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700년 된 화양동 느티나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수령 700년 된 화양동 느티나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이번 탐방은 광진구이다. 모두 세 편으로 연재한다. 첫째 편은 화양동의 화양정(華陽亭)과 그 부근이다. 두 번째는 어린이대공원, 세 번째는 어린이대공원에서 낙천정(樂天亭)까지이다. 전체 코스는 바삐 가면 버겁기는 하지만 8시간 정도 소요된다. 주마간산(走馬看山)하기 아쉬운 곳들이라 쉬엄쉬엄 갈 수 있도록 3편으로 나누었다.

화양정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화양정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세종과 명장 최윤덕이 세운 화양정

 출발점은 지하철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이다. 4번 출구로 나간다. 120여 미터 곧바로 가다가 보면 오른쪽으로 ‘화양동 주민센터’로 가는 길이 나온다. 80미터 정도 가면 앞에 느티나무가 보인다. 어린이대공원역에서 10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다.

 느티나무 주변이 화양정이 있던 곳이다. 이 ‘화양정’에서 ‘화양동’이란 지명이 유래했다. 느티나무가 있는 곳은 현재는 ‘화양동 느티나무 공원’이다. 공원에는 가장 큰 이른바 ‘화양동 느티나무’를 포함해 모두 8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다.

 ‘화양동 느티나무’는 지금은 옛날에 화양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이다. 또 조선의 건국부터 현재까지 우리의 역사와 삶을 지켜본 살아있는 역사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서울시 기념물 제2호로 수령이 약 700년이다. 높이 28미터, 가슴높이의 둘레 7.5미터이다. 공원 안에는 다른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도 있다. 지정 당시 311년, 2021년을 기준으로 하면 326년 정도 된 나무이다. 안내판에 있는 주소를 보면, ‘화양동 느티나무’와 주소가 다르다. 이는 이 공원이 몇 개의 지번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화양정 터’ 표석은 어린이대공원역에서 올 때를 기준으로 하면 공원 입구 왼쪽에 있다. 표석에는 “화양정은 사복시의 말 목장 안에 있던 정자로, 1432(세종 14년))에 세워져 군사훈련, 사냥, 계회(契會) 등에 이용되었다. 1911년 낙뢰(落雷)로 소실되었다”고 나온다.

 공원 안에는 화양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다른 안내판도 있다. 그런데 이들 안내판에는 중요한 사실이 몇 가지 빠져 있다. 이 일대에 고종의 후궁이며 의친왕 이강의 어머니 귀인 장씨 묘소가 있었다는 것, 또 그 아래 ‘부군할머니 신당’, ‘신석기 시대 움집’이 있었다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아서인지, 몰라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공원 안 안내판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

 ‘화양정 느티나무’가 있는 곳 자체가 언덕이나 가까운 곳은 빌라나 건물로, 먼곳은 높은 빌딩 등으로 동서남북이 다 가려 있다. 그래도 서남쪽 한 곳은 조금 트여 있어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조선 시대라면 한강을 포함해 사방이 다 보여였을 듯하다. 넓은 들판과 함께 풍경도 아주 좋았을 듯하다. 「진헌마정색도(進獻馬正色圖)」에는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진헌마정색도(進獻馬正色圖) (출처 : 위키백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진헌마정색도(進獻馬正色圖) (출처 : 위키백과)

 ‘화양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한성부(漢城府)」에는 그 유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유사눌(柳思訥, 1375~1440)의 기문(記文)에, “화산(華山)의 동쪽, 한수(漢水, 한강)의 북쪽에 들판이 있다. 토지는 평평하고 넓다. 길이와 넓이가 각각 10여 리이다. 여러 산이 둘러싸고 내와 못이 구불구불하다. 우리 태조(이성계)가 도읍을 정할 처음, 이곳을 목장으로 삼았다. 임자년(1432, 세종 14년)에 주상 전하(세종)가 사복 제조 판중추원사(司僕提調判中樞院事) 최윤덕(崔潤德)과 이조참판 정연(鄭淵) 등에게 명하여 정자를 낙천정(樂天亭) 북쪽 언덕에 짓게 했다. ……

내가 들으니, ‘천하의 누(樓)․대(臺)․정(亭)․사(榭)에 모두 그 이름이 있는데, 홀로 이 정자에 이름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고, 이어서 「주서(周書)」에 있는 ‘말을 화산의 남쪽 기슭으로 풀어 보낸다(歸馬于華山之陽, 귀마우화산지양)’는 뜻을 따서 이름하기를 ‘화양’이라고 했다. 생각건대,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께서 하늘에 부응하고, 사람에 순종해 집을 고쳐 나라를 세웠다. 역대 임금이 서로 이어가며 군대(武)를 쉬게 하고, 학문(文)을 닦으며 말을 풀어 보내고 소를 풀어 기르니 바로 그 시절이다.”

