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공원 안 불이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사육신공원 안 불이문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일요서울ㅣ박종평 객원기자] 이번 동작구 탐방은 지난 1편의 흑석역~노들역 구간에 이어 사육신공원에서 노량진역 근처 ‘사충서원 터’까지이다. 이 구간에는 사육신공원, 노량진역, 조선 시대 정자였던 월파정, 장택상 전 국무총리 별장 터, 사충서원 터가 있다. 사육신공원에서 산책과 휴식 등을 하면서 간다면 2시간이면 아주 넉넉하다.

사육신공원과 영화 『관상』과 『광대들:풍문조작단』

 먼저 사육신공원을 찾아간다. 지난 1편에 이어 걷는다면, 노들나루공원에서 한강 방향이 아닌 큰길을 따라 노량진역 방향으로 170여 미터를 가면 공원 끝부분이 나온다. 다시 300미터 정도 가면 사육신공원 정문이 나온다.

 사육신공원만 간다면 9호선 노들역 1번 출구에서 노량진역 방향으로 가거나, 1호선과 9호선 노량진역 1·2번 출구에서 나와 노들역 방향으로 큰길을 따라 걸으면 된다.

 노들역 방향에서 70미터 정도 가면 ‘금녕김씨 충의공파 대종회’란 금색 글자가 벽에 붙어 있는 흰색 건물, ‘백촌 빌딩’이 보인다. 그 아래 ‘충의공 김문기(金文起) 선생 사육신 현창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백촌’은 김문기의 호이다. 이 건물 이름과 ‘충의공 김문기’ 비석이 사육신공원이 가까이 있음을 알려준다.

 1970~80년대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웠던 세조의 쿠데타와 사육신(死六臣)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면, ‘충의공 김문기 선생 사육신 현창기념비’는 의아한 비석이다. 그 당시 배웠던 사람들이 기억하는 사육신은 성삼문(成三問, 1418~1456)·박팽년(朴彭年, 1417~1456)·이개(李塏, 1417~1456)·유성원(柳誠源, ?~1456)·하위지(河緯地, 1412~1456)·유응부(兪應孚, ?~1456)이다. 그런데 ‘김문기 선생 사육신 현창기념비’라고 하니 김문기(金文起, 1399~1456)가 사육신인지 어떤지 의문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 의문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길 오른편에 ‘사육신공원’이라는 흰색 간판과 함석헌 선생이 쓴 사육신 관련 글이 기와를 두른 담장 벽에 새겨져 있다.

 “수양대군이 불러온 피바람. 그렇지만 세조의 피바람 뒤에 우리는 ‘의(義)’를 알았다.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를 알았겠는가. 이것도 고난의 뜻이지 않을까. ‘고난’ 뒤에는 배울 것이 있다.” (함석헌, 「씨알의 소리」 중에서)

 사육신은 현실의 권력에 패배했으나 역사에서는 승리한 사람들이다. 불의한 권력에 영합해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들과 저항해 영원을 산 사람들의 차이를 보여준다. 또 ‘의’에는 언제나 고난이 따르고, 그런 결정을 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런 이들이 있어 역사는 언제나 미래로 가기 마련이다.

 사육신공원에서 휴식과 산책, 관련 역사를 알고 싶다면, 가기 전에 미리 “내가 왕이 될 상인가?”란 대사로 널리 알려진 영화 『관상』(감독 한재림, 주연 송강호·이정재)과 영화 『광대들:풍문조작단』(감독 김주호, 주연 조진웅·손현주)을 보고 가면 그 시대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두 영화는 세조의 쿠데타와 사육신, 사육신을 만든 책이라고 할 수 있는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물론 허구가 많다. 영화 내용이 사실인지 어떤지는 영화를 본 다음 더 깊은 관심이 있으면 관련 역사 서적을 읽으면 된다.

사육신공원 안 육각비 중 하위지 시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사육신공원 안 육각비 중 하위지 시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수양대군, 권력욕이 권력을 만든다

 1450년 2월, 우리 역사 아니 세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으로 평가될 수 있는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이 재위 32년 만에 54세로 승하했다. 그 직후 세자였던 문종(文宗, 1414~1452, 재위 1450~1452)이 왕위를 이었다. 그러나 병약했던 문종은 1452년 5월, 39세의 나이로 재위 2년 3개월 만에 승하했고, 그의 외아들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태조 이성계가 창업한 조선에서는 그의 아들 태종에 의해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왕자의 난이 일어나 골육상쟁의 큰 희생을 치렀다. 태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세종은 비극을 극복하며 태평성대를 열었다. 그러나 세자 시절부터 병으로 고생했던 문종의 존재는 문종 이후의 피바람을 이미 품고 있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설상가상 문종은 너무 일찍 승하했고, 그의 외아들 단종은 너무 어렸다.

