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우산, 갈마재, 안현, 모악산, 무악산 이름만큼 사연 많아

[일요서울김경은 편집위원이번 탐방지는 서대문 안산이다. 안산은 편안하다. 편안함은 친숙함에서 나온다. 안산은 인왕산과 마주하고 있다. 인왕산에 비해 산세가 순하다. 이 때문에 인왕산을 양산(陽山), 안산을 음산(陰山)이라고 한다. 높이도 인왕산(338m)보다 낮다. 296m밖에 되지 않는다. 화강암 바위로 이뤄진 인왕산보다 완만한 편이다. 마치 말 안장처럼 두 개의 봉우리가 완만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갈마재다. 한자로 표현하면 바로 안산(鞍山)이다. 안산은 연희동, 봉원도, 현저동, 무악동, 천연동, 홍제동, 홍은동, 북아현동 등 18개 동에 걸쳐 있다. 마치 동네 뒷동산 같다. 등산 코스도 무려 10개나 된다. 약수터도 용천, 맥천, 백암, 안산천, 옥천 등 27개나 된다. 서울 시민에게 가깝고도 친근한 산이다. 두 번째 편이다.

무악동봉수대[사진=김경은 편집위원]
무악동봉수대[사진=김경은 편집위원]

자락길 전망대를 벗어났다. 다시 안산 자락길을 따라 20여 분 걷었다. 봉수대로 안내하는 표식이 나왔다. 표식이 알려준 데로 갔다. 너와집 쉼터와 안산 초록숲길을 지나 봉수대에 도착했다. 1km 남짓이다.

봉수대의 정식 명칭은 무악 동봉수대. ‘무악 동봉수대 터라는 푯말이 보였다. 푯말은 동봉수대는 동, 서 두 개의 봉수대 중 하나고 적혀있다. 봉수대는 조선시대 군사 통신시설이다. 봉수대를 이용해 변방의 위급한 상황을 전달했다. 봉수대에서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을 피웠다. 가까운 봉수대는 똑같은 신호를 이웃 봉수대에 전했다. 전국에 673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목면산(남산)에서 집결했다. 목면산에는 5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이는 5개의 봉수 노선이 있다는 의미다. 무악 동봉수대는 그중 3노선이다. 남산으로 가기 직전의 봉수대다. 평안도 강계에서 국경 따라 의주로 온 뒤 황해도와 경기도 내륙을 관통하는 노선이다.

# 무악동봉수대, 자연조건 역이용 유용한 통신시절

하얀 벽돌로 쌓은 무악 동봉수대에 올랐다. 왜 이곳에 봉수대가 있는지 직감하게 된다. 서울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남산은 지척이다. 동쪽으로는 잠실롯데월드타워가, 서쪽으로는 일산 위브더제니스가 선명하다. 산지가 많은 자연조건을 역이용한 유용한 통신시설인 셈이다.

봉수제도도 한계는 있다. 봉수 담당자의 일탈이 가장 큰 약점이다. 이괄의 난도 이런 허점을 드러낸 사건이 있었다. 이괄의 난은 조선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대사건이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지방 반란군이 잠시나마 도성을 점령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건이다. 반란군이 평안도 영변에서 군사를 일으켜 한양 도성까지 도달하는 데 꼭 17일이 걸렸다. 부패하고 무능한 조정에 민심이 돌아선 탓이다. 당시 민심 이반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인조가 도성을 버리고 한강을 건너 공주로 파천하려고 했다. 단 한 명의 뱃사공도 인조를 위해 배를 띄우지 않았다. 뱃사공의 마음이나 봉수군의 마음이나 다를 바 없던 것이다.

이괄의 운명은 안산에서 끝이 난다. 이괄은 인조반정 1등 공신이다. 인종반정은 사실상 군사쿠데타였다. 군사를 총지휘한 사람이 바로 이괄이다. 하지만 그는 적절한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2등공신이 됐다. 심지어 도성을 떠나야 했다. 부원수 겸 평안 병마절도사에 임명됐다. 평안도 영변으로 쫓겨난 것이다. 이괄은 인종반정 이듬해(1624124)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진군했다. 순식간에 평양(황주전투)과 개성(마탄전투) 방어선을 뚫었다. 파죽지세로 한양에 도착했다. 민심은 이미 인조를 떠났다. 백성은 반란군 기마병이 지나는 길에 황토를 뿌려줬다. 반란군은 한양도성에 입성한 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경복궁에 지휘부를 차렸다. 반란군을 추격하던 관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게 됐다. 그게 바로 안현(무악재)전투다. 이괄은 기고만장했다. 백성에게 인왕산 산성에서 관군과의 싸움을 구경하라며 호언장담을 했다.

