지만 1년여가 끝이었다. 후임에는 황서광 당시 흥국생명 상무가 승진해 대표이사로 선임됐으나, 불과 4개월 만에 중도하차했다. 내부출신인 예가람 저축은행의 이종문 대표도 4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사임했다.

더 심한 곳은 피죤이다. 피죤은 조원익 사장이 지난해 퇴임한 것을 포함해 2007년 이후 외부 영입한 4명의 전문경영인 사장들이 조기 퇴진 행렬을 이었다.

피죤 사장들의 재임기간을 살펴보면 그나마 조원익 사장이 9개월로 최장 기간 사장을 지냈다. 김준영 전 사장(2007년 8월~2008년 3월)은 7개월, 김동욱 전 사장(2008년 6~8월)은 2개월, 유창하 전 사장(2010년 2~5월) 역시 3개월만 사장 자리에 머물렀다. 이윤재 회장의 폭행과 배임 등 피죤 사태가 세상에 알려진 계기가 됐던 인물인 이은욱 전 사장은 4개월 만에 떠났다. 나머지 기간은 공석으로 비워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매우 조용히 이루어 졌다.

이를 두고 업계에선 “경쟁사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회사의 좋지 않은 이미지를 우려했다”는 해석이 공공연하게 나돌기도 했다. 당시 피죤은 이 회장의 청부폭행, 배임, 횡령 등 각종 스캔들로 회사 이미지가 땅에 떨어져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또 일각에선 “이 회장이 아직도 전근대적 색채를 띠는 본인 위주의 경영 방식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사장들의 잦은 퇴임은 이 회장과의 마찰이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등 비판의 목소리도 흐른 바 있다.

파리 목숨 CEO들은 회사에 갑자기 불어 닥친 역풍을 막지 못한 책임, 실적 하락이나 오너와의 마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자리를 잃었다. 회사원들 사이에서 임원은 파리 목숨이라고 속설로만 나돌던 것이 현실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다.
ilyo@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