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김정아 기자/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제공]
[편집=김정아 기자/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제공]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광진구를 2편에 이어간다. 이 코스는 구의동에 있는 영화사, 아차산, 워커힐호텔, 광나루, 한강 등을 거쳐 낙천정, 구의역에 이르는 구간이다. 소요시간은 5시간 정도 걸린다. 2편의 어린이대공원에 이어간다면, 후문이 출발지이다. 그러나 어린이대공원을 들려 이 코스를 간다면 아주 벅차다. 이 코스를 하루에 도는 것은 무리다. 게다가 일행이라도 있다면 아마도 아차산에서 지쳐 탐방을 끝낼 가능성이 많다.

 이 코스는 주말에 하루 전체를 시간 내서 갈 것을 권한다. 아차산 등산로와 한강까지 모두 부담 없이 편안히, 또 사색하면서 행복하게 걸을 수 있다. 때로는 산속에서 인자(仁者)가 되어 보기도 하고, 때로는 강변에서 지자(知者)가 되어 볼 수도 있다.

 서울 시내 곳곳이 다 좋지만, 특히 이 코스 중 영화사~아차산성~워커힐호텔~한강 구간은 꽃피는 봄과 단풍으로 물든 계절에는 꼭 한 번은 가야 할 멋진 곳이다.

영화사 미륵전 미륵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영화사 미륵전 미륵불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세조를 치료한 미륵석불, 석불을 갈아 먹었던 사람들

 어린이대공원을 들리지 않는다면, 5호선 아차산역 1번이나 2번 출구에서 시작하면 된다. 후문에 있는 코올터(John. B. Coulter) 장군 동상과 을지문덕 장군 동상을 살펴보고 시작하면 된다.

 영화사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가면 15분 정도 걸린다. 영화사까지 가는 길은 주택가를 지나기에 불편할 수 있다. 사람 사는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사부터는 속세의 때를 벗을 수 있다. 오히려 그래서 15분 정도 주택가를 걸으며 묻히는 세상 때는 더 귀하다. 네이버나 카카오지도를 켜고 가면 편리하게 찾아갈 수 있다.

 영화사(永華寺) 입구에 도착하면 ‘아차산 영화사’라는 현판이 반긴다. 그 안에는 왼쪽에는 현재시점에서 수령 약 410년 된 느티나무가 당당히 서 있다. 대웅전과 범종각의 건물들도 보인다. 이 절은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의상(義湘) 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창건한 곳은 현재 위치가 아니다. 용마봉(龍馬峰)에 있었고 절의 이름은 화양사(華陽寺)였다.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이 절의 등불이 한양 궁궐까지 비친다고 해서 용마산 기슭 군자봉으로 옮기게 했다고 한다. 그 뒤 중곡동으로 옮겨졌다가 1907년 현재 위치로 옮겨와 ‘영화사’가 되었다.

 『광진의 문화유산 나들이』(건국대학교박물관, 광진문화원, 1998년)에 따르면, 이 절에 있는 ‘미륵석불입상’에 조선 세조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기도하자 병이 치유되었다고 한다.

 『전통사찰총서 4 : 서울』(사찰문화연구원, 사찰문화원 출판국, 1994년)에서는 의상 대사가 중국에서 돌아와 부석사(浮石寺, 경북 영주시 봉황산)를 비롯해 전국에 10개의 사찰을 지었다고 하나, 그중에 이 영화사(화양사)는 들어있지 않다고 한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뒤 의상대사가 새로이 새웠을 수도 있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이전해 왔음에도 영화사 ‘미륵석불입상’이 고려말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기에 최소한 고려말 이전에 세운 절임에는 틀림없다. 또 『전통사찰총서 4 : 서울』에 의하면, 서울시립대 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후기 제작 「한성동역도(漢城東域圖)」에도 화양사가 그려져 있어 조선 후기에도 번창했던 절로 볼 수 있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金正浩, ?~1866)가 최성환(崔瑆煥)과 함께 편찬한 지지(地誌) 『여도비지(輿圖備志)』에도 화양사가 언급되기도 한다.

 이 절의 삼성각에 있는 ‘독성탱화(獨聖幀畵, 나반존자)’는 상궁(尙宮) 이씨 등이 시주해 1880년대에 그려진 불화라고 한다. ‘독성탱화’는 삼성각 안 맨 왼쪽에 있다. ‘나반존자’라는 명패가 있는 그림이다. 보관 잘못인지 상태는 좋지 않다.

 세조가 병을 치료하는데 효험을 보았다는 ‘미륵석불입상’은 범종각 왼쪽 뒤편 40미터 위에 있는 미륵전 안에 있다. 미륵전을 자세히 보면 큰 바윗덩어리 위에 세워졌다. 미륵석불입상은 본래 영화사가 중곡동에 있을 때 그곳에 있던 석불을 옮겨온 것이고, 석불이 안치된 미륵전은 1947년에 세운 것이다.

 ‘미륵석불입상’은 크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 약 4미터, 너비 1.7미터, 두께 약 40센치미터이다. 호분(胡粉, 대합이나 굴 등 조개껍질로 만든 흰색 안료)이 칠해져 있다. 처음에는 머리 위에는 둥근 갓돌(笠石)이 올려져 있었으나 미륵전이 세워지면서 미륵전 밖에 내려놓았다고 한다. 미륵전 앞 왼쪽 바위에 돌로 고여져 있는 ‘갓’ 모양의 돌이 그 갓돌이다.

 두 손의 엄지와 검지는 깨어진 듯 상태가 좋지 않다. 이는 불상의 일부를 깨서 갈아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기자(祈子)신앙의 영향이라고 한다.

 미륵전 현판은 권상로(權相老, 1879~1965) 동국대 초대 총장이 쓴 것이다. 권상로는 일제강점기 친일 활동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기소유예처분을 받기도 했다.

 절이든 성당이든 교회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절함이 맺혀있다. 그러나 미륵석불을 통해 아들을 낳겠다는 열망도 이제는 시대가 변해 옛날 전설이 되었다. 지금 미륵석불을 찾는 사람들은 무엇을 원할까. 한때 승려로 존중받았던 권상로의 삶을 보면 무엇을 위한 득도(得道)이고 불교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수천 년 동안 우리나라 승려들은 침략자에 맞서 단호히 금기(禁忌)인 살생(殺生)까지 하면서 억겁의 윤회를 선택했는데.

아차산성 출토 유물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아차산성 출토 유물 안내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울타리가 쳐진 아차산성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울타리가 쳐진 아차산성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아차!’ 아차산 유래에 대한 전설

 다음 목적지는 아차산성(阿嵯山城·阿且山城, 203미터, 성벽 높이 7미터, 둘레 1,038미터)이다. 절을 나와 왼쪽의 동의초등학교를 따라 걸으면, ‘아차산 벽천폭포’라는 작은 인공폭포가 있다. 답사 때는 겨울철이라 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폭포 위에는 사슴 몇 마리와 두루미 두 쌍이 서 있다.