 게다가 단종의 어머니는 세자비였을 때 단종을 낳은 뒤 산욕열로 사망했고, 대왕대비도 사망해 왕실에서는 그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단종 곁에는 세종과 문종의 신임을 받았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1387~1453)과 문신(文臣) 출신으로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육진(六鎭)을 개척한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1383~1453) 등의 신하들과 문종의 동생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셋째 아들, 1418~1453)과 금성대군(錦城大君, 세종의 여섯째 아들, 1426~1457)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수양대군(훗날 세조, 세종의 둘째 아들, 1417~1468, 재위 1455~1468)의 권력욕과 전략, 세력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수양대군은 강한 권력욕과 세종 시절부터 다양한 국정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가 최고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칼을 뽑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 등의 일파는 마침내 단종을 보호하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순식간에 숙청했다. 이 사건이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 10월 10일, 계유년에 발생한 어려움을 평정한 것)’이다. 왕권 찬탈을 위한 쿠데타였다. 수양대군은 한명회(韓明澮, 1415~1487) 등이 미리 준비한 살생부(殺生簿, 죽이고 살릴 사람 명부)에 따라 반(反)수양대군 세력을 살해했다. 수양대군의 동생으로 경쟁 관계에 있었던 안평대군 역시 계유정난의 영향으로 강화도로 귀양 가서 죽임당했다.

 몇몇 학자들은 수양대군의 쿠데타를 왕권(王權)이 신권(臣權)의 확대를 견제하려 했던 과정으로 보기도 한다. 이는 권력욕이라는 텍스트에 가려진 인간의 욕망을 누락한 해석으로도 볼 수 있다. 역사상 모든 쿠데타는 권력 쟁취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계유정난과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은 수양대군의 권력욕과 그와 결탁한 신흥세력의 권력욕이 추동한 권력투쟁에서의 비롯된 전형적인 전근대적 피바람이다. 계유정난 직후 수양대군은 영의정이 되어 국정을 총괄했고, 그의 동조자들인 정인지(鄭麟趾, 1396~1478)·신숙주(申叔舟, 1417~1475) 등은 요직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단종 복위운동, 명나라 황제의 복귀와 단종의 죽음

 1455년 윤6월, 금성대군 역모 사건이 고발된 기회로 수양대군은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내몰고 즉위했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지 20개월 만이다. 그가 세조이다. 수양대군의 피바람과 정통성 문제는 언제나 위태로운 씨앗을 품고 있었다. 그 씨앗까지 제거한 것이 1년 뒤인 1456년 6월의 이른바 ‘단종복위운동’이다.

 1456년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문신이었던 성삼문(예방승지)·박팽년(형조참판)·이개(집현전 부제학)·유성원(직집현전)·하위지(예조참판) 등과 무신인 유응부(동지중추원사)·박쟁(도총관), 성승(성삼문의 아버지, 도총관), 그리고 박중림(박팽년의 아버지, 대사헌·공조판서·형조판서), 권자신(호조참판, 현덕왕후 동생), 김문기(공조참판) 등이 함께 추진했다.

 그들은 상왕이었던 단종이 명나라 사신을 자신이 머물던 창덕궁에 초대해 연회를 베푸는 것을 기회로 연회장에서 세조를 처단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연회를 우려했던 세조 일파는 세조를 제거할 실행자였던 ‘칼 찬 무신’인 유응부·박쟁·성승의 참석을 배제했다.

 운동 세력은 무력으로 세조를 제거하려던 계획이 어그러지자 강경론과 연기론으로 논쟁을 하다가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를 불안히 여긴 가담자 김질(金礩)이 거사 계획을 누설해 세조에 의해 붙잡혀 처형당했다.

 박팽년은 문초 과정에서 고문을 당해 6월 7일 감옥에서 사망했고, 성삼문·성승·유응부·박쟁·이개·하위지·박중림 등은 군기감(軍器監, 뒤에 군기시, 현 서울시청) 앞길에서 거열형(車裂刑, 두 팔과 두 다리를 수레에 묶어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했다. 유성원은 자신의 집에서 자결했다. 법과 세조의 의지에 의해 그들의 가족 중 거사와 무관한 아버지와 아들도 교수형을 당했고, 처와 딸들은 세조의 쿠데타에 가담해 공신이 된 사람들의 노비로 배분되었다. 참혹한 ‘멸문지화’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이들의 머리를 장대에 꽂아 3일 동안 시장에 걸어놓게 했다. 이 사건 직후 세조는 세종의 싱크탱크였던 집현전을 폐지했다. 세조를 지지했던 몇몇 집현전 출신이 있었음에도 성삼문 등 집현전 출신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상왕 단종은 ‘왕’에서 ‘군(君)’으로 강등되어 ‘노산군’이 되었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또 문종의 왕비이며 단종의 어머니였던 현덕왕후 권씨는 사망한 지 오래되었음에도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이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폐위되고 그녀의 묘소 소릉(昭陵)도 파헤쳐 졌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소릉의 파괴는 세조가 단종을 죽인 뒤,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죄 없는 아들을 죽였으니, 세조의 아들(세자)도 죽이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세조가 꿈에서 깨자마자 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꿈속의 현덕왕후의 말에 분노해 소릉을 파헤치게 했다고 한다.