 태조가 서울에 도읍을 정한 뒤에 광진의 들판에 목장을 설치했고, 세종이 정자를 세우라고 했는데, 정작 이름이 없어서 유사눌이 이름을 지었다는 내용이다. 화양정을 세운 인물 중 최윤덕(1376~1445)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명장이다. 대마도 정벌 작전에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참전해 승리했다. 또 압록강변 4군 개척에 김종서(金宗瑞, 1383~1453)와 함께 참전해 승리했다. 함경도 방면으로 출전해 여진족을 정벌했던 세종이 가장 신뢰했던 장수이다.

 화양정에는 세종과 명장 최윤덕의 마음과 혼이 담겨있다.

 김영상은 『서울육백년(5) – 한강‧한강유역』(대학당, 1996년)에서 “이 기문에 인용한 ‘말을 화산 남쪽으로 돌려 보낸다’라고 한 글귀는 이곳의 지리에 꼭 맞는 말이다. 서울의 북한산이 곧 화산이요, 그 남쪽이 바로 살곶이벌인 것을 보면 북한산 남쪽 양지바른 살곶이가 아닌가. 높직한 언덕 위에 앉은 화양정은 말떼들이 넓은 들을 누비며 풀 뜯는 정경이 훤하게 바라다보이는 정자였다.”라고 화양정 이름의 의의를 높게 평가했다.

 평화를 꿈꾼 세종과 이순신

 유사눌이 이름을 지을 때 근거한 책이 「주서(周書)」라고 했는데, 이는 정확히 말하면, 『서경(書經)』에 들어있는 주(周) 나라 역사 부분이다. 특히 유사눌이 인용한 문장은 주 무왕(武王)이 폭군 상(商)나라 주왕(紂王)을 무력으로 멸망시킨 뒤에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면서 “말은 화산의 남쪽 기슭으로 풀어 보내고(歸馬于華山之陽), 소는 도림(桃林)의 들에 풀어 놓아라(放牛于桃林之野)”라고 한 이야기에 나온다. 유사눌은 앞부분의 문장에서 ‘화양’ 두 글자를 취해 ‘화양정’이라고 명명했다. 화양정 일대는 말을 키우는 목장이었기 때문에 앞부분의 ‘화양’을 사용했던 듯하다.

 이 문장은 주 무왕이 평화를 열망하는 뜻이 담겨있다. 고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라고도 볼 수 있는 말과 소를 무기가 아니라 평화로운 자연 상태로 되돌려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실록』이나 다른 기록을 보면, 유사눌이 지은 ‘화양정’에 대해 거부하거나, 비판하는 기록은 전혀 없다. 또 유사눌이 지은 그대로 ‘화양정’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세종 역시 유사눌이 지은 뜻에 공감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세종이 태조가 만든 ‘나라 목장’ 위 언덕에 화양정을 짓게 한 이유도 유사시를 대비해 말을 키우는 것과 기병 훈련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세종 역시 평화가 유비무환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왕의 위의 문장을 활용해 평화를 염원했던 또 한 사람이 있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다. 『난중일기』에는 특별한 표현이 나온다.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는 한문를 병기하지 않은채 ‘소고기’라고만 나오나, 한문 원문을 보면, 소고기는 ‘도림(桃林)’으로 나온다. 도림은 ‘소’의 다른 한문 표현이다.

 “맑았다. 한산도로 되돌아왔다. 아침을 먹은 뒤, 광양 현감(어영담)과 낙안 군수(신호), 방답 첨사(李純信․이순신)가 왔는데, 방답 첨사와 광양 현감은 술과 안주를 많이 준비해 왔다. 우수백(右水伯, 우수사 이억기)도 왔다. 어란 만호(정담수)도 소고기(桃林) 몇몇 음식물을 보냈다. 저녁에 비가 계속 내렸다.”(1593년 3월 8일)

