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한국인가 북한인가’ 탈북민 내 계층구조 나뉜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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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통일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9월 말 기준, 국내에 입국한 탈북민은 3만3718명이다. 이 중 여성은 전체 72%(2만4291명)를 차지한다. 2006년 이후 탈북 여성의 비율은 단 한 번도 70% 이하를 기록한 적이 없다. 매년 70~80%를 웃돌고 있는 수준이다. 여성 비율 증가에 따라 예기치 못한 문제도 생겨났다. 그중 하나가 탈북 여성들에게 공공연하게 가해지는 ‘성폭력’이다. 최근 탈북민 관련 업무를 맡은 수사·정보기관 관계자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해 고발한 사례가 있었다. 일요서울 취재를 종합하면 이들뿐 아니라 권력을 가진 일부 탈북 남성들로부터 ‘권력형 성폭력’을 당하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 당해도 여성 탓만 하는 풍조 재현
가해 남성들 ‘꽃뱀’이라 헛소문 내기도

탈북 여성 S씨는 최근 몇 차례 자살기도를 했다. 4년 전부터 겪은 끔찍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S씨는 남자친구에게 탈북 단체장을 맡았던 한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이야기를 들은 그의 남자친구는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며 ‘성폭행을 한 사람이 잘못’이라는 문제의식을 일깨워줬다. 그는 더 이상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피해 당한 여성들에게 직접 연락해 함께 연대하자고 했다. 하지만 피해 여성들은 ‘결혼을 해야 해서 안 된다’고 하거나 피해를 당한 것을 알고 피해 사실을 물어도 ‘성폭력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 권력을 가진 탈북 남성들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당하는 여성들은 있었지만 다들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걱정돼서 혹은 어떤 그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몰라 무서워서 말을 못 하는 것”이라며 “특히 힘 있고 돈 있는 이들이 가해자인 경우는 입을 더 다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말이라도 해 보고 싶은데 무서워서 주저한다는 연락도 오고, 할 말이 있지만 더 이상 말은 못 하겠다며 멀리서 힘 내라는 응원만 보내는 여성들도 많다”고 덧붙였다. 

탈북 여성들의 삶을 장악하는 ‘권력자’

S씨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 정착한 3만 명의 탈북민 사회는 북한식 계층구조가 재현되고 있다.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것처럼 탈북 여성들에게 성폭력이 행해지더라도 상대가 ‘권력’을 가진 ‘남성’이기에 더욱 말할 수 없는 구조다. 가해자 중 일부 탈북 남성은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거나 평양에서 살며 당에서 일한 배경이 있는 집안 출신인 경우도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한국에서도 그들의 권력이 그대로 이어져 상대적으로 힘없는 탈북 여성들에게 성폭력으로 가해지는 셈이다. 

이와 관련 한국 사회 정착 10여년 차인 한 탈북민은 “자신이 가진 돈과 배경 등을 무기로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들에게 협박이나 강압을 하는 행동이 이어지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라며 “이런 이야기는 알게 모르게 퍼져 있지만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주변에 알리지 않고 드러내지 않는 이유가 분명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양태정·전수미 굿로이어스 변호사가 탈북 여성을 장기간 성폭행한 현직 경찰 간부를 강간과 유사강간 및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의 혐의로 고소하기 위해 지난 7월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증거자료를 제시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양태정·전수미 굿로이어스 변호사가 탈북 여성을 장기간 성폭행한 현직 경찰 간부를 강간과 유사강간 및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의 혐의로 고소하기 위해 지난 7월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증거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도움의 손길’ 요청도 쉽지 않아

여성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를 입은 탈북 여성들 가운데 ‘주위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대답한 경우는 9.7%였다. 심지어 ‘그냥 당하고 있었다(12.9%)’거나 ‘무조건 빌고 애원했다(11.3%)’ 등 소극적 태도를 보인 사례가 더 많았다. 

탈북 여성들이 이 같은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도 외부로 사실을 알려 도움을 요청하거나 신고하길 주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랫동안 몸에 밴 ‘북한 식 사고방식’ 탓이 크다. 북한은 전근대적인 남성우월주의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어 남성이 여성보다 지위가 높다는 인식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성폭력이 발생하더라도 오히려 피해자인 여성을 탓하는 풍조가 짙다. 

탈북 여성을 지원하는 굿로이어스 공익제보센터 전수미 변호사는 일요서울과의 통화에서 “북한에서는 모르는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해도 주변에선 ‘여자가 문란해서 그렇다’고 반응할 게 뻔해 당했다는 사실도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며 “한국에 정착해서도 이런 정서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권력을 가진 남성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탈북 여성들이 전화로 혹은 직접 상담을 요청하는 건수는 많지만 실제로 고소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현저히 적다”며 “고소하면 피해자들의 인적사항이 ‘탈북민 커뮤니티’를 통해 금방 소문으로 퍼진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 정착한 뒤에도 이 같은 기존 북한식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공고하게 유지되는 ‘탈북민 커뮤니티’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전 변호사는 “북한에서 온 분들이 아직 북한식 정조 관념이 남아 있기 때문에 커뮤니티 내에서 준강간을 당한 사실이 알려지게 돼도 ‘여자가 어떻게 행동을 했길래 그러냐’는 반응이 나오기도 하고, 스스로 몸이 더럽혀졌다는 생각이 들거나 소문이 나버리면 커뮤니티 안에 계속 있을 수 없다”며 “주위에서 손가락질을 받고 떠나야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가족이나 형제·자매가 같이 오지 않은 경우엔 그런 부분들이 더욱 두려워 가슴에 묻고 사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가해자들이 피해 여성들의 사회 정착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기도 한다”며 “피해 여성들을 두고 ‘돈을 뜯으려고 한다’ ‘꽃뱀이다’라고 헛소문을 내는 방식으로 몰아세우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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