 아차산 그 자체로도 사람들을 평안하게 해 주는데 이곳에 왜 이런 시설을 만들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근처에 시민들을 위한 휴식공간인 ‘아차산 만남의 광장’도 있는데, 여기에 꼭 이런 시설을 만든 까닭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서울 시내 곳곳은 물론 전국 각지에 가끔은 뜬금없이 세워진 시설들이 있다. 서울시를 포함해 각 지자체가 돈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시민, 국민이 피땀으로 낸 세금이 너무 헤프게 쓰여지는 듯하다.

 역사를 보면 세금은 어느 시대나 임자 없는 돈, 권력자들의 돈이다. 그 세금 때문에 목숨을 버리고, 도망자가 되고, 도둑이 되는 세상이 될 때 그 나라는 망했다. 지금도 어쩌면 그런 세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몇 걸음 더 가면 ‘아차산 만남의 광장’이 나온다. 광진구 둘레길 3코스를 지도로 보여주는 ‘광진둘레길’ 표지판이 서 있다. 그 옆이 아차산 입구이다. ‘아차산(峨嵯山, 285.8미터)’임을 알리는 바윗돌 표석이 서 있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광진의 문화유산 나들이』에 따르면, 아차산의 유래에 대한 두 개의 구전설화가 있다. 하나는 고구려 온달 장군이 이곳에서 전사하자 주민들이 “아차! 온달 장군이 이곳에서 그만 죽고 말았구나”라는 뜻으로 아차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 명종 때 유명한 점술가 홍계관(洪繼寬)이 자신의 운명을 점치고 어느 날에 횡사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는데 살 방법을 다시 점치니 임금의 의자 아래 숨어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임금에게 승낙을 얻어 의지 밑에 숨었는데, 때마침 쥐 한 마리가 지나가자 임금이 홍계관에게 쥐가 몇 마리인지 점을 쳐 맞춰보라고 했다. 그의 점에서는 3마리로 나왔다. 임금이 본 것은 한 마리였기에 분노한 임금은 홍계관을 처형하게 했다.

 형장으로 끌려간 홍계관은 다시 점을 쳤다. 한 시간 정도만 버티면 살 수 있다는 점괘가 나오자 집행인에게 사정해서 형 집행을 잠시 미뤘다. 그 사이 임금이 쥐의 배를 갈라 보게 하자 뱃속에 새끼 두 마리가 있었다. 홍계관의 점이 맞았다. 임금은 급히 신하를 보내 사형 중지를 명령을 내렸으나, 집행인은 사형 중지 명령을 손짓하는 신하의 모습을 오해해 빨리 집행하라는 것으로 알고 홍계관을 그 즉시 처형했다.

 임금이 처형 소식을 듣고 “아차. 늦었구나”라고 안타까워해 그 사형장이 있던 고개를 ‘아차 고개’라 불러 아차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구전설화는 모두 근거가 약하거나 없다. 특히 홍계관에 대한 구전은 그 시대보다 아차산 이름이 먼저 있어 아차산과 무관하다. 지역의 구전 설화들을 보면, 대개 비슷한 내용이 많고, 기억의 왜곡 혹은 과장된 경우가 많다.

『우리 곁의 고구려』, 경기도박물관, 2005년 중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우리 곁의 고구려』, 경기도박물관, 2005년 중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군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아차산의 고구려와 현재까지 전해진 고구려 문화

 이런 구전과 달리 아차산은 삼국시대에 이미 아단성이라는 이름이 있었기에 본래부터 오래된 이름이다. 아차산은 인근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남쪽으로는 한강 이남이, 북쪽으로는 의정부에 이르는 길목까지 볼 수 있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그런 까닭에 백제가 점령했고, 이어서 고구려, 신라가 점령하기도 했다. 현재 확인된 고구려 진지는 20여 개에 달한다. 그 진지들을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군(堡壘群)’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5호선 광나루역까지는 970미터, 아차산역까지는 1.1킬로미터이다. 영화사를 들리지 않고 아차산으로 직접 간다면 광나루역에서 출발하면 된다.

 만남의 광장 맞은편, 동의초등학교에서 만남의 광장으로 가는 길 오른쪽 산에는 고구려의 유적인 홍련봉 1·2보루가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1, 제20대 왕)은 475년에 백제의 한성(漢城,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함락하고 백제의 개로왕(蓋鹵王, 455〜475, 21대 왕)을 붙잡아 아차산의 아차산성 아래에서 처형했다. 그 뒤 80여 년 동안 이곳을 지배했다.

 또한 아차산은 요즘 화제인 드라마 『달이 뜨는 강』의 주인공 고구려 온달(溫達) 장군이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해 590년 아차성을 공격하다가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곳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달 장군의 시신을 넣은 관이 움직이지 않자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었으니, 이제 돌아가시지요”라고 하자 그때야 관이 움직여 장례를 치룰 수 있었다고 한다.

 장수로서 패전에 대한 분노, 자신의 목표였던 한강 유역 수복 실패 때문에 온달은 시신 마저 떠날 수 없었던 듯하다. 죽어서도 책임을 다하려 했던 장수가 온달이다.

 『고구려 : 한강 유역의 요새』(서울대학교박물관, 2000년)과 『우리 곁의 고구려』(경기도박물관, 2005년)에 따르면, 홍련봉 보루에서 고구려의 칼 2점, 창 9점, 화살촉 3천 여 점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 무기로 보면 대략 10여 명의 고구려 군사들이 주둔했고, 창과 활이 가장 중요한 무기였다. 아차산 고구려 보루에서는 온돌 시설과 각종 그릇들도 발견되었다. 이 온돌은 오늘날의 온돌과 달리 방 일부분에만 설치한 부분 난방 방식이다.

 지금까지도 활용되는 고구려 문화는 무엇이 있을까? 불고기와 김치, 그리고 ‘서방’이란 표현이다. 『우리 곁의 고구려』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들은 주로 조와 콩을 먹었다고 한다. 대표 음식은 양념한 고기구이 요리인 ‘맥적(貊炙)’이다. 불고기의 원조이다. 또한 배추·아욱·무 등을 소금에 절여 먹었는데, 조선 중후기에 고추가 첨가되어 ‘김치’가 되었다.

 『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고구려의 결혼 문화는 오늘날과 달랐다. 남자들이 처가살이를 했다. 신부집에서는 미리 사위가 살 집을 만들어 놓고 사위를 맞았다. 그 집이 ‘서옥(壻屋)’이다. 거기서 결혼생활을 하다가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그때야 부인과 자녀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세조실록』 세조13년에 나오는 “속담에 사위는 서쪽 방(西房)에 묵게 했기에 사위를 ‘서방(西房)’이라고 부른다”고 했는데, 이 역시 고구려의 ‘서옥’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보인다.