 이 일기를 보면, 전쟁 중에 이순신이 한가하고 배부르게 술을 마시고, 소고기를 먹은 것처럼 볼 수 있다. 그러나 부하 장수들이 술과 안주를 갖고 찾아오고, 당시에는 같은 계급이었던 전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 1561~1597)가 찾아온 것은 일기에는 명기하지 않았으나, 이날이 이순신의 생일날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기를 쓰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생일을 언급한 적이 없다. 그 시대 다른 사람들의 일기에는 자신들의 생일을 대부분 언급하고 있다. 양반들은 심지어 전쟁 중에도 자신의 생일을 언급하고 소박하나마 잔치 비슷한 것을 했었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아무 기록도 하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이순신 자신의 상황과 자세 때문으로 보인다. 전쟁터에 있고, 자신을 낳아주신 어머니가 여수에 피난 내려와 계셨지만 찾아뵐 수 없는 형편이었다. 수많은 백성과 군사들이 죽고 다치며, 헐벗고 굶주린 상태에서 전라 좌도 수사(水使, 사령관)였던 그가 자신의 생일을 챙기는 것 자체를 스스로 인정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날 일기의 소고기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도림’이다. 그는 소고기를 ‘우(牛, 소)’ 또는 ‘육(肉, 고기)’처럼 쓰지 않았다. ‘도림’이라는 표현에는 그의 진심이 담겨있다. ‘평화’이다. 침략자를 격퇴해 평화를 이루려는 마음이다. 

 「주서(周書)」 속 ‘도림(桃林)’은 지명이었으나, 무왕의 말로 인해 훗날 ‘소’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에서 이 단어를 검색해 보면, 이순신처럼 ‘소고기’로 표현한 사례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소’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나 실제로는 그리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도림’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만큼 절박하게 승리를 통한 평화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세종과 명장 최윤덕이 만들고, 이순신의 마음까지도 연결된 공간이 화양정이다.

 유배 가던 단종이 머물던 곳 

 조선 시대 화양정을 오간 사람들이 많다. 『실록』의 첫 화양정 기록은 수양대군(세조)이 온양에서 돌아오는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愼嬪 金氏, 1406~1464, 정1품)를 화양정에서 맞이했다는 기록이다(『단종실록』 단종 2년(1454) 4월 13일).

 신빈은 조선의 신데렐라와도 같은 인물이다. 본래 내자시(內資寺, 궁궐 안 식품 등을 관리하던 부서)의 여자 노비였다가 세종의 어머니 원경왕후에게 발탁되었고, 이어서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의 궁인이 되었다가 세종의 눈에 들어 후궁까지 되었다. 세종이 죽은 뒤 비구니가 되었던 사람이다. 신빈이 온양에 갔던 이유는 『세종실록』의 여러 기록으로 추정해 보면, 온양온천에서 휴양을 했었던 듯하다.

 두 번째 화양정 기록은 세조가 화양정에 잠시 머문 것과 관련된 듯하고, 세 번째 화양정 기록은 『세조실록』(세조 3년 (1457년) 6월 22일)이다.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 1년) 김종서․황보인 등을 숙청하고 실권을 잡았다. 1455년 단종에게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456년 단종 복위운동인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이듬해인 1457년 마침내 단종을 상왕(上王)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시켰다.

 세조는 단종이 유배를 갈 때 환관(宦官) 안노에게 단종을 화양정에서 전송하게 했다(『세조실록』, 세조 3년(1457년) 6월 22일). 세조 때는 그 뒤로 한 번 더 나온다. 1459년 세조가 왕비와 세자와 함께 군사를 검열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오래 있지는 않고 충량포(忠良浦, 오늘날 중랑천)에 머물렀다.

 이는 세조가 단종을 쫓아낸 뒤 끝내 그를 죽였기 때문에, 단종이 머물렀던 그곳이 불편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 뒤로는 성종 5년에 성종이 화양정에 갔던 기록이 있고, 뜸하다가 연산군 때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왕이 동쪽 교외에 가 농사를 살폈고, 전곶(箭串, 살곶이)에 이르러 학익진(鶴翼陣)을 만들어 사냥을 했다. 화양정에 머물며 승지(承旨)·사관(史官) 등에게 각각 절구시(絶句詩)를 지어 올리게 했다. 또 학익진을 미륵동에 만들게 하고 사냥했다. 궁으로 돌아올 때는 길가의 농민들을 먹였다.”(『연산군일기』, 연산 4년(1498년) 8월 21일)

  이순신으로 인해 유명해진 ‘학익진’이언급된다. 이순신이 학익진을 창안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학익진은 1451년 문종이 직접 저술한 『신진법(新陣法)』에 처음 등장하는 진법이다. 이순신은 육지가 아니라 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쳤기 때문에 특별한 사례이다.

