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눈물, “민주화 되게 해 주세요” “민주화 되게 해 주세요”
미얀마 독재 치하 ‘민중 저항’ 영상 담으며 ‘방콕 도피’ 첩보전

미얀마 민족통합정부(NUG) 한국 대표부를 담당하고 있는 정범래 대표를 만났다. 1980년대부터 이어진 독재 정권이 장악하고 있던 미얀마에 2000년초 삶의 터를 꾸린 그는 2007년 민중 항쟁을 영상에 담아 전 세계에 알리면서 군부로부터 처벌 대상으로 낙인 찍혀 비밀리에 방콕으로 탈출하게 됐다. 이후에도 미얀마를 위해 꾸준히 지원을 이어오고 있는 그에게 최근 미얀마의 소식을 들었다. 현재 그는 경기 시흥시 센트럴 병원 영상의학과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창환 기자]
미얀마 민족통합정부(NUG) 한국 대표부를 담당하고 있는 정범래 대표를 만났다. 1980년대부터 이어진 독재 정권이 장악하고 있던 미얀마에 2000년초 삶의 터를 꾸린 그는 2007년 민중 항쟁을 영상에 담아 전 세계에 알리면서 군부로부터 처벌 대상으로 낙인 찍혀 비밀리에 방콕으로 탈출하게 됐다. 이후에도 미얀마를 위해 꾸준히 지원을 이어오고 있는 그에게 최근 미얀마의 소식을 들었다. 현재 그는 경기 시흥시 센트럴 병원 영상의학과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창환 기자]

[일요서울 | 이창환 기자]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1000여 명에 이르는 무고한 시민들이 군경에 의한 총격과 폭력에 의해 희생당했다. 반군 시위를 일으켰던 시민들은 대부분 무기가 없는 20대 청년들이 중심이었다. 현재도 5000명이 넘는 시민들이 군부에 의해 투옥된 상태지만 그들의 생사나 안전 여부를 알 길은 없다. 여기에 코로나19와 식량난까지 겹치면서 미얀마는 말 그대로 삼중고(三重苦)에 시달리고 있다. 이에 미얀마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정범래 미얀마 민주주의네트워크 대표를 찾았다. 그는 현재 미얀마 민족통합정부(NUG) 한국 대표부 대표를 맡아 미얀마 지원을 위한 자금과 의료장비 등을 보내고 있다.

- 미얀마와 인연은 어떻게 시작 됐나.
▲ 1990년대 일상을 떠나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전 세계를 여행했다. 그렇게 여행을 하면서 정착한 곳이 미얀마였다.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선진국에도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미얀마는 마음을 편하게 해 줬다. 내가 일할 곳이 미얀마라는 생각이 들었고 미얀마에서 정착하고자 했다. 

- 당시에도 미얀마는 군부 독재정권이 장악한 상태였는데 무섭지 않았나.
▲ 무섭다는 생각은 없었다. 독재정권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사람들이 그 과정에 적응해 살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동화돼 있었다. PC방을 운영하고 여행사를 하면서 오히려 당시 정권과는 친분도 생겨서 어려움은 없었다. 앞서 1988년 민주화 시위가 있었다고 했지만 내가 방문하던 당시에는 그 여파가 남아있지 않았다. 

- 그런 미얀마에서의 삶이었는데 미얀마를 나오게 된 계기는.
▲ 2007년 9월 미얀마에서는 민중의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있었다. 당시 샤프란 색상의 옷을 입은 승려들이 앞장서서 시위를 주도하면서 ‘샤프란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군부의 총에 의해 한 명의 승려가 희생되면서 승려들이 군부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시작됐다. 미얀마는 종교부라는 정부 행정부가 있을 정도로 불교나 승려들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이 크다. 그런 승려가 군부로부터 희생당하면서 맞서자 민중이 동참하게 됐다. 민중이 동참하자 대규모 민주화 시위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 미얀마 민주화 시위에 직접 참여했나.
▲ 미얀마는 군부가 장악한 독재국가였기 때문에 인터넷 사용이나 방송 송출이 우리나라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가까이 태국과도 교류가 쉽지 않았다. 신문 등으로 미얀마 시위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한 방송사에서 시위 현장에 대한 촬영을 요청했고 미얀마 여행안내를 하며 한국 방송과 친분이 있었기에 흔쾌히 수용했다. 한 번, 두 번 촬영을 나가면서 민중들의 눈물에 스스로 동화되면서 반드시 민주화 시위 상황을 촬영해 전달하겠다는 의무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군부가 알면 큰일이 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몰래 몰래 촬영하고 민중의 눈물을 담았다.