 이듬해인 1457년 7월,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한다는 고발로 인해 금성대군이 처형당했고, 10월에는 16세의 단종 역시 끝내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강문식 외, 민음사, 2014년)에 따르면, 단종의 죽음은 단종복위운동은 물론 똑 같은 시기의 명나라 황제 교체 영향도 있었다고 본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십여 년 동안 황제로 있다가 1449년에 상황(上皇)으로 물러났던 정통제(正統帝, 재위 1435~1449, 1457~1464)가 조선에서의 단종복위운동 다음 해인 1457년, 자신의 후임 황제였던 경태제를 폐위시키고 다시 황제로 복위했다. 세조와 그들의 측근 입장에서 단종복위운동과 세조에 대한 저항이 강한 상황에서 명나라 정통제의 복귀는 단종의 부활 가능성을 예견케 하는 사례였다. 세조와 측근들은 단종을 그들을 위협하는 저항의 근본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을 듯하다.

사육신공원 안 유응부(오른쪽)와 이개(왼쪽) 묘비와 묘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사육신공원 안 유응부(오른쪽)와 이개(왼쪽) 묘비와 묘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사육신공원 미스터리 : 사육신, 7개의 묘와 8개의 묘비

 사육신은 그들이 죽은 뒤 236년 만인 1692년(숙종 18년)에 복권되었다. 현재 사육신공원은 1978년 서울시에서 묘역을 확장하고, 의절사(義節祠), 불이문(不二門), 홍살문(紅箭門), 비각(碑閣) 등을 새로 짓고 단장한 것이다.

 공원 정문으로 들어가면 홍살문이 서 있다. 왕릉이나 궁궐, 관아 등의 입구에 세우는 문이다. 나무에 붉은 칠을 했고, 문 가운데 태극 문양과 두 개 혹은 세 개의 창가지 장식이 있다. 다시 몇 걸음 더 가면 불이문이 나온다. 불이문은 불교 건축에서 유래했다. 다른 명칭은 해탈문(解脫門)이다.

 그 안쪽에 의절사가 보인다. 불이문 왼쪽에는 태학사 조관빈(趙觀彬)이 비명을 짓고 당나라 서예가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를 집자해 새긴 ‘유명조선국사육신묘비(有明朝鮮國死六臣墓碑, 비문 1747년, 묘비 1782년)가 들어있는 ‘사육신 신도비각’이 있다. 오른쪽에는 1955년에 세워진 육각형으로 된 ‘사육신 묘비’가 있다. 상단에는 시인 김광섭이 짓고 김충현이 쓴 비문, 하단에는 사육신들의 시와 이름을 손재형이 쓴 것을 각각의 면에 새겨 놓았다. 의절사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의절사 뒤편 오른쪽에 난 문으로 나가면 사육신 묘역이 있다. 사육신 묘역 맨 위는 지금은 없어진 민절서원의 주춧돌이 있다. 1681년 사림에 의해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건립되고, 1691년 사육신이 복권되면서 민절사(愍絶祠) 편액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1692년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이 되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정책으로 없어졌다.

 불이문 앞쪽 “사육신묘(死六臣墓)” 안내판에는 “본래 이 묘역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그 후 하위지, 류성원, 김문기의 허묘도 함께 추봉하였다”고 나온다. 공원 안 다른 “사육신묘(死六臣墓)”안내판도 비슷하다. 두 안내판 속 인물의 수를 보면, ‘사육신(死六臣)’이 아니라 ‘사칠신(四七臣)’이 된다. 즉 6명이 아니라 7명이 언급되고 있다. 의절사 안 위패도 7개이다. 이는 영조 때 신도비문과 1955년 사육신비의 6명, ‘사육신공원’이름과도 다르다.

 의절사 뒤 묘역 안을 살펴보면 묘는 7개, 묘비는 8개가 있다. 묘역으로 가면 가장 먼저 무덤이 없이 글자가 없어진 묘비 만이 외로이 있다. 묘는 흔적조차 없다. 이 묘비 뒤쪽에 사육신의 묘가 있다. 공간적으로 4개의 묘와 3개의 묘 그룹으로 구분된다. 4개 그룹의 묘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이개·유응부·박팽년·김문기의 묘와 묘비가 있다. 3개 그룹의 묘는 왼쪽부터 하위지·성삼문·유성원의 묘와 묘비이다.

 그런데 허목(許穆, 1595~1682)이 쓴 「육신의총비(六臣疑塚碑)」에 따르면, 육신총(六臣塚)이 노량진 아래 강기슭 위에 있는데 비석에 ‘박씨(朴氏)·유씨(兪氏)·이씨(李氏)·성씨(成氏)의 묘’라고 새겨져 있고, 가장 남쪽에 박씨(박팽년), 그 북쪽에 유씨(유응부), 더 북쪽에 이씨(이개), 더 북쪽에 성씨(성삼문), 또 그 뒤로 10여 보 거리에 또 성씨의 묘가 있는데, 뒤에 있는 성씨 묘는 성승(성삼문의 아버지)의 묘라고 한다고 나온다.