 연산군의 놀이터, 왕릉 행차 길, 명성황후의 도피길

 『연산군일기』에서는 화양정과 관련한 특별히 부정적인 내용은 없다. 그런데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의 『죽창한화(竹窓閑話)』에는 그가 임진왜란 때 만난 97세 된 노인에게 들은 내용이 있다. 그 노인에 따르면, 13살 때 연산군이 전교(箭橋)에 나아갔을 때 역군(役軍)으로 따라갔는데 그때 연산군이 화양정에서 수 많은 기생들과 함께 수백 마리의 말들이 교접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덕형이 들은 기록을 사실과 대조해 보면, 4년의 시간적 오차가 있으나 97세 된 노인이라는 점에서 큰 오류는 아니다. 노인의 목격담은 연산군이 쫓겨나기 직전 시기에 있었던 일로 보인다.

 백성이 본 이야기라는 점에서 연산군 말기의 타락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으나 확언할 수는 없다.

 그 뒤 효종, 영조, 정조 때도 화양정이 언급된다. 군사 훈련 또는 헌릉(獻陵,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 참배 관련이다. 화양정을 거쳐 광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헌릉으로 갔기 때문이다.

 『서울육백년사』(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시, 1987년)에 실린 구전에 따르면, 단종이 화양정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길을 떠나며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뜻으로 ‘회행정(回行亭)이라고 불렀고, 또 고종 19년(1882년) 6월 임오군란 때 민비가 변복을 하고 창덕궁 뒷문으로 나와 충주로 피할 때 화양정에서 잠시 쉬어갔는데, 나중에 민비가 창덕궁으로 다시 돌아가자 사람들이 “정말 화양정이 회행정이 되었다”고 한다.

 『광진의 문화유산 나들이』(건국대학교박물관, 광진문화원, 1998년)에서는 “세종이 직접 화양정이라 이름하게 했고, 사각형 정자로 기둥 둘레가 한 아름이 넘었으며, 내부가 100여칸 이상으로 웅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화양정은 유사눌이 지은 이름이다. 또 같은 책에서는 “(단종이) 이곳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부인과 이별하면서 부인이 꼭 회행(回行)을 기다리겠다고 해서 회행정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나 이는 『서울육백년사』와 차이가 있다. “돌아오겠다”와 “돌아오기를 기다리겠다”의 주체의 차이이다. 어떻거나 화양정에는 단종의 비애가 있다.

 또한 화양정의 파손 시점도 조금 차이가 있다. 『서울육백년사』에서는 1910년 7월, 『광진의 문화유산 나들이』에서는 1911년으로 나온다. 그러나 파손 원인은 낙뢰(落雷)로 같다.

 화양정과 단종, 화양정과 민비의 이야기 속의 ’회행‘은 모두 정상적인 돌아옴을 바라는 표현들이다. 단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민비는 돌아와 명성황후가 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비참하게 죽었다.

 화양정은 조선 국방의 근간인 목장이 있던 곳에 설치된 정자이다. 한편으로는 강한 나라를 만들려는 의지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왕들의 휴식공간이기도 했다. 또 때로는 귀양길과 도피길에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 무엇보다 화양정은 세종의 바람과 달리 그의 후예들에 의해 제대로 그 뜻이 수행되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듯 모든 것은 변한다. 그 방향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지금은 느티나무 만 조용히 서 있으나, 세종과 최윤덕의 화양정에서 그들의 꿈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귀빈 장씨 무덤이 있던 곳(느티나무 뒤 흰색 빌라 지역)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귀빈 장씨 무덤이 있던 곳(느티나무 뒤 흰색 빌라 지역)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화양정에 있던 의친왕 이강의 어머니 귀인 장씨 묘소

 『화양동 지역의 지명유래와 설화』(광진문화원 향토사업분과, 광진문화원, 2002년)에 따르면, 화양정 터가 있던 이곳은 구한말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1877~1955)의 어머니 귀인 장씨(貴人 張氏, 본관 덕수)의 묘소, 의친왕의 세 번째 부인이 살던 큰 집이 있었다고 한다. 장씨의 묘역에 대해 양경태 화양동 자치지원관은 묘역이 “화양동 느티나무 아래 흰색 빌라가 있는 곳”에 있었다고 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묘소는 1965년 도시개발로 인해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권역 내로 이장되었다가 2009년 6월에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권역 내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묘소와 큰 집 모두 아무런 흔적이 없다. 주변에는 빌라만 가득하다. 