 처가살이 문화는 조선 중후기에 시집살이 문화로 바뀌었다. 시집살이 문화는 우리 역사에서 불과 300~400년 밖에 되지 않는다. 최근 사회경제적 문제로 다시 처가살이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워커힐 호텔 워커장군 추모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워커힐 호텔 워커장군 추모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아차산 있는 우리 곁 고구려, 백제, 신라

 아차산에서의 목적지는 ‘아차산성’이다. 아차산의 둘레길도 좋으나, 등산이 목적이 아니다. 광진구 일대의 역사 유적을 탐방하는 것이라 아차산의 경우 ‘아차산성’까지 한정했다. 아차산 둘레길 입구 만남의 광장에서 곧바로 올라 평강교~낙타고개를 거쳐 가는 방법과 아차산생태공원을 거쳐 올라가는 코스가 있다. 낙타고개에서는 고구려정-해맞이광장-아차산1·5·3·4 고구려 보루를 거쳐 아차산 정상으로 갈 수 있다.

 생태공원 쪽에서 아차산성으로 올라가면 20분 정도 걸린다. 생태공원 안에는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조형물이 있다. 유아숲체험원, 자생식물관찰로, 아차산 역사문화 홍보관이 있어 아차산의 역사를 살펴보고 갈 수 있다.
 생태공원에서는 아차산 정상과 워커힐호텔로 가는 길로 나뉜다.

 아차산성은 아단성(阿旦城)·아차성(阿嵯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북한산성(北漢山城) 등으로도 불려지기도 했다. 완전한 석성(石城)이다. 1973년에 지정된 사적 제234호이다. 백제 책계왕 원년(286년)에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 수리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면 그 이전에 백제가 만든 성이다. 백제가 수도 한성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으나, 396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빼앗겼다. 그 뒤 신라가 다시 점령했다.

 그런데 『아차산 제4보루 : 발굴조사 종합보고서』(서울대학교박물관 외, 2000년) 같은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아차산성은 현재 남아 있는 출토 유물과 성벽 구조가 『삼국사기』의 기록과 달리 백제가 쌓은 성이 아니라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뒤 통일과정에서 한강 유역 거점으로 쌓은 성이라고 한다. 아차산 일대에서 백제의 흔적은 사라진 듯하다. 아차산 지역의 각종 발굴 결과에서도 고구려와 신라 유적 유적은 발굴되었으나, 백제의 흔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역사의 고전장』(조강환, 삼조사, 1977년)에 따르면, 조강환은 역사학자 이병도와 함께 아차산성 옛터를 답사했다. 그때 동문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이병도가 기왓장을 주으며 “아- 백제 때 것이로구먼, 이 빗살무늬 좀 봐”라고 했다고 한다. 이병도가 직접 주은 백제 기왓장의 사례로 보면, 아차산성 일대에 백제의 유적이 존재하고 있으나, 아직 전체가 발굴되지 않아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차산 지역 발굴은 대개 부분 발굴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백제의 유적이 아직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아차산성은 1962년 워커힐호텔이 건립되면서 워커힐호텔의 경내에 포함되었다. 그로 인해 울타리가 쳐져 있어 들어갈 수 없다. 워커힐에서 울타리 곳곳에 붙인 사유지 무단침입 경고문도 걸려있다.

 울타리 밖에서는 산성 정상부의 돌로 쌓은 성벽이 조금 보인다. 정상에 오르면 백제, 고구려, 신라가 보았던 그 옛날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등이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을 것이나 들어갈 수 없으니 아쉬울 뿐이다. 등산객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지금처럼 울타리로 보호하는 것이 후세를 위해서 더 낳은 결정인 듯하기도 하다.

 출토 유물 안내판에 따르면, 여러 유물이 있으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라와 가야의 토우같은 흙으로 만든 인물상이다. 크기는 알 수 없으나 얼굴은 우리나라 사람 중 갸름한 북방계형 얼굴을 가진 사람과 비슷하다. 또 신라의 말 탄 사람 토우와도 아주 닮았다. 만듬새는 투박함이 조선 백자를 닮은 듯하다.

 그대로 죽 가면 아차산 정상과 용마산 또는 유무명의 인물들이 쉬고 있는 망우리 공원묘지로 갈 수 있다. 필자는 아차산성을 둘러싼 울타리를 돌다가 다시 워커힐 방향으로 내려갔다. 이번 탐방의 목표가 아차산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10여 분 내려오면 워커힐길(가을단풍길)에 이른다. 잎이 다 떨어진 겨울보다는 ‘가을단풍길’이란 이름처럼 가을 풍경이 아름다운 곳인 듯하다. 몇 분 더 가면 워커힐호텔 입구에 도착한다.

 워커힐호텔은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던 곳을 호텔로 개발했다고 한다. 호텔 이름은 6·25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으로 참전했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 중장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워커는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고, 그의 아들 샘 S. 워커도 소총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6·25때 미군으로 참전한 다른 사례로는 지난 광진구 1편에서 언급한 밴 플리트(James A. Van Fleet, 1892~1992)과 밴 플리트 2세가 있다. 호텔 이름이야 어떻든 이들의 사례를 보면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준다.

 필자가 무지해서 모를 수 있으나 6·25 때 우리 군대에서 그런 사례가 있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지금도 우리 사회 지도자들의 병역은 언제나 논란이다. 국회인사청문회를 보면, 고위직에 임명되려는 사람들 다수가 희귀한 질병이나 보편적이지 않은 이유로 군에 가지 않았다. 그런 몸으로 그 뒤 수십 년을 건강히 잘 살고, 또 그런 자리에 오를 정도로 체력이 강한 것을 보면 다들 정상 체질은 아닌 듯하다.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의 최악의 참패와 전라우수사 이억기

 아차산, 아차산성, 워커힐을 거쳐 내려오다 보면, 한 사람이 떠오른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1561~1597) 장군이다.

 그는 젊어서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과 같은 시기에 함경도에서 근무했고, 이순신과 함께 여진족과 전투를 하기도 했다. 이순신처럼 임진왜란 전년도인 1591년에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조정에서 발탁해 남부지방으로 내려보낸 명장이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그는 전라도 순천 부사에 임명되었다. 곧바로 승진되어 이순신과 동급인 전라우수사가 되었다. 원균(元均, 1540~1597)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에 경상우수사에 임명되었다.