 허목 기록으로 보면, 허목 시대에는 사육신 중 박팽년·유응부·이개·성삼문, 그리고 성승의 묘와 묘비만 있었고, 이들 묘를 통칭해 ‘육신묘’라고 했던 듯하다. 『조선일보』(「일편(一片)의 사심(私心)도 안가진 지조에 살은 선인(先人)」, 1935년 9월 6일)에 따르면, 1935년 즈음에는 성승의 묘는 흔적조차 없어지고, 글자가 흐려져 알아 볼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이로 보면 조선 시대에는 성승의 묘가 있었으나, 근대에 묘가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허목 등의 기록으로 보면, 현재의 묘소 위치들은 1970년대 묘역 정화사업을 하면서 하위지와 유성원, 김문기의 허묘와 묘비를 추가하면서 기존의 4개의 묘 위치를 변경했다고 볼 수 있다.

 복원 및 묘소 추가시 본래의 묫자리와 묘비 위치를 조금 더 세심하게 고증해 반영했어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 묘가 없는 성승 묘도 함께 복원했으면 더 좋았을 듯하다.

 현재 묘역의 묘와 묘비를 정리해 보면, 묘비는 총 8개이다.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묘비 1개와 기존에 널리 알려진 사육신 묘비 6개, 그리고 김문기 묘비이다. 묘는 7기이다. 묘비는 있으나 묘가 없는 1기 때문이다.

사육신묘의 죽음과 시신 수습

 일부 자료에서는 사육신이 용산 새남터에서 처형당했다고 나오나, 『세조실록』에 따르면 현재 서울시청 앞길에서 처형되었다.

 이들의 처형과 이들 가족에 대한 처벌 근거와 기준은 『세조실록』(세조 2년 6월 5일)에 따르면, 명나라 법률인 『대명률(大明律)』이다. “모반(謀反)과 대역(大逆) 죄인은 공모자의 경우까지도 주범과 종범 모두 능지처사(凌遲處死)한다”는 규정이다.

 명나라에서 ‘능지처사’는 머리와 팔, 다리, 몸통 등 6부분으로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거열(車裂)’이라 부르고 두 팔과 두 다리를 각각 수레에 매여 찢어 죽이는 방식이다. 명나라의 능지처사와는 차이가 있다. 게다가 이들의 경우, 자른 머리를 장대에 꽂아 3일 동안 시장에 걸어놓게 했다.

 『숙종실록』 숙종 5년(1679) 9월 11일에는 “성삼문 등의 육신(六臣)이 죽은 뒤 어떤 의사(義士)가 이 강의 남쪽 언덕에 시체를 거두어 묻고 돌을 세워 표시했으나, 감히 그들의 이름은 쓰지 못하고 다만 모씨(某氏)의 묘(墓)라고만 써 놓았는데, 그 무덤이 지금은 모두 허물어졌다”고 한 내용이 나온다.

 ‘어떤 의사’라고 한 표현에는 시신도 드러내 놓고 수습할 수 없었던 무자비한 탄압의 상황이 들어있다. 22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수습한 사람이 언급되지 않는 까닭도 그때까지도 사육신은 여전히 금기 대상, 금기어나 다름없었던 시대 분위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운동 직후에는 몸이 찢기고 처형된 인원도 많았다. 효시(梟示)까지 하는 상황에서 누구도 선 듯 나서서 그들의 찢긴 시신을 각각의 사람에 맞춰 수습하는 것은 어려웠을 듯하다. 또한 그 행위 자체가 반역자에 동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놓고 할 수도 없었을 듯하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수습했다는 기록도 남기 어려웠을 듯하다.

 300년이 다 된 1747년에 작성된 ‘신도비문’에서야 ‘어떤 중’ 또는 우리나라 최초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했고, 뒤에 생육신(生六臣)이 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몰래 수습해 노량진의 이곳에 묻었다고 나온다.

 운동 당시 실존 인물이었던 김시습이 300년 뒤에야 수습자로 언급되나 ‘신도비문’ 이외에는 그 이전에 김시습이 수습했다는 기록은 없다.

 단종의 모후 현덕왕후의 추복(追復)을 주장했고, 운동 당시의 인물인 김시습과 긴밀히 교류했으며, 훗날 김시습과 함께 생육신(生六臣)이 된 남효온의 『육신전』에도 관련 언급은 없다.

 그래서인지 허목(許穆)이 쓴 「육신의총비」에는 육신의 장례를 치루고, 비석을 세운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남효온이 『육신전』을 상세히 지었으면서도 “장지를 말하지 않는 것은 어떤 까닭인가?”라고 되묻기도 했다.

 이는 남효온 생존시에도 장지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거나, 남효온이 알면서도 숨겼을 가능성을 뜻한다. 남효온 생존 때까지도 장지를 찾아가거나 추모하는 행위 자체가 위험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까닭일 수도 있다. 또 김시습이 했다고 해도 『육신전』에 직접 기록했을 경우 김시습에 피해가 갈 수 있기에 숨겼을지도 모른다.