 귀인 장씨에 대한 기록은 희소하다. 『역주 매천야록』(황현 지음, 임형택 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년)에는 귀인 장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야사(野史)이나 정사(正史)가 말하지 못하는 내용이 있어 참고할 만하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세자(순종황제)는 타고난 고자 또는 발기불능의 병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명성황후는 미워했던 이강에 대해 마음을 바꿔 그가 아들을 낳으면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강이 태어났을 때 명성황후는 칼을 들고 귀인 장씨의 처소에 찾아갔다.

 “창문에 칼을 꽂으며, ‘칼을 받으라’며 소리쳤다. 장씨는 본래 힘이 센 사람이라 한 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창문을 밀고 나가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였다. 쪽진 머리가 흩어져 구름처럼 드리워 얼굴을 가렸다. 명성후는 가여운 생각이 들어 칼을 버리고 웃으며 말하기를, ‘대전(大殿, 임금)이 어여뻐 할 만하구나. 지금 죽이지는 않겠다. 그러나 너를 궁중에 있게 할 수 없다’하고는 역사(力士)를 불러 포박하고 음부의 양쪽 살을 베어낸 다음 떠메서 밖으로 내보냈다. 장씨는 그의 형제에 의지해 십여 년을 살다가 그 상처로 고생 끝에 죽었다”(『역주 매천야록』).

 같은 책에는 명성황후의 다른 질투 사례도 있다. 황주 기생이 대궐 잔치에 뽑혀 왔다가 고종이 가까이하자 명성황후는 그녀를 죽이게 했다. 또 명성황후가 사망한 뒤 왕비가 되는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가 상궁이었을 때 고종이 아끼자 명성황후가 죽이려 했으나 고종이 간청해 살려주었다고도 한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귀인 장씨는 본래 궁인(宮人, 궁녀)이었다. 궁녀 출신이었고, 이강이 1877년에 태어난 것, 명성황후가 내쫓았다는 기록으로 보면, 귀인 장씨는 명성황후 생전에 사망했던 듯하다. 그런 까닭으로 묘소 조차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듯하다.

의친왕 이강 사진(『순종국장록(純宗國葬錄)』, 조선박문사, 1926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의친왕 이강 사진(『순종국장록(純宗國葬錄)』, 조선박문사, 1926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이강과 사라진 고종의 예치금

 그녀의 아들 의친왕 이강은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으나, 다른 왕족과 달리 최소한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고민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려고 했었다. 『대동단실기』(신복룡, 선인, 2003년)에 따르면, 그는 명성황후와 계비 엄비의 차별 속에서 지내면서 방황을 했다. 또 총독부 경무국 미와 경부(三輪和三郞 警部)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감시했다. 그런 중에 감시망을 뚫고 1919년 11월 서울에서 탈출해 상해임시정부로 망명을 추진했다. 수색역에서 출발해 중국 안동역에 도착했으나 체포되어 돌아왔다. 그 사건이 대동단에 의한 이강 망명 추진 사건이다. 이 때 일제의 조선 고등계 경찰 김태석은 이강 체포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그는 불과 두어 달 전에는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姜宇奎, 1859~1920) 의사를 추적해 체포한 최악의 친일경찰이다. 그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신복룡 교수는 이강이 망명하려 할 때 고종이 물려준 상해에 있는 독일은행에 예치된 25만불의 예금 증서가 사라졌으나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나라가 망하고, 이강과 대동단원이 체포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한국민족운동사』(조지훈, 나남출판, 1996년)에서는 대동단 사건에 대해 “이강 공은 국치 후 방일(放逸)하여 항상 외유(外遊)를 뜻하였는바,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공을 탈출시켜 상해 임정운동에 옹립하면 유림은 물론 국내외에 크게 성가가 오르리라 하여 이를 획책하던 중 전기(前記) 대동단의 전협 등에 의하여 1919년 11월 9일 오후 10시 드디어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동월 11일 오전 11시 30분 안동현 역 구내에서 발각, 강제 송환당함으로써 실패했다.”고 독립운동 사례로 기록했다.