 이순신과 관할 지역은 다르나 이웃 지역인 전라우수사로 이순신처럼 전쟁 준비를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고 출전 준비를 서둘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원균 연합 함대가 처음 출전했던 1592년 5월 4일~5월 8일까지의 옥포·합포·적진포 해전, 2차 출전 중 사천·당포 해전까지는 참전하지 못했다. 관할 구역이 이순신이나 원균과 달리 넓고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이순신과 원균 연합함대의 2차 출전 기간에 있었던 당항포 해전 때부터 참전하기 시작해 조선 수군 불패의 전설을 만들기 시작했다.

 원균은 이순신과의 갈등으로 한동안 수군을 떠나기도 했으나, 이억기는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6년 동안 이순신과 함께 남해를 호령하면서 일본군의 서해 북상을 저지했다. 불멸의 이순신 승리 뒤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1592년 1월 1일부터 존재하는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는 2월 13일에 “우수사(右水使, 전라 우수사 이억기)의 군관이 왔다”로 처음 언급된다.

 조선 수군의 전멸과 이억기, 원균, 최호의 전사

 남해에서 전사한 이억기를 아차산에서 갑자기 떠올린다는 게 뜬금없어 보일 듯하다. 그러나 아차산은 이억기 장군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는 1597년 7월 남해 칠천량에서 전사했다. 그 해전에 대해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일기 중 이억기 장군이 언급된 부분만 일부 발췌했다.

 ▣ 7월 14일 [양력 8월 26일]. 새벽에 꿈을 꾸었다. “나와 체찰사(이원익)가 같이 한 곳에 도착했더니, 많은 시체들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 혹은 밟거나, 혹은 머리를 베었다.” 오전 10시에 황 종사관(황여일)가 정인서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또 김해에서 적(賊)에게 부역했던 사람인 김억의 고목(告目, 보고서의 일종)을 보여주었는데, “7일에 왜선 500여 척이 부산에서 나왔고, 9일에는 왜선 1,000척이 합세해 우리 수군과 절영도(부산 영도) 앞바다에서 서로 싸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전선 5척은 떠내려가 두모포에 도착했고, 7척은 간 곳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듣고는 울분이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이길 수 없어, 곧바로 황 종사가 군사를 점검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황 종사와 일을 의논했다. 가슴에 맺힌 마음을 어찌 다 말하랴.

 ▣ 7월 15일 [양력 8월 27일]. 가장 늦게 중군(中軍) 이덕필이 왔다. 해 질 무렵 돌아갔다. 그로 인해 들으니, “수군 20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고 했다. 원통하고 분했다. 원통하고 분했다. 몹시 한스럽다.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 없구나. 어두울 무렵 비가 크게 내렸다.

 ▣ 7월 16일 [양력 8월 28일]. 아침을 먹은 뒤, 손응남을 중군(이덕필)에게 보냈다. ‘수군의 일’을 자세히 살피고 듣게 했더니, 되돌아와 중군의 말을 전하며, “‘우병사(右兵使)의 긴급 보고서를 보았더니, 불리한 일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세히 말하지는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한탄스럽다. 이날 낮 12시쯤, 이희남에게 칼을 갈게 했다. 날이 아주 잘 서서 머리를 빡빡 밀은 우두머리 놈을 벨 수 있겠구나. 저녁에 영암 송진면에 사는 남자 사노비 세남이 서생포에서 벌거벗고 왔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7월 4일에 전(前) 병사의 우후 배를 타고, 격군을 했습니다. 

5일에는 칠천량에 도착해 정박했습니다. 6일에는 옥포로 들어갔습니다. 7일, 날이 채 밝지 않았을 때에 말곶을 거쳐 다대포에 도착했더니, 왜선 8척이 머물러 정박해 있었습니다. 여러 배들이 곧바로 돌격하자, 왜인들은 남김없이 육지로 상륙했습니다. 빈 배만 매어 있어 우리 수군이 끌어내 불을 지른 뒤에, 그대로 부산 절영도 바깥바다로 향했습니다. 그 때 적선이 자그마치 1,000여 척이 대마도에서 건너왔습니다. 서로 싸울 생각이었는데, 왜선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피했습니다. 끝내 다 무찌르고 사로잡을 수 없었습니다. 세남이 탄 배와 다른 배 6척은 배를 통제하지 못해 떠내려가 서생포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육지에 상륙했을 때, 거의 다 즉시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남은 홀로 나무숲에 들어갔습니다. 기어서 살아났고, 간신히 이곳으로 왔습니다.”라고 했다. 듣기만 해도 아주 기가 막힐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믿고 의지하는 것이 오로지 수군이다. 수군이 이렇게 되었으니, 회복할 희망이 없다. 몇 번이나 생각해도, 분해서 간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분해서 간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선장(船將) 이엽이 적에게 붙잡혔다.”고 했다. 더욱 심하게 아프고 답답하다. 아프고 답답하다.

 ▣ 7월 18일 [양력 8월 30일].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며 말하기를, “16일 새벽, 수군이 밤에 기습당했습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최호)와 여러 장수 등 많은 사람이 해를 입었습니다. 수군이 크게 패했습니다.”라고 했다. 듣기만 해도 소리 높여 슬피 울부짖는 것을 이길 수 없었다. 소리 높여 슬피 울부짖었다. 얼마 뒤, 원수(元帥, 권율)가 와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어쩝니까. 어쩝니까.”라고 했다. 오전 11시 까지 이야기했지만, 결정 할 수 없었다. 내가 보고하기를, “제가 바닷가 땅으로 가서, 듣고 본 뒤에 대비책을 정합시다(聞見而定, 문견이정).”라고 했더니, 원수가 아주 기뻐했다. 나와 송대립․류황․윤선각․방응원․현응진․임영립․이원용․이희남․홍우공이 길을 떠났다.

 여러 사료를 종합해 보면, 1597년 2월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7월 14일 이억기의 전라우수군, 최호(崔湖, 1536~1597)의 충청수군, 배설(裵楔, 1551~1599)의 경상우수군을 이끌고 일본군 본영인 부산포를 공격하기 위해 출전했다.

 당시 참전한 조선 수군의 배와 군사 수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몇몇 기록에는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선조실록』 1597년 5월 12일 기록에 따르면, 한산도에 집결한 1백 34척, 한산도로 출발했으나 도착하지 않은 5∼6척, 5월 20일에 건조가 완료되는 48척으로 총 180여 척 규모로 볼 수 있고, 격군은 5월 13일 기록에 따르면, 13,200여 명이었다.

 『사대문궤』·「형군문 최조전선(邢軍門催造戰船)」(1597년 7월 14일)에서는 조선 수군 130여 척, 『사대문궤』·「적세소퇴도성득보주(賊勢少退都城得保奏)」(1597년 9월 25일)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경상 우수사 배설,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등을 거느리고 병선 100여 척을 이끌었다”고 나온다.

