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김경은 전편집위원지난 호에 이말산 궁녀 무덤에 관해 얘기했다. 궁녀의 짝꿍은 내시다. 북한산 둘레길 걷기를 할 때 지났던 내시묘역길을 염두에 둔 코스 설정이었다. 북한산 둘레길 10코스인 내시묘역길은 이말산에서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다. 은평 한옥마을 앞을 지나는 연서로만 건너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종전에 내시묘역길을 지나간 일이 있다. 그때 보았던 둘레길 길가의 묘소 주인은 당연히 내시라고 생각했다. 사전 조사도 하지 않았다. 실감 나는 탐방을 위해서였다.

내시묘역길.(사진=김경은 전 편집위원)
내시묘역길.(사진=김경은 전 편집위원)

- 인근주민, “갈수 없는 곳에 있다사유지에 있는 내시묘역
- 묘역길에 핀 생식능력 없는 수국 내시 인생과 흡사

이게 웬일인가. 내시묘역길에는 내시의 묘가 없었다. 선입견이 만든 시행착오였다. 지난 18일 진관동에 있는 비구니 사찰, 백화사 앞에서 출발해 11코스인 효자길(경기도 광주시 효자동) 입구까지 3.5km의 구간을 걸었다. 마치 천국의 문을 찾듯이 둘레길 좌우를 살폈지만 허사였다. 북한산 둘레길 푯말을 다시 봤다. 이게 무슨 낭패인가?

백화사 근처 샛길에 내시묘역이라는 글자가 똑똑히적혀있다. 휴대폰으로 검색했다. 하나의 기사가 눈을 번쩍이게 했다. ‘백화사 앞이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에는 내시묘역길이라는 아치 모양의 안내 푯말과 함께 길목에 두 개의 문인석이 좌우에 서 있었다. 허망함을 뒤로 하고 문인석을 찾아 다시 온 길을 되짚어 걸었다. ‘푯말이라도 확인했어야지라는 자책이 들었다. 자책은 후회로 이어진다. 오늘 산책길이 실수를 반복하는 나의 인생을 닮은 듯했다. 필자는 어제 온 길을 오늘 다시 걷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도 사진만큼 훌륭한 탐방의 기록이 어디 있겠냐며 스스로 위로했다.

# 백화사앞 내시묘역길 입구..문인석 사라져

길을 재촉했다. 다시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백화사 앞 내시묘역길 입구에는 문인석도 사라지고 없었다. 백화사 앞 샛길을 찾아 헤맸다. 그것조차 헛수고였다. 이미 해는 산으로 숨어들었다. 등산객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백화사 앞 주택에 사는 분인듯한 사람을 만났다. 내시묘역의 행방을 물었다. “갈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사유지(동현농산)에 있어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되돌리는 발길이 무거웠다. 귀갓길 내내 내시묘역 존재 여부의 궁금증을 지울 수 없었다. 불길한 기분이 든다. 종전에 내시묘역길을 걸으면서 유난히 많이 있던 수국이 생각난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에 앙상하게 마른 수국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수국은 생식 능력 없는 꽃이다. 불안한 예감은 비켜나가지 않는 법이다. 신문자료를 검색했다. 한 신문의 르포기사 내용이다.

“2012년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에서 북한산 의상봉을 오를 때 약 3만 제곱미터의 땅이 파헤쳐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문제는 그곳이 단순한 산자락이 아니라 국내 최대규모이자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내시의 집단묘역이 있던 곳이었다는 점이다. 파헤쳐지기 전까지 모두 45기의 묘가 있었다.”

묘역은 2003년 향토사학자인 박상진 씨에 의해 발견이 됐다. 이사문(李似文)공파 내시 봉묘 45기가 있었다. 비석이나 상석에 관직 등이 표시된 무덤도 14기 이른다. 박 씨는 <<북한산 내시묘 답사기>>에서 “'문인석(文人石)5, 비석이 5, 상석(床石)20, 망주석(望柱石)9기이 있었다면서 중국에도 남아 있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며 보존 상태가 양호한, 서울에서 유일한 내시 집단묘역이라고 주장했다.