 사육신묘가 진짜 사육신이 묻혀있던 아니던, 또 그저 전설처럼 전해져 온 것이든 어떻든 사육신묘의 존재는 누군가 그리고 세조의 쿠데타를 반대했던 사람들의 용기가 만든 결과물이다. 사육신의 신념을 존경하고, 불의에 분노했던 사람들의 피눈물이 응고된 묘들이다.

 사육신 묘에서 누가 사육신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보다 그들의 신념과 용기, 또 그들의 비참한 죽음을 슬퍼하며 그들의 찟긴 시신을 남몰래 수습했던 사람의 용기를 떠올려 본다. 진정한 용기란, 참된 정의란 무엇인가?

500년 내려온 ‘유응부 사육신론’

 1970년대 말 국사편찬위원회는 왜 유응부를 ‘사육신’에서 제외했을까? 위원회는 어떤 근거로 김문기를 ‘사육신’에 포함했을까?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남효온의 『육신전』, 국사편찬위원회의 회의록, 당시 언론지상에서의 논쟁, 관련 논문을 살펴보면서 위원회의 결정이 면밀한 학문적 연구와 검토를 바탕으로 내린 결정으로 보기에 어딘가 허술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문기가 단종복위운동 과정에서 사육신만큼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아니다. 김문기는 사육신 그룹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던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사육신 그룹과 비교하면, 그는 재상급 인물로 중간간부급의 사육신과는 그 급이 다르다. 또 외곽에서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물리력까지도 갖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사육신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한계가 있는 듯하다. 어떤 일을 할 때든 그 그룹을 대표하거나, 이끌거나, 정신적·물질적 지원 및 후원을 하는 큰 인물과 실제 일을 기획하고 추동하는 핵심그룹이 있다.

 실록 기록을 살펴보면, 핵심그룹은 기록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가 있으나 분명히 존재한다. 반복적,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들이다. 그들 중 5명은 여러 기록에서 가장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김문기와 유응부가 기록에 따라 함께 존재하기도 하고, 따로따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세조실록』에서 명확히 특정 인물들을 ‘사육신’으로 지목하지도 않았다.

 ‘육신’이 관찬 역사서인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운동 후 약 100년, 남효온의 『육신전』이 이미 지어진 뒤인 『인종실록』 인종 1년(1545년) 4월 9일에 처음 언급된다. 시강관(侍講官) 한주(韓澍)는 “성삼문·하위지·박팽년·유응부·이개·유성원 등이 난(亂)을 꾀하다가 주살(誅殺)되었습니다. 대체로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물은 이런 때 많이 나오며, 저 육신(六臣)은 그때는 대죄(大罪)를 입어 마땅하나, 그들의 본심을 논하자면 옛 임금(단종)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그들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충의(忠義)를 재평가했다.

 한주는 유응부를 포함해 6명을 언급하고 이들을 ‘육신’이라고 불렀다. 이때 김문기는 언급되지 않는다. 한주의 주장은 『육신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실록의 이 육신 기록이 관찬 사료에 언급된 첫 기록이라는 점이다.

 다시 100년이 지난 1652년 『효종실록』 효종 3년 11월 13일에도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여섯 신하”로 나온다.

 50년이 지난 1703년 『숙종실록』 숙종 29년 10월 13일에도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6신(六臣)이 있고, 살아 있으면서 의리를 지킨 이로는 원호(元昊)·김시습(金時習)·이맹전(李孟專)·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 및 조여(趙旅) 여섯 명이 있다”고 나온다.

 단종 복위운동 이후 100년 뒤부터 이들 사육신이 실록에 언급되기 시작했다. 『육신전』의 영향 여부와 관계없이 실록 기록에서는 반복적으로 사육신에 항상 유응부가 언급된다. 김문기는 사육신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다.

 그런 실록 기록을 부정하고 현대에 와서 김문기를 새로이 넣은 것은 어색하다. 『육신전』의 영향이라고 해도, 또 『육신전』에 일부 오류가 있다고 해도 그 저술 자체가 당시에는 불온한 책이었고, 다른 이들은 감히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남효온이 의도적으로 김문기를 배제하거나, 글을 왜곡할 까닭도 없다. 게다가 김문기 역시 같은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 100년 동안, 『육신전』을 저술하던 시기까지 김문기가 사육신에 언급되지 않았던 이유는 유응부를 포함한 사육신과 김문기의 역할이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 또 세조 시대 사람들이나 그 이후 사람들의 인식과 정서 속에서 유응부를 포함한 사육신이 공감을 얻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육신전』 속 유응부는 김문기를 잘못 쓴 것인가

 일부에서는 실록에 유응부가 들어간 이유를 훗날 『육신전』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육신전』 속 유응부에 대한 기록이 실제로는 김문기에 대한 기록인데, 이를 남효온이 잘못 알고 김문기를 유응부로 썼다는 것이다.

 남효온은 단종 복위운동 당시의 사람은 아니다. 1세대 이상 차이가 있다. 때문에 현재 『육신전』을 비판하는 사람들처럼 선조 역시 『육신전』을 읽고 오류를 지적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시대 차이가 있기에, 정보 접근성의 차이가 있기에 당연히 오류는 있을 수 있다.