 180척, 130척, 100여 척으로 차이가 있다. 분명한 것은 칠천량해전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조선 수군은 그 뒤 그 지옥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탈출한 12척이 사실상 거의 전부에 불과했다. 이 12척이 두 달 후 명량해전의 기적을 만든 배이다.

 이 해전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가 전사했고, 1만 명 이상의 조선 수군 역시 전사했다. 일본군 배에 포위된 이억기와 최호는 바다에 투신·자결했고, 원균은 섬에 상륙했다가 일본군에 죽임을 당했다.

이억기 장군 신도비(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이억기 장군 신도비(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칠천량 대패의 원인과 결과

 『명량, 진짜 이야기』(노병천, 바램, 2014년)와 『임진왜란 해전사』(이민웅, 청어람미디어, 2014년)에 인용된 일본 기록에 따르면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 160척을 탈취 혹은 불태웠다(有馬成甫, 『朝鮮役水軍史(조선역수군사)』, 1942년)”거나, “시마즈 요시히로가 160여 척, 도도 다카도라가 60여 척,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16척을 격침시켰고, 조선 수군의 목을 벤 것이 수천 명이며 물에 빠져 죽은 조선 수군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征韓偉略(정한위략)』)고 한다.

 우리나라 기록이나 일본 기록이나 모두 조선 수군이 전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을 말하고 있다.

 조선 수군의 칠천량해전 패전 원인에 대해 해군사관학교 이민웅교수는 수군통제사가 아닌 해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작전권을 갖고 있었고, 전투시 수군 장수들의 도망과 전염병 등에 의한 정예 수군의 급감, 통제사 원균의 통솔력 부족, 연이은 출동에 따른 수군의 피로도, 기상 악화 등으로 보았다.

 일본군의 승리 원인은 일본군 전선(戰船)의 대형화와 대규모화, (야간)기습 공격, 수륙합동공격 작전 등으로 꼽았다. 실제로 『선조실록』 선조 29년(1596년) 12월 21일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일본 해전 전술 정보를 얻고 돌아온 황신에 따르면,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의 정면 대결 대신 야간 기습 전략을 추구하고 있었다.

 현장을 모르는 정책결정자, 현장에 있는 리더들의 리더십 실패 등 총체적 난국이 만든 비국이 칠천량해전이다. 그 결과 6년을 풍전등화로 버티던 조선은 대충격을 받았고, 망할 상황 직전에 몰리게 되었다. 다행히 이순신의 명량대첩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위기를 극복하긴 했다. 오늘날에도 뜻있는 리더들이라면 그 패전원인을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할 듯하다.

 이억기의 죽음과 사라진 아차산 묘소 흔적

 칠천량해전은 임진왜란 육지와 바다 전투 중 최대, 최악의 패전이었기에 누구도 그의 시신조차 챙기지 못했다. 그 때문에 아차산에 시신 없는 가묘가 생겼다.

 아차산 가묘에 대한 기록은 『승정원일기』 정조 20년(1796년) 11월 13일 기사와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쓴 이억기 장군 신도비명인 「증 병조판서 완흥군 시 의민 이공 신도비명(贈兵曹判書完興君謚毅愍李公神道碑銘)」이다.

 『승정원일기』에서는 이억기 장군의 후손 이명규와 관련하여 “양주 아차산리 그 선영(峨嵯山里渠先楸, 이억기 묘소)”, 「신도비명」에서는 “옷과 갓으로 공(公, 이억기)을 양주 아차산 아래 오향(午向, 정남향)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부인인 증(贈) 정경부인 영천 최씨는 현령으로 이름이 항지인 분의 딸로 같은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고 나온다.

 현대의 기록으로 보면, 『구리의 역사와 문화『(구리문화원, 1996년)에서는 구리시 아천동(아차산 자락)에 이억기 장군의 묘소가 있다고 나온다. 또 인터넷의 한 블로그에서는 구리시 아천동 산9-4번지에 묘소가 있다고 나온다. 그러나 그 일대를 몇 번 찾아갔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구리시 향토사 회장 이정원 선생은 워커힐호텔이 생기면서 묘소가 없어졌다고 구리문화원을 통해 전해 주었는데 그것이 가능성이 가장 많다.

 남해 칠천량에서 그의 시신은 호국 용(龍)이 되었을 듯하나, 옷과 갓만으로 만든 가묘조차도 워커힐 공사로 완전히 사라졌는지 혹은 잊혀져 알 수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게 된 사림이 이억기 장군이다. 죽어서도 마음 편히 쉬고 있지 못하다.

 현재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그를 기리는 유일한 기념물은 후손들이 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에 세운 ‘숭정대부 완흥군(이억기) 신도비’ 뿐이다. 최소 350여 년 동안 그의 가묘가 존재했던 곳이 아차산이다.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과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일대이다.

 아차산에서 비운의 주인공인 그를 한 번쯤 기억하고 추모해 보면 어떨까. 또 워커힐에서 워커 장군만 보지 말자. 아차산에서 1,500여 년 전 고구려 온달,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백제 개로왕도 보자. 조선 수군 영웅 이억기 장군도 보자. 그들의 삶과 죽음, 혼백이 머물렀던 공간이다.

 이억기 장군은 그 자신이 우리를 일본인이 아닌 우리로 살 수 있게 만든 위대한 명장이다. 민족의 영웅 이순신과 함께 승리했고, 그런 이순신을 만든 명장이다. 시호 의민(毅愍)은 임진왜란이 끝난 190년 뒤인 1788년 정조에 의해 내려졌다. 이억기 장군은 조선 시대에도 뒤늦게 찾았다.

 우리는 이순신의 승리는 기억해도 칠천량해전에서 죽은 그들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패전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그런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다 전사했다. 많은 장수와 최소 1만여 명의 충청·전라·경상도의 수군이 며칠 사이에 사망했다.

 아! 누구도 기억하려 하지 않으며, 그저 그들끼리 외로이 남녘 바다를 떠도는 그 영혼들을 누가 있어 위로해 줄까. 칠천량해전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먹먹하고 울컥 눈물이 난다.

 이순신 장군만 기억해서는 안된다. 그와 함께했던 장수들과 무명의 조선 수군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이제라도 아차산에서 그와 칠천량의 수군을 찾고 기억하자.

상부암 석조보살입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상부암 석조보살입상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상부암 석보살입상과 온달 장군 전사 장소

 다음 목적지는 ‘상부암(上浮庵) 석보살입상’이다. 워커힐호텔에서 10분 정도 걸린다. ‘광장동 제2경로당’을 지도에서 검색해 찾아가면 된다. 경로당 뒤편에 있다.