 화양동부군할머니신당과 신석기시대 움집

 『화양동 지역의 지명유래와 설화』에 따르면, 귀인 장씨 묘자리에서 다시 남쪽 아래 4~50미터 지점에 ‘부군할머니 신당’이 있는데, 1910년경 벼락을 맞아 건대 부속 민중병원 앞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신당에는 김유신과 이순신 장군의 신위가 있었다고 한다. 한강변 신당 중에 이순신 장군이 모셔신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현재는 옮겨진 신당마져 없어져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 사학과 출신인 양 자치관도 신당이 있었던 것은 알고 있었으나, 신당 안 신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같은 책에는 “화양동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서 남쪽의 한강을 바라보며 급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연립주택이 들어선 이 자리에 예전에는 ‘움집들’이 있었다고 한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움집은 신석기 시대 주거형태이다. 이 내용에 대해 양 자치관은 광진구의 다른 곳으로 보았다. 책 내용이 틀린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다.

 어쨌든 화양정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크게는 화양정이 있었고 그 한강 방향 남쪽으로는 귀빈 장씨의 묘소와 의친왕 이강 셋째 부인 집, 부군할머니 신당, 움집들이 있었다. 아주 좁은 공간이나 움집 기록이 사실이라면 신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 역사가 살아있는 공간이 된다.

모윤숙 시인 옛집 터 느티나무와 옛집터 위에 세워진 대성빌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모윤숙 시인 옛집 터 느티나무와 옛집터 위에 세워진 대성빌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모윤숙 시인 옛집 터 입구에 있는 수령 약 650년 된 느티나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모윤숙 시인 옛집 터 입구에 있는 수령 약 650년 된 느티나무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렌의 애가』의 시인 모윤숙

 화양정 느티나무에서 서쪽, 즉 화양동 주민센터 주차장을 바라보면 그 끝에 연립주택이 보인다. 그 연립주택 터는 근현대 시인 모윤숙이 살았던 집터이다. ‘화양정 느티나무공원’ 안내판 중 「화양정에 얽힌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화양동 주위의 느티나무 군락의 남쪽 끝자락 131번지(군자로 30-1)에는 2개 동의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이곳은 그 이전 여류시인 모윤숙(毛允淑, 1910~1990)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모윤숙은 6‧25전쟁 이후 줄곧(1957~1983년) 이곳에서 지냈다. 지금은 연립주택 입구에 수령 650년 된 느티나무 고목만이 시인의 옛 정취를 나타내고 있다. 그의 시선(詩選)에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일부를 싣는다.”

 안내판에는 안내문과 달리 시는 없고 그 아래 빈 공백만이 있다. 썼다가 지웠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안내문을 잘못 작성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1937년 일월서방에서 출간된 모윤숙의 산문시집 『렌의 애가』는 1997년 이화대자대학출판부에서 간행된 것까지 포함해 89쇄를 찍은 시간을 초월한 베스트셀러이다. 일월서방은 시인 조지훈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출판사이다. 조지훈이 직접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지훈과 모윤숙의 삶이 180도 달라 서로 인연이 있었다 해도 오래가지는 않았을 듯하다.

 그 뒤로 그녀는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수정하고 증보했다. 그녀의 시작과 끝이나 다름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널리 알려졌기에 누구나 한번은 들어보았을 시이다.

 다음은 그녀의 시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는 “시몬!”으로 시작하는 시집의 맨 앞부분이다.

 “시몬!  이렇게 밤이 깊었는데 나는 홀로 작은 책상을 마주 앉아 밤을 새웁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작고 큰 별들이 떨어졌다 모였다 그 찬란한 빛들이 무궁한 저편 세상에 요란히 어른거립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위는 무한한 암흑 속에 꼭 파묻혔습니다.”
 (모윤숙, 『렌의 애가』, 이화여자대학출판부, 1997년)

 이 시집에 대해 최동호(시인, 고려대 국문과 교수, 「모윤숙의 초판본 렌의 애가에 대하여」)는 “격정적인 청춘의 고백서이다. 도덕적 금기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었던 이 책은 1937년 간행된 후 많은 풍설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떤 이들에게는 불온 문서로, 어떤 이들에게는 청춘의 고뇌를 위무하는 복음서로 읽혀졌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방민호는 『서울 문학 기행』(아르테, 2017년)에서 그녀가 1932년 배화여자보통학교 교사로 시집 『빛나는 지역』을 출간했을 때는 “일제 말기의 변신을 무색하게 할 만큼 순결한 민족주의적 열정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는 변하기 시작했고, 일제 말기에는 한 때 그의 연인이었던 이광수가 그랬듯 급격히 친일 시인이 되었다. 이광수와의 염문설은 『서울 문학 기행』을 참고하면 된다.