 『육신전』이 저술된 뒤 80년이 지난 뒤인 1576년 6월 24일(『선조실록』)에는 남효온의 『육신전』이 실록에서 처음 언급된다. 선조는 “직접 그 글을 읽어보니 춥지도 않은데 떨린다”라고 하면서, “저 남효온이란 자는 어떤 자이길래 감히 희롱하는 글을 써 나랏일을 드러내 기록했단 말인가? 이자는 바로 우리 조정의 죄인이다. 옛날에 최호는 나랏일을 드러내 기록해 처형당했다. 이 사람(남효온)이 살아 있다면 내가 끝까지 추국하여 죄를 다스릴 것”이라고 격노했다. 심지어 선조는 『육신전』에 있는 정보 오류를 찾아 지적하기도 했다.

 『육신전』 속 유응부에 대한 기록을 읽어보면, 유응부가 “함길도 절제사(咸吉道節制使)”를 했다는 기록은 남효온의 착오로 볼 수 있다. 김문기는 함길도 절제사를 했다. 그러나 그 오류 때문에 남효온이 김문기를 유응부로 착각해 썼다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전체적인 내용은 문신 출신으로 군사전문가로 활약하기도 하고 활도 잘 쏜 문무 겸비 인물인 김문기가 아닌, 무신으로 한 길만 걸었던 유응부 이야기에 더 적합하다. 예를 들면 거사 연기를 주장해 실패 원인이 되었던 성삼문 등을 바라보며, 유응부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생(書生)과 함께 모의할 것이 못된다’고 했는데 과연 그렇다”라고 한 부분이나, 모의 내용을 묻는 세조에게 “저 더벅머리 유자(儒者)들에게 물어보라”라고 한 부분은 문무를 겸비했고, 문신이었던 김문기가, 또 고위관직에 있던 김문기가 아래 계급 사람들에게 하기에는 인품이나 직책으로 보아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또한 내용 중에 “아우 유응신”은 유응부와 돌림자가 같다. 김문기의 잘못이라면 ‘유응신’이 언급될 수 없다. 아우 유응신도 활을 잘 쏘아 사냥으로 이름이 났다는 것도 유응부의 형제가 모두 무신 계열이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유응부의 땅인 “포천의 전장(田莊)”도 『세조실록』에 언급된다. 유응부의 몰수된 포천 전지(田地)가 우찬성 신숙주에게 배분되었다고 나온다. 반면 김문기는 영동·옥천·안동에 전지를 몰수당했다. 유응부의 포천 땅도 실록과 일치한다. 김문기는 포천 땅이 언급되지 않는다.

 『육신전』에서는 유응부에게 “아들은 없고 두 딸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세조실록』의 관련 기록을 보면, 첩의 딸 환생은 동지중추원사 봉석주(奉石柱)에게 노비로 주어졌고, 사위 이의영(李義英)은 무신인 별시위로 유응부와 함께 모의에 참여했는데, 이의영의 부인, 즉 유응부의 딸 효생은 도절제사 양정에게 주어졌다고 한다. 반면 김문기의 경우는 딸 종산이 대사헌 최항에게 주어졌다고만 나온다. 유응부에게 두 딸이 있었다는 기록도 실록과 일치한다. 김문기의 딸은 실록에 1명 밖에 나오지 않는다.

 『육신전』의 이런 여러 기록으로 보면, 『육신전』의 유응부가 김문기로 바뀌었다는 주장이나, 남효온이 김문기를 유응부로 잘못 썼다는 주장은 한계가 있는 듯하다. 또한  『육신전』을 관찬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실록에 비해 사료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육신전』 만큼 육신의 삶을 자세히 기록한 자료도 없기에 야사(野史)로 한정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사육신공원 조망지점에서 본 한강철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사육신공원 조망지점에서 본 한강철교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국 철도시발지 노량진역

 사육신의 삶과 그들의 신념, 용기를 마음에 담으며 ‘사육신 역사관’으로 가면 그 뒤편에 사육신공원 조망지점이 나온다. 코로나로 역사관의 문이 닫혀 있다. 왼쪽으로 63빌딩, 오른쪽 끝으로는 남산서울타워가 보인다. 한강철교도 보이나, 한강은 4분의 1쯤 보인다. 전망대가 낮은 까닭도 있고, 아파트로 인해 가져진 까닭도 있다. 조망지점이 조망지점으로 역할을 하게 하려면 전망대를 높여 시원하게 한강을 바라볼 수 있게 하면 어떨까. 현재의 조망시설은 너무 아쉽다.

 한강대교 쪽 조망지점 한쪽에 ‘한강방어선 노량진 전투지’라는 안내판이 있다. 6·25때 국군이 노량진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를 했던 곳이라고 한다. “제7사단은 수도고지(노량진 수원지 일대)에서 북한군과 백병전을 벌이고, 7월 1일 39고지(사육신묘)와 월파정(수산시장)에서 공방전을 펼치는 등 한강방어선 전투의 최일선에서 싸웠다”는 내용이다.