 안내판에 따르면, 신라 의상대사가 670년에 광나루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안위와 주민의 안녕을 빌기 위해 조성했다고 한다. 다른 구전에서는 옛날 큰 홍수가 났을 때 떠내려 왔다고 한다. 상부암이란 명칭은 유래이기도 하다.

 이 불상도 영화사의 ‘미륵석불입상’처럼 호분이 발라져 있었으나 최근 호분이 벗겨져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제작 시기는 신라말 고려 초라고 한다. 구석진 곳에 있으나 답사 때에 인근 주민이 참배를 하러 오는 것을 보면, 무언가 영험한 기운이 있는 듯하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한강 주변의 부군당들과 달리 공개된 불상이기 때문인 듯하다. 부군당은 거의 대부분 문이 닫혀 있고, 참배하는 사람들도 없다. 매년 특정 기념일에만 개방하기 때문이다. 석보살입상이 들어있는 전각에는 ‘상부관음전’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석불입상에서 나와 ‘광나루 터’ 표석을 찾아간다. 5분 거리에 있다. 광진정보도서관 왼쪽에 있는 리버힐오피스텔 앞 버스정거장 맞은편 한강쪽 보도에 세워져 있다. 광나루는 양진(楊津)·광장(廣壯)·광진(廣津)으로도 불린다.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강원도와 경상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나루터이다. 광나루 북쪽 언덕에는 공무 여행자가 머물 수 있는 광진원(廣津院)도 있었다.

광나루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광나루터 표석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숙종과 영조, 정조 등도 태종의 능인 헌릉(獻陵)에 갈 때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기도 했다.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 경기도 광주로 갈 때도,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갈 때도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다.

 『서울정도육백년 제3권』(이경재, 서울신문사, 1993)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하러 안동으로 출정할 때 광나루에서 강을 건너 문경 새재를 넘어갔다고 한다. 또 퇴계 이황이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할 때도 이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역사의 고전장』에 따르면, 역사학자 이병도와 아차산성을 답사하면서 “기록에는 없지만 온달은 수만 대군을 몰고와 워커힐 중턱에서부터 남쪽 장안동 사이에서 신라군과 격전을 치렀고 이곳 지세로 보아 온달은 광장교(현 광진교) 입구 근처에서 최후를 맞았을 것 같다”고 추정했다. 광나루에서 광진교에 이르는 공간이 고구려 온달 장군이 전사한 곳이라는 추정이다.

 아차산성 일대에서 온달 장군이 전사했다는 이야기는 많았으나, 이병도처럼 구체적으로 추정한 사례는 없다.

 패전해 죽었을지라도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열정, 평강공주의 사랑은 아름답다. 현재 광진교 위에 온달 장군 동상이라고 건립한다면, 광진교의 새로운 명물이 될 듯하다.

광진교 조망지점에서 본 올림픽대교와 롯데월드타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광진교 조망지점에서 본 올림픽대교와 롯데월드타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광나루는 1936년에 준공된 광진교와 1976년의 천호대교로 조선시대 나루터 기능은 없어졌다.

 고구려와 신라가 싸웠던 광나루 터와 광진교까지 가는 길옆 한강 위에는 강변북로가 지나간다. 그러나 다리 아랫길이라 덜 시끄럽고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강을 바라보며 가는 길이라 전망도 좋다.

 이 코스는 광진둘레길 중의 하나이다. 10분 정도 걷다보면 광진교가 나온다. 광진교는 한강을 건너기 위해 가장 처음 만든 한강대교 다음으로 건설된 오래된 다리다. 그러나 우여곡절이 많다. 6·25때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폭파되었다가 1952년 미군이 복구했고, 노후 등으로 1994년에 철거되었다가 2003년에 다시 건설되었다.

 광진교에는 녹지보행로가 따로 있다. 자동차와 떨어져 마음 편히 다리를 걸으며 한강을 즐길 수 있다. 다리 아래에는 ‘광진교8번가’라는 전망대도 있다. 세계에서 3개 밖에 없는 교각하부 전망대라고 한다. 라운지와 공연장도 있다.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지이기도 하다. 4월에서 10월까지는 12시~20시, 11월에서 3월까지는 12시~18시까지 운영된다. 월요일은 쉰다. 

광진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광진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강길에서 본 롯데월드타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강길에서 본 롯데월드타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위치 고증 논란으로 표석이 옮겨진 낙천정

 광진교를 건너가면 강동구 천호동이다. 광진구에 있는 ‘낙천정 터’를 찾아가기 위해 광진교를 천호동 방면으로 200미터 정도 가다가 되돌아 나왔다.

 강변에 있는 광진둘레길로 5분 정도 가면 천호대교, 다시 15분 정도 가면 올림픽대교, 다시 5분 정도 가면 잠실철교, 다시 10분 정도 가면 잠실대교가 나온다. 한강가라 경치가 좋다. 강을 바라보면 막힌 가슴이 뻥 뚫린다. 어제의 근심과 걱정도 오늘 흐르는 강물에 띄워 보낸다.

 잠실대교를 지나 300여 미터쯤 가다보면 ‘낙천정 지하도’ 표지판이 나온다. 굴다리를 지나 계단 위로 나와 오른쪽 길을 따라 100미터 가면 강변자동차공업사 오른쪽에 정자 하나가 보인다. 조선 시대 낙천정 정자는 아니다.

 아파트 주민에 따르면, 현대강변아파트 자리가 ‘낙천정 터’라는 주장으로 인해 아파트를 건축할 때 허가조건으로 기부채납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광진구청 소유이다.

 『서울육백년사(문화사적편)』(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시, 1987년)에서도 이곳을 ‘낙천정 터’로 보았다. 『광진의 문화유산 나들이』(광진문화원, 1998년)에 따르면, “1987년 한강변 문화유적 발굴조사에서 낙천정이 있던 곳을 확인해 1991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인 팔작지붕 형태의 현 낙천정 건립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리가 아니라는 논란이 일어 인근 다른 곳에 ‘낙천정 터’ 표석이 새로이 설치되어 있다. 자양현대3차아파트 301동과 302동 길 사이에 있는 301동 담장에 붙어있다. 한솔리베로아파트 놀이터 맞은편이다.

 표석에는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지은 ‘이궁(離宮) 낙천정(樂天亭)’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세종은 태종과 의논하여 대마도 정벌군을 파병하였고, 이기고 돌아온 정벌군의 환영식을 베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표석 설치자가 서울시인지 광진구인지, 혹은 어느 단체나 개인지는 알 수 없다. 써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 설치된 표석 내용에도 오류가 있다. 즉 이곳 낙천정에서 세종과 태종이 대마도 정벌군 파병을 논의하지는 않았다.