장만 대원수를 중심으로 한 관군이 안산 고지를 선점했다. 그곳이 바로 무악 동봉수대가 서 있는 가파른 산기슭이었다. 입지는 불리했다. 하지만 반란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군사력에서 관군을 압도했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불행은 하늘에서 오는 것일까. 반란군이 1624221일 이괄의 공격 개시 명령만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산꼭대기에서 산기슭으로 돌풍이 불었다. 한순간 순풍(동풍)이 역풍(서풍)으로 바뀐 것이었다. 반란군은 센 바람 때문에 조총과 화포에 불을 댕기지도 못했다. 화력이 부족했던 관군은 신무기를 활용했다. 고춧가루를 뿌렸다. 반란군은 속수무책으로 패퇴했다. 이괄을 향한 민심도 바람에 날리는 고춧가루처럼 사라졌다. 관군이 포진했던 안산 바위 능선이 바로 승정봉이다.

만약이괄의 난이 성공했다면 조선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니 이괄의 난의 원인이 됐던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 인왕산 자라 홍제원인조반종 획책장소

홍제동에서 본 무악재[사진=김경은 편집위원]
홍제동에서 본 무악재[사진=김경은 편집위원]

만약이란 단어를 떠올린 것은 안산 정상에서 본, 인왕상 자락에 서 위치한 아파트 홍제원힐스테이트 때문이다. ‘홍제원은 조선 역사의 변곡점이 된 역사의 현장이다. 이괄과 서인 일파가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능양군)를 왕으로 만든 정변(인종반정)을 획책한 장소다. 아파트 작명가는 홍제원이라는 이름 석 자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홍제원(弘濟院)()’은 공무 수행자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편의시설이다. 한양 도성 밖에 원은 4(홍제원, 이태원, 보제원, 전관원)이 있었다. 전국에 1310개가 있었다. 그중에서 무악재 넘어에 있던 홍제원은 격이 다른 시설이었다. 의주를 통해서 오는 중국 사신의 숙소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왕이 중국에 보내는 사신을 직접 전송하기도 했던 중요한 국가시설이다. 물론 함경도와 평안도 등에서 일하던 관리도 이용을 자주 이용했다. 북방 방어책임을 맡았던 이괄과 그 추종자가 홍제원에서 만나 반정 거사를 꾀한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중국과 조선을 오가는 외교사절단의 규모는 꽤 컸다. 마부, 가마꾼 등 비공식 수행원까지 합치면 수백 명에 이르는 게 예사다. 당연히 홍제원과 그 주변에는 사전(私廛)과 주막 등 각종 시설이 들어섰다. 그만큼 번성했다. 안산을 끼고 흐르는 모래내를 홍제천혹은 홍제원천이라고 불렀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홍제원은 일제 강점기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봉수대에서 승정봉을 따라 내려왔다. 안산의 자랑인 메타세쿼이아 군락지를 지났다. 메타세쿼이아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다. 절로 고개가 젖혀진다. 심호흡도 터져 나온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봉원사로 내려왔다.

대한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위엄 있고 장중한 맛이 없다. 서민 친화적이다. 사찰의 정문 격인 일주문도 없다. 민가에 접해 있다. 민간처럼 보인 것은 승려들이 사는 집이다. 태고종은 승려의 결혼은 인정하는 불교 종파다. 본당 격인 삼천불전(三千佛殿)은 공사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공사 중이었다. 거기다가 삼천불전 앞에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고목(느티나무 수령 450)은 스산한 느낌을 줬다. 봉원사 느티나무는 수려한 멋이 없다. 꼬이고 휘어 있다. 봉원사의 기구하면서도 끈질긴 역사를 닮은 듯하다.

# 봉원사 반야사조선 태조 어진모신 곳

봉원사 본당[사진=김경은 편집위원]
봉원사 본당[사진=김경은 편집위원]

봉원사는 889년 도선국사가 연세대 터에 세웠다. 당시 이름은 반야사였다. 조선 시대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숭유억불의 정책을 폈던 조선, 그것도 한양 인근에서 당당하게 명맥을 유지했던 이유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1651(효종)에 중건했다. 1748년 안산으로 옮겨 복원했다. 또 일제강점기에는 현란한 빛을 발했다. 개화파의 선구자인 이동인 선사가 수행한 곳이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가 이동인 선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1908년 봉원사에서 한글학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봉원사는 한국 불교의 전통 의식인 범패와 영산재가 전승 보전되는 절이다. 특히 영산재는 석가모니가 영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재현한 행사,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안산, 봉우산, 길마재, 안현, 모악산, 무악산……. 안산은 이 많은 이름만큼 많은 사연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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