 문학가의 친일과 이광수의 적반하장 공범론

 임종국의 『친일문학론』(민족문제연구소, 2002년)에는 그녀의 친일작품이 언급된다. 「동방의 여인들」‧「어린 날개」‧「호산나‧소남도」 같은 시들이다. 조선 여성들에게 일제가 강요하는 내핍생활을 선전하고, 청소년들에게 참전을 부추기고, 일제의 침략을 자랑스럽게 노래하고 있다, 그녀는 “대화혼(大和魂, 일본 정신)의 칼”, “대화혼의 무형한 총검”을 갖자고 외쳤다. 폭압의 시기에, 그것도 30여 년 동안 식민지에 살던 사람들이었기에 변질될 수도 있다. 친일문학을 조사했던 임종국은 말했다.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 문장을 남지 않은 ‘영광된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윤동주, 폐허파에서 변영로‧오상순‧황석우, 조선어학회에 관계하면서 시와 수필을 쓴 이병기‧이희승, 젊은 시인으로 조지훈‧박목월‧박두진 들의 청록파 3시인과 박남수‧이한직의 문장(文章) 출신, 제일 먼저 붓을 꺾었다는 홍노작과 김영랑, 이육사, 한흑구, 이들의 친일문장을 필자는 현재 조사한 범위 내에서 단 한 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는 길었고 지독했다.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 부소장)이 쓴 같은 책의 「보론 : 친일문학의 연구현황과 그 정신사적 의의」에 따르면, 친일문학 작품을 쓴 작가가 120여 명이었고, 해방 전후 한국 문인이 백여 명이었던 시절임을 미뤄보면 거의 100퍼센트에 육박하는 숫자가 친일 문학을 한 것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이 시기에 좌우익 문학단체가 다 민족문학을 거론하면서도 친일파 청산문제를 교묘히 비켜갈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친일파는 살아있다』(정운현, 책보세, 2011년)에 인용된 이광수가 쓴 친일파에 대한 변명, 「홍제원 목욕」을 읽다 보면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문학가 이광수’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심까지도 지워 버리게 만든다. 그의 목욕론은 무섭기까지 하다.

 “사십년 일정 밑에 일본에 협력한 자, 아니한 자를 가리고, 협력한 자 중에서도 참으로 협력한 자, 할 수 없이 한 자를 가린다 하면 그 결과가 어찌될 것인가. 일정에 세금을 바치고, 호적을 하고, 법률에 복종하고, 일장기를 달고, 황국신민서사를 부르고, 신사에 참배하고, 국방헌금을 내고, 관공립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한 것이 모두 일본에의 협력이다. 더 엄격히 말하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도 협력이다. 왜 그런고 하면, 그가 협력을 아니 하였던들 죽었거나, 옥에 갔겠기 때문이다. 만일 일정 사십년에 전혀 일본에 협력하지 아니하고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해외에서 생장한 사람들일 것이니, 이들만 가지고 나라를 하여 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삼천만 민족 전체로서 홍제원 목욕을 하고 다시는 죽더라도 이민족의 지배를 받지 말자고 서약함이 옳기도 하고 효과적이기도 할 것이다.”

 친일파가 적반하장으로 당당히 모두 공범이라며 곡학아세를 하고 있다. 그는 속죄 대신 거꾸로 이 땅의 모든 사람을 친일파로 만들었다. 자신과 같은 공범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국의 아들들과 딸들을 전쟁터로 내모는데 앞장선 그와 보통 사람들은 차원이 다르다.

 정운현은 “이광수 같은 일제의 주구가 나서서 ‘홍제원 목욕’ 운운하며 스스로 사면을 입에 담은 것은 후안무치한 행동이다. 이광수가 비판받는 이유는 일제 때의 친일 행적뿐 아니라 바로 이 같은 파렴치한 행동 때문”이라고 했다.

 친일파의 잘잘못을 따지기도 전에 정운현이 말했듯 파렴치함이 진짜 친일의 이유였는지 모른다. 부끄러움을 모르기에, 또 늘 시류에 따라, 권력의 양지만 쫓아다니기에 당연히 그 어떤 죄의식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던 듯하다.

 가장 앞장서 친일했던 사람이 해방된 뒤에도 한 티끌의 부끄러움이 없다. 친일파는 지금도 많다. 지일(知日), 극일(克日)은 동전의 양면이다. 지일을 한다고 친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극일을 주장한다고 한다고 친일파가 아닌 것도 아니다. 진짜 친일파는 염치가 없이 권력을 탐하고, 표변하는 사람들이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면 해바라기처럼 사는 사람이다.