한강과 구름낀 서울 하늘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강과 구름낀 서울 하늘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낙천정(현대강변아파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낙천정(현대강변아파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상왕 태종 휴식공간이며 대마도 정벌군 환영터인 낙천정

 낙천정(樂天亭)은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의 「낙천정기(樂天亭記)」에 따르면, 태종이 노닐던 곳으로 “하늘이 정한 명승지”이다. 세종 14년(1432년)에 지은 화양정(華陽亭)과도 가깝다.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있을 때 머물기 위해 ‘엎어놓은 솥처럼 생긴’ 대산(臺山) 동북쪽에 이궁(離宮, 별궁)을 짓고, 대산 위에 세운 정자이다.

 세종 1년(1419년)에 완공하면서 좌의정 박은(朴訔)에게 명해 지은 이름이 ‘낙천정’이다. 박은은 『주역』·「계사전 상(繫辭傳上)」의 “하늘의 이치를 즐기고 천명을 아니 걱정하지 않으며 땅을 평안히 여기고 어짐을 두텁게 하기에 사랑할 수 있다(樂天知命  故不憂 安土敦乎仁 故能愛)”에서 ‘낙천(樂天)’ 두 글자를 따서 지었다. 낙천정은 태종이 은퇴해 쉬고 즐긴 공간이다.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8월 4일에 따르면, 상왕 태종과 세종은 대마도를 정벌하고 돌아온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 1360~1425) 등 장수들을 낙천정에 맞아들여 승리와 노고를 위로했다.

 대마도 정벌은 세종 1년(1419년) 왜구들이 충청도 비인, 황해도 해주 등지를 잇따라 침범하자 태종이 세종과 신하들을 불러 대책회의를 하고 결정해 추진했다. 일부 현대의 문헌에서는 낙천정에서 회의했다고 하나 회의장소는 낙천정이 아니다.

낙천정 안내판(자양현대3차아파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낙천정 안내판(자양현대3차아파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5월 14일에 의하면, 세종이 상왕 태종의 별궁인 수강궁(壽康宮, 현재 창경궁 자리에 있던 1418년 건립)에 문안 갔고, 같은 날 태종이 주재해 회의한 것을 보면, 대마도 정벌 회의 장소는 수강궁으로 추정된다. 또 낙천정에서 회의했다는 사료도 없다.

 실록의 같은 날 대마토 정벌 관련 회의 기록을 보면, 태종과 조말생(趙末生, 1370~1447)만이 대마도 정벌을 적극 주장했고, 다른 신하들은 소극적이었다. 결국 군권을 갖은 상왕 태종의 의지에 따라 정벌이 결정되었다. 같은 회의에서 실제 전투를 책임질 삼군도체찰사로 이종무를 임명하고 출전할 다른 장수도 임명했다.

 20일에도 태종은 수강궁에 있었고, 태종이 전투 전반을 지휘·감독할 삼도도통사(三道都統使)로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유정현을 도와 실행하는 삼군도절제사(三軍都節制使)로 최윤덕(崔潤德)을 임명했다.

 정벌군의 전선은 227척, 군사 17,285명이었다. 군량은 65일분을 준비했다. 정벌군은 왜구 배 129척을 빼앗고 20척을 제외하고 불태웠고, 집 1,939호를 불태웠으며, 114명의 머리를 베고, 21명을 포로로 잡았다.

 토벌에 따라 대마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가 항복의사를 표명하자 태종은 조말생으로 하여금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글을 짓게 했는데, 그 글 내용에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한 섬으로 본래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헌에 실려 있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라며 우리 땅임을 대마도주에게 다시 확인케 했다.

 정벌군은 7월에 거제로 돌아왔다.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8월 4일에는 이종무와 참전 장수들이 돌아오기에, 태종과 세종이 각각 신하를 보내 한강가에서 영접하고 위로하게 하고, 낙천정에 나가 그들을 기다려 만나 주연을 베풀었다고 나온다. 태종은 세종 2년(1420년) 1월 4일, 대궐을 떠나 아예 낙천정으로 옮겨갔다.

 낙천정은 태종이 사망한 뒤에 세종이 정의공주(貞懿公主)와 그의 남편 안맹담(安孟聃, 1415~1462)에게 두모포 앞 저자도(楮子島)와 함께 주었으며, 공주는 또 작은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주었다고 한다. 

 ‘낙천정 터’는 『서울육백년사(문화사적편)』에 따르면, 세조 때 이후 양잠을 잠려하기 위한 잠실, 인조 때에는 채전(菜田)으로 이용되었고, 정자가 퇴락해 없어진 뒤에는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관우의 영정을 안치하고 ‘어서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양경태 화양동 자치지원관에 따르면, 낙천정 터 근처에서는 신석기 유물도 발굴되었다고 한다. 낙천정 근처 신석기 유적은 지금은 잊혔으나, 광나루 건너편 암사동 유적은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지이다. 낙천정 일대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에게 선호된 명당이다. 

의인 신형수 추모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의인 신형수 추모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2000년 동안의 만행, DNA에 새겨진 왜구의 침략성

 『왜구토벌사』(국방군사연구소, 1993년)에 따르면, 왜구(倭寇)는 ‘왜(倭)’와 ‘구(寇)’의 합성어이다. ‘왜’는 고대 일본에 대한 호칭이고, ‘구’는 떼도둑 또는 겁탈함을 뜻한다. 따라서 ‘왜구’는 왜인들의 집단 도둑행위 또는 왜인들의 도둑집단 내지는 일본에 의해 저질러진 침구행위를 뜻한다. 이들 왜구는 삼국시대부터 왜구들이 한반도에 횡행했고,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최초의 왜구 침략은 신라 박혁거세 8년(BC50년) 부터이다. 빈번한 침략에 지친 신라 유례왕은 295년에 바다를 건너가 왜국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해전에 익숙하지 못한 것과 백제와의 합동작전을 신뢰하지 못한 신하들의 반대로 중단했다. 신라 실성왕 7년(408년)에도 바다를 건너 왜국을 공격하려 했으나, 신하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대왕비문에도 왜구가 언급된다.

 대마도는 언제나 왜국과 왜구의 전진기지였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피해를 당했음에도 대마도를 공략한 사례는 단 두 번에 불과하다. 고려말 창왕 원년(1389년) 박위(朴葳, ?~1398)가 100여 척을 이끌고 쳐들어가 300여 척을 불태운 것과 조선 태종·세종 때 정벌뿐이다.

 신라, 고려와 조선 모두 바다를 건너가 적극적인 토벌을 하지 않았다. 늘 육지로 끌어들여 싸우거나, 침략당한 뒤 바다에서 격퇴했다. 그로 인해 한반도 남부 및 중부 지역은 때로는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비거나 폐허가 되는 일이 허다했다.