 사육신의 죽음도 가슴 아프지만, 6·25때 동족이 동족을 죽였던 그 때의 비극이 더욱 먹먹하다. 사육신들은 이곳에서 그때의 싸움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들이 남기려 했던 나라가, 그들의 뜻을 기린다는 후손들이 서로 피를 묻히는 그 광경을 차마 보지는 못했을 듯하다.

 안내판에 나오는 ‘월파정’으로 간다. 가는 도중 조망지점에서 노량진 철길과 한강철교가 이어지는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철길 중간에 큰 바윗돌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뒷면만 보인다. 그 바윗돌은 그냥 바윗돌이 아니다. 철길 중간에 세워 놓은 이유가 있다.

 노량진역은 1899년 9월 개통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시발지이다. 바윗돌은 ‘철도시발지(鐵道始發地)’를 새겨놓은 표석이다. 글씨는 김종필이 썼다. 노량진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만이 그 표석을 볼 수 있다. 이왕이면 노량진역 안 그 어디라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세워 놓으면 어떨까. 역 근무자만 볼 수 있는 표석이 무슨 의미가 있나.

월파정과 장택상 별장 터에 있는 식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월파정과 장택상 별장 터에 있는 식당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조선 대포가 현관 기둥이 된 일본인 별장

 월파정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노량진 철길 반대편에 있다. 노량진역을 지나 수산시장으로 들어가는 굴다리를 통과해 갈 수도 있으나, 노량진역사를 통과해 가면 빠르다. 노량진역에서는 9번 출구로 나가면 된다. 9번 출구로 나가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수산시장 건물이 보인다. 또 바로 앞에 ‘구이천국 식당’과 지금은 폐업한 ‘별장식장’ 간판, 느티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

 그곳이 ‘한강방어선 노량진 전투지’ 안내판에 써 있던 ‘월파정(月波亭)’이 있던 곳이다. 그 앞은 낚시터였다가 철도가 건설되면서 매립되었다. 6·25때는 안내판의 내용처럼 전투가 벌어진 장소이기도 했다.

 「서울 노량진 월파정지의 시기별 변천에 관한 연구」(홍경화·한동수,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2014-11)』, 한국건축역사학회)에는 월파정의 변천이 상세히 연구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월파정은 조선 시대부터 존재했던 건물로 대한제국기에는 고위관료 민형식이 소유했다가 영국 공사가 사용했고, 1914년에 일본인 토목업자였던 아라이 하츠타로(荒井初太郞)가 소유하고 일본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본관을 새로이 지어 총독부 관료들의 연회를 열기도 했다. 또 그때 현관문 기둥을 강화도에 있던 대포 포신으로 세웠고, 건물 안에 많은 골동품을 진열해 놓았다고 한다.

 「재조일본인(在朝日本人) 토목청부업자 아라이 하츠타로의 한국진출과 기업활동」(김명수, 『경영사학』, 제26집 제3호, 2011. 9. (사)한국경영사학회)에 따르면, 아라이 아츠타로는 1945년 6월 별장에서 사망했다. 사망 직후 해방이 되면서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나, 그 별장은 ‘라바울 마담’으로 알려진 김정순이 소유하고 미군 상대 사교장으로 운영되었다고 한다. 또 얼마 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소유해 사망할 때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현재 폐업한 ‘별장식당’은 옛 별장의 흔적을 갖은 이름이다. 장택상 별장은 1990년대 중반에 완전히 사라졌다.

월파정, 사충사, 육신묘 부분(한성도, 1760년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홍경화·한동수,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에서 캡처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월파정, 사충사, 육신묘 부분(한성도, 1760년대,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홍경화·한동수,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에서 캡처

 월파정이 있던 이 별장은 우리나라 고미술품과 많은 관계가 있다. 일본인 주인 아라이 하츠타로도 토목업을 했으나, 고미술품 수장가로 유명했고, 우리나라의 많은 골동품을 소유하고 있었다. 해방 후 그 별장을 소유한 장택상 역시 『한국 근대 미술시장 형성사 연구』(손영옥, 서울대대학원 박사논문, 2015년)에 따르면, 근현대 우리나라 골동품 수장가로 이름 높았던 인물이다. 어떤 계기로 장택상의 소유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별장은 아라히 하츠타로와 장택상이 골동품으로 연결된 공간이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그 별장의 현관이다. 현관 자체의 사진은 없으나, 현관 기둥을 찍은 사진은 몇 점 전한다.