- 시위를 촬영하면서 힘든 일은 없었나.
▲ 촬영이 힘든 것보다도 어느 날 며칠째 촬영을 마치고 왔는데 미얀마 군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집에 와서 놀라운 소식을 전해 줬다. 군부에서 내가 시위 현장을 찍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했다. 특히 친구는 긴급회의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며 조심하라고 귀띔해줬다. 하지만 정말 큰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계획을 알게 됐고 이번만큼은 꼭 촬영해야겠다는 생각에 한 번 더 현장을 나갔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니 한인회 회장과 한국 영사관에서 찾아와 “위험한 처지에 놓였다”며 “어서 출국하라”고 하더라.

- 출국이 어려웠을 텐데 공항 검문 통과했나.
▲ 그날 오후 방콕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긴급하게 구했다. 여행사를 운영했기에, 항공사에 친분이 있는 분께 요청해 몇 시간 남지 않았던 당일 표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혼자 출국하는 것이 못내 걱정됐던 주변 분들이 다음날 출국 예정이던 한국 신부님과 다른 분들을 나와 함께 출국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공항에서도 검문이 걱정됐지만, 군부는 나의 출국 소식을 몰랐고 여행사를 운영했던 내가 방콕에 다녀온다고 했더니 공항 관계자들은 손을 흔들며 환송해 줬다. 

- 이후 미얀마에서 아무 일이 없었나. 가족들은.
▲ 가족들은 주변에서 돌봐주셨고 특히 아이들은 미국계 외국인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큰 걱정이 없었지만, 방콕에 도착하고 다음 날 아내와 통화하면서 너무도 놀랐다. 아내는 무서운 사건이 있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촬영을 하던 바로 그 자리에 다음날 촬영왔던 일본 기자가 미얀마 군부로부터 조준사격을 당해 사망했다는 얘기였다. 촬영하는 사람이 나라고 여겨 사격을 했다는 생각에 오금이 저렸다. 큰일이 있을 뻔했지만 너무도 다행이었고, 가족들은 그로부터 1년 뒤에 모두 출국했다. 미얀마 상황을 담은 영상은 방송국으로 전달이 됐고 각 방송사와 외신들이 이를 활용해 보도하기 시작하더라. 

- 지금은 미얀마와의 관계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
▲ 지난 8월8일 미얀마 군부에 맞서 민중들의 시위가 있던 1988년 8월8일을 기념해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여전히 군경은 민중에게 총칼을 겨누고 있고 국민들의 어려움은 지속되고 있다. 한국에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지원하고 각처에 도움을 요청하며 임시민주정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를 뒤집을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 지금 미얀마에 가장 필요한 것은 뭔가.
▲ 당연히 자금과 식량, 의료장비 등이다. 의료시설은 거의 사용할 수 없는 데다 군부를 피해 피난 중에 있는 국민들이 너무도 많다. 수십만 명이 태국 국경과 가까운 지대에 모여 피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캠프조차 제대로 없어 바나나 잎을 덮고 잠을 청해야 하는 상황이다. 먹을 것도 없고 생존을 위한 기본도 마련돼 있지 않다. 여기에서도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 한국 정부 또는 기업이나 단체에 하고 싶은 말은.
▲ 우리나라가 식민치하에 있을 때 상하이 임시 정부가 몰래 역할을 했던 것처럼 미얀마 임시민주정부가 그 역할을 하고 있으나, 한국의 도움이 절실하다. 특히 미얀마 국민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주 좋게 생각하고 있다. 한국 정부나 기업, 민간단체 어디든 미얀마 지원이 정말 요청드린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2만5000명의 미얀마 인들은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면서도 십시일반으로 매일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후원하고 있다. 미얀마 민중 시위에서 옆에서 울던 아주머니의 기도가 생각난다. “미얀마가 민주화되게 해 주세요” “미얀마가 국민의 뜻대로 되게 해 주세요”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