 모윤숙의 옛 집터 입구에는 수령 650년, 높이 10미터, 둘레 6.6미터가 되는 느티나무가 있다. 세종 때부터 있던 나무다. 세종을 직접 보았고, 대마도를 정벌했던 최윤덕을 직접 보았던 나무이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과 해방 이후 그녀가 우리 문단을 주름 잡고 활동할 때의 모습을 말 없이 세종과 최윤덕의 마음, 조선 나무의 마음으로 지켜보았을 듯하다. 느티나무는 그녀에게 무어라 말했을까.

이영희 선생 옛집 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이영희 선생 옛집 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사상의 은사에서 생각의 은사로.

 모윤숙의 집에서 120미터 정도 남서쪽으로 가면 평생을 그녀와 정반대로 살았던 이영희 교수(李泳禧, 1929~2010)의 집이 나온다. 1977년부터 1995년까지 살았던 집이다. 현재는 빌라로 변했다. 모윤숙이 살았던 기간과는 1977년에서 1983년까지 겹친다. 그 가까운 거리에 한 사람은 지조를 버리고 욕망과 갈등하며 타협하며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지조를 지키며 감옥을 드나들며 살았다. 한 사람은 친일이라는 멍에에 갇혀 작품까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한 사람은 쓰는 글 모두 세상에 벼락이 되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었다.

 이영희에 대해서는 자신이 쓴 무수한 글이 있고, 또 그를 소개하는 많은 책들이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에게 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만든 ‘다르게 보기, 다르게 생각하게 만든 스승’이다.

 프랑스 『르몽드』 기자가 붙여주었다는 ‘사상의 큰 스승’은 이제는 구시대의 유령이다. 그 시대에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중국의 자본주의화, 게다가 두 번째 천안문 사건(1989년)이 일어나면서 그가 전에 썼던 중국에 대한 진실은 분명히 오류가 있었고 그 자신도 인정했다. 오히려 그가 일방의 편협한 주장에 속지 말라고 보여준 그의 용기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다른 면을 보여주었던 눈을 더 존중해야 할 듯하다.

 그러나 아직도 그를 ‘사상의 스승’으로 여기며, 그가 부정했던 ‘우상’을 여전히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의 삶이 우상의 실체를 벗겨내고, 우상을 부수기 위해 살았음에도 그의 진실을 외면하고, 그가 말했던 파편적 지식에 갇혀 그를 우상화하거나, 자신들 스스로가 우상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많다.

 이영희를 스승으로 여긴다면, ‘사상의’는 떼어버려야 한다. 또 이영희의 오류를 인정해야 한다.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중국 문화대혁명의 문제와 수 백만 인민을 굶어죽게 만든 대약진운동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그 다른 시각의 오류를 인정해야 한다.

 이영희에 대해서는 그가 임헌영과 대화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본 『대화』(리영희, 한길사, 2006년)를 추천한다. 이영희 자신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라 가장 객관적이다. 평전으로는 김삼웅의 『리영희 평전』(책보세, 2010년),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개마고원, 2004년)이 좋다. 그러나 그 두 권에서도 언급되는 ‘사상의’는 떼고 읽어야 이영희가 제대로 보인다. 민주화를 위한 헌신, 지식인의 책임과 의무, 그에 따른 고통의 무게 등이.

 이영희 옛집터에서 300미터 정도 가면 ‘화양동 대동우물’이 있다. 100년 전에 생긴 우물로, 70년대까지도 식수와 생활용수로 사용되었다는 우물이다. 예전에는 어디나 있었던 우물 중의 하나이다. 이곳 역시 수도관이 들어오기 전에는 불가피하게 이 우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옛 생활의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드레곤하우스  우물카페를 찾아가면 그 앞에 있다. 차가 주차해 있으면 잘 안보인다.

화양동 대동우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화양동 대동우물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광진구 2편에서는 어린이대공원에서 우리 역사와 인물의 흔적을 찾아간다.
 
* 화양동 느티나무 : 광진구 화양동 110-34
* 화양정 터 : 광진구 화양동 110-34 및 그 인근 지역
* 귀인 장씨 묘소 터 : 광진구 화양동 110-32 및 그 아래 흰색 빌라 지역
* 모윤숙 시인의 화양동 옛집 터와 느티나무 : 광진구 화양동 131 대성빌라
* 이영희 교수의 화양동 옛집 터 : 광진구 화양동 16-64
* 대동우물 : 광진구 화양동 54-2 모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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