 또 매번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라, 쌀과 각종 물건 등을 주어 그들의 침략을 억제하려는 전략으로 일관했다. 그런 까닭에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은 우리 역사에서 큰 의의를 갖고 있다.

 2천년 이상의 왜구 출몰로 보면, 왜구는 침략DNA가 있는 사람들로 볼 수 있다. 또한 언제나 큰 피해를 입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과 적대감을 갖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의 방화, 노략질 결과 때문이다.

정진아 작가의 작품 '마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정진아 작가의 작품 '마음'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관료주의의 관행이 담긴 형식적인 ‘의인 추모비’

 낙천정을 지나 ‘의인(義人) 신형수(申亨秀) 추모비(追慕碑)’를 찾아간다. 광양고등학교, 광양중학교를 거쳐 잠실대교와 연결된 큰길인 자양로로 나간다. 광양중학교 정문 옆 담장에는 여러 시화(詩畫)가 그려져 있다. 학생들의 시부터 김영랑의 「돌담에 속사이는 햇살」, 이육사의 「꽃」, 김소월의 「가는 길」 같은 시들이다. 자양2동 주민센터에서 조성했다. 천천히 걸어가며 읽으면 오랜 걸음에 따른 피로가 가신다.

 광양중학교 바로 위에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 구의역 방향으로 130여 미터 가면 큰길 우측에 아이본동물병원이 있다. 그 앞 횡단보도 옆에 작은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2003년에 서울시에서 세웠다. 비석은 사람이 두 팔을 하늘을 향애 벌린 모습이다. 앞면에는 “義人 申亨秀 追慕碑 (1972年 2月 5日生)’, 뒷면에는 “98.1.10. 위기에 처한 시민을 돕기 위해 버스탈취 강도범을 제지하다 이곳에서 자신을 희생함”이라고 되어 있다.

 이 추모비 속의 ‘의인(義人)’ 표현은 「의사상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의사상자법)」에 따른 표현이다. 법에 따르면 의사상자(義死傷者)는 “직무 외의 행위로 위해(危害)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신체 또는 재산을 구하다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은 사람”이다. 이 추모비는 법에 따른 기념사업으로 세워진 것이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28세 신형수씨는 승합차를 훔쳐 도망치던 사람을 쫓아가다 사망했다.

 세상이 불의할수록 의로운 사람들이 많이 생겨난다. 그럴수록 불행한 세상이다. 그래도 신형수씨와 같은 의인이 있어 세상이 조금은 바르게 돌아가고 살만한 세상인 듯하다.

 추모비를 보면 너무 형식적이다. 앞면은 한문으로, 뒷면은 그의 삶을 쓰다가 만 듯하다. 이왕이면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또 그의 삶을 조금 더 자세히 기록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를 기획하고 제작한 기관은 정녕 ‘의인’의 뜻을 알기나 하는 것일까. 관행에 절은 관료주의 냄새가 꽉 찬 추모비다. 그런 추모비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럽다.

 만삭의 아내를 둔 몸으로 시퍼런 목숨을 던졌는데, 세상은 그저 형식에 갇혀 날림의 추모비를 만들어 세웠다. 그가 귀한 집 자식이었다면, 그가 세상이 알아주는 명문 출신이었다면 이렇게 대했을까. 안타깝기보다 한숨이 난다.

 의인이 의인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부정부패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 의인과 그 유족에 대한 제대로 된 대우도 필요하다. 현재 법은 다른 법에 비해 처우가 부족하다. 대개 의인은 한 사람이고, 다른 법의 적용을 받는 사람들은 숫자가 많아 그런 듯하다. 떼법이 통하는 세상은 정의를 왜곡하게 된다.

 「의사상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의사상자법)」과 다른 법률과 비교해 의인과 그 유족에 대한 처우를 적극적으로 개선해 줄 것을 촉구한다.

 추모비를 지나면, 동서울우편집중국이 나온다. ‘세계를 하나로’(최기원 작)란 동상과 ‘마음’(정진아 작) 조형물이다. ‘마음’은 눈에 확 띄고 의미도 있다. 작품 설명에 따르면, “우체국의 상징인 제비가 선물상자를 입에 물고 날아오르는 순간을 형상화”해다고 한다. 우리를 따뜻하게 하는 살면서 가끔씩 듣거나 본 글귀들이 춤을 추듯 허공을 날아간다. 제비처럼 날아가는 문장들을 읽어보면 힘이 난다.

 이 작품을 설치하게 한 우체국장은 틀림없이 우체국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겪으며, 우체국이 하는 일의 핵심을 가장 잘 아는 분인 듯하다. 빌딩 마다 세워진 알 수 없는 조형물에 비한다면, 이 작품들을 만든 조각가도 우체국을 통해 주고 받았던 편지나 소포 등의 의미를 아주 잘 아는 듯하다. 글귀를 보면,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이 담긴 글귀들이다. 그저 몇몇 글귀를 모은 것이 아니다. 작가의 열정이 느껴진다.

 ‘신형수 의인 추모비’를 보았을 때 느꼈던 우울함이 가신다. 이로써 아침 일찍 시작된 화양동 화양정부터 어린이대공원, 아차산성, 낙천정에 이르는 10시간 동안의 고단한 걷기를 마친다.

 광진구에서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온달, 광개토왕과 장수왕, 백제와 신라, 그리고 일본을 정벌하려는 태종의 마음을 찾아보라. 한강길에서 흐르는 물에 속된 마음, 삿된 마음 던져 보라. 새로운 하루에 힘이 될 것이다.

* 영화사 : 광진구 구의동 9번지
* 아차산 등산로 입구 : 광진구 구의동 3번지
* 아차산 만남의 광장 : 광장동 370-3번지
* 아차산 생태공원 : 광진구 광장동 370번지
* 아차산성 : 광진구 광장동 5-11번지
* 워커힐호텔 : 광진구 광장동
* 상부암 석보살입상 : 광진구 광장동 100번지. 워커힐현대빌 주차장 옆, 경로당 뒤 
* 광나루 터 표석 : 광진구 광장동 556번지. 리버힐오피스텔 앞 버스정거장 맞은편 한강쪽 보도
* 광진교 리버뷰 8번가 : 강동구 구천면로 77번지
* 현재 낙천정 정자 : 광진구 자양동 673번지. 현대강변아파트 102동 1-2호 라인 우측
* 낙천정 표석 : 광진구 자양동 758번지. 자양현대3차아파트 301동과 302동 사잇길 담장, 한솔리베로아파트 놀이터 맞은 편
* 의인 신형수 추모비 : 자양동 681번지. 아이본동물병원 앞 횡단보도 근처 보도
* 동서울우편집중국 : 광진구 자양동 680-65번지. 정문 좌측 우체국 관련 조형물과 동상
* 숭정대부 완흥군 신도비 : 이억기장군 신도비, 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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