장택상씨 노량진별장 소장 불랑기포(조인복, 『한국고화기도감』, 문화재관리국, 1974, 53쪽)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장택상씨 노량진별장 소장 불랑기포(조인복, 『한국고화기도감』, 문화재관리국, 1974, 53쪽)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국고화기도감』(조인복, 문화재관리국, 1974년)에는 장택상 별장에 있던 조선 시대 대포 사진들이 있다. 불랑기(佛狼機)포 사진 2장, 홍이포 사진 2장이다. 불랑기포의 경우 한 장에는 4문이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다른 한 장에도 쇠줄이 걸린 한 문이 나온다. 이들 불랑기포는 현재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또 홍이포는 길이가 무려 272cm나 되는 엄청난 크기의 대포이다. 이 사진들을 자세히 보면, 왼쪽 사진의 경우 앞의 홍이포 뒤에 또 하나의 포가 뒤에 보인다. 뒤에 있는 포는 어떤 포인지는 알 수 없다. 두 사진에 총 3문의 조선 대포가 있고, 이 홍이포는 모두 문 기둥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오른쪽 사진의 홍이포는 『한국의 화포』(이강칠, 동재, 2004년)에 소개된 강화도 초지진 대포와 비슷하다.

1976년 해군사관학교박물관 개관식 때 장택상이 기증한 철제대포,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소장, 1점임. (이강칠, 『한국의 화포』, 2004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1976년 해군사관학교박물관 개관식 때 장택상이 기증한 철제대포,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소장, 1점임. (이강칠, 『한국의 화포』, 2004년)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철제대포, 일본인 헌병대위(荒井)의 노량진 별장 현관문 기둥으로 사용된 포(이강칠, 『한국의 화포』, 2004년, 174쪽)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철제대포, 일본인 헌병대위(荒井)의 노량진 별장 현관문 기둥으로 사용된 포(이강칠, 『한국의 화포』, 2004년, 174쪽)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국의 화포』에는 장택상 소유가 명시된 철제대포 1점(221cm)과 일본인 헌병대위 아라이(荒井)의 노량진 별장 현관 기둥 사용 철제대포 1점의 사진이 나온다. 헌병대위 아라이는 토목업자 아라이 하츠타로의 오류이다. 『한국의 화포』에 나오는 사진들은 모두 아라이 하츠타로가 소유하면서 현관 문 기둥으로 사용한 홍이포로 보인다. 그 중 한 점은 장택상이 해군사관학교에 기증했고, 다른 한점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75년 강화도 초지진에 이전 설치되었다고 한다.

 불랑기포는 『한국의 화포』에 따르면 1517년 포루투갈인이 중국 광주에 도착해 중국에 전래한 포로, 우리나라에서는 명종 대에 수입, 제작·활용했다. 홍이포는 명나라에서 도입된 것으로 1731년에야 우리나라에서 자체 제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택상씨 노량진별장 소장 홍이포 2문 (조인복, 『한국고화기도감』, 문화재관리국, 1974, 66쪽)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장택상씨 노량진별장 소장 홍이포 2문 (조인복, 『한국고화기도감』, 문화재관리국, 1974, 66쪽)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한국고화기도감』과 『한국의 화포』 두 책 속의 장택상과 아라이 하츠타로 소유 대포 사진을 보면  『한국고화기도감』에는 불랑기 5문, 홍이포 2문 및 기타 1문 총 8문이 나오고, 『한국의 화포』에는 홍이포 3문이 나온다. 그 중 홍이포 1문(강화도 초지진)은 겹친다. 결국 아라이 하츠타로는 집의 대문 기둥과 장식으로 우리나라 대포를 모두 10문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라이 하츠타로의 장식품이 된 조선의 대포들은 그 뒤 그대로 장택상에게 전달된 듯하다.

 아라이 하츠타로 별장의 장식품이 된 무기 사진을 보노라면, 망한 나라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기는 그 나라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물리적 재료이다. 낡은 무기는 언제나 신무기를 대항하기 어렵다. 낡은 무기를 생산하는 나라, 그 무기조차 관리할 능력이 없는 나라는 결국 멸망한다. 그 나라가 조선이고 대한제국이었다. 식민지배자 일본인의 별장 기둥이 된 조선의 옛 무기에서 교훈을 얻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사충서원 터’ 표석(노량진역 근처 버스정거장 옆)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사충서원 터’ 표석(노량진역 근처 버스정거장 옆) [사진=박종평 객원기자]

 별장 터에서 노량진 큰길로 나가면 버스정거장 근처에서 ‘사충서원(四忠書院) 터’ 표석을 볼 수 있다. 사충서원은 1722년에 소론 정권에 의해 노론의 4대신(大臣)인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가 죽임을 당한 뒤 영조 때 복권되자 이들을 배향했던 서원이다. 조선 말기의 권력투쟁을 보면 한숨 밖에 나지 않는다. 무엇을 위한 나라, 누구를 위한 나라였는지, 리더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동작구 3편에서는 유한양행 빌딩부터 보라매공원까지다.

 

* 사육신공원 : 동작구 노량진동 152-3
* 노량진역 : 지하철 1호선과 9호선
* 월파정과 장택상 별장 터 : 동작구 노량진동 15-1 일대. 노량진역 9번 출구 앞 ‘구이천국 식당 일대 언덕’ (별장식당 포함)
* ‘사충서원 터’ 표석 : 동작구 노량진동 60-12. KT노량진빌딩 맞은편 버스정거장 사이 큰 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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