이사문공파 소유의 동현동산(사진=김경은 전 편집위원)
이사문공파 소유의 동현동산(사진=김경은 전 편집위원)


# 북한산 45기 국내 가장오래된 유일내시묘역

그러나 국가사적이 부동산 개발의 그림자에 묻히고만 셈이다. 묘역의 후손이 은평뉴타운 개발 당시 이 묘역 부지를 처분했다. 내시로 이어진 후손이 선조 내시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성불구자라는 열등감과 수치심을 갖고 살아야만 했던 내시. 그들은 죽어서도 후손에게까지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사실 내시는 후손의 생각처럼 부끄러워할 비천한 존재는 아니었다. 왕의 그림자 역할을 하는 전문가 집단이었다. <<경국대전>> <이전(吏典)>에 내시가 소속된 내시부의 역할이 규정되어 있다. 궁궐 음식물 감독, 왕명 전달, 궐문 감시, 청소 등이 그것이다. 국왕을 보필하는 최측근 관료였다. 내시 관직은 종9(상원)에서 정2(상선)까지 16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경국대전>>은 내시를 140명으로 제한했다. 이 중에 종9품 이상의 벼슬아치는 59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인원과 승급을 제한한 이유가 있다. 국왕 수족인 내시의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 초기 문인인 서거정은 <<동국통감>>에서 내시의 품계는 7품 이하로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선 후기까지 이런 분위기는 이어진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수원이 쓴 <<간서>>내시를 재물로써 견제한다고 적고 있다. 정치 개입을 금지하는 대신 내시의 재테크를 허용했다는 얘기다.

언뜻 생각하면 내시는 굳이 넉넉한 재산이 필요하지 않을 듯 보인다. 거세한 남성에게 가족(부인과 자식)이 있을 리 만무하고 궁궐에서 생활하는 데 큰돈이 쓸모 있겠냐는 생각이다. 그것은 오해다. 내시도 일반 관리처럼 궁궐에 출퇴근했다. 또 가족도 있다. 내시 777명의 가계도가 기록된 족보인 <양세계보>에 따르면 절반 넘는 내시가 혼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뿐만 아니라 양자를 들려 내시의 혈통을 이었고 자신의 재산을 물려줬다. 임진왜란 때 목숨을 걸고 선조의 안위를 지켜 호성공신이 된 김계환의 후손은 13대까지 이어졌다. 그 양자는 자신이 속해있던 친족과 완전히 연을 끊어야 했다.

 

공동묘지표식​(사진=김경은 전 편집위원)​
공동묘지표식​(사진=김경은 전 편집위원)​

내시 가족 있어...양자들여 혈통도 이어

으리으리한 저택을 가진 내시도 적지 않았다. 특히 왕명을 다루는 문고리 권력에게는 파리떼가 끼기 마련이다. <<연려신기술>>양반은 내시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생식의 상실에 따른 비하와 조롱, 멸시가 오죽했겠는가. 역사에 기술된 내용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내시는 역사를 기록한 사람(신하)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3자의 눈에는 내시가 어떻게 보였을까. 프랑스인 신부 클로드 샤를 다예는 아전을 그들의 좌우명은 고을 사또를 속이고 지방 사무의 운영을 될 수 있는 한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면서 내시도 마찬가지라고 밝히고 있다.

내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떡고물 효과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생식기 절단은 현대의술로도 매우 위험한 수술이다. 조선시대 때는 명주실로 고환을 묶었다. 피가 차단된 고환은 썩어 갈 것이다. 고환을 버린 대가는 있다. 내시는 장수했다. 조선 왕의 평균수명은 40대 후반이었다. 내시는 70세가 훨씬 넘었다. <<양세계보>>에 기록된 내시 수명의 평균값이다. 내시도 죽을 때는 성기를 되찾는다. 거세된 양기는 내시감이라는 단지에 보관된다. 내시가 사망하면 봉합수술을 한 뒤 장례를 치렀다.

공동묘지구역 (사진=김경은 전 편집위원)
공동묘지구역 (사진=김경은 전 편집위원)

조선와 평균수명 40대후반 내시는 70세 넘어

돌연 듯 내시묘역길 길가에 죽은 듯 서 있던 수국이 다시 생각났다. 수국은 왜 중성화가 된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향기가 없다. 벌과 나비도 찾지 않을 터. 그런데 어떻게 향도 없이 씨를 뿌리고 꽃을 피우는 것일까. ‘거세된 남성이 가족을 이루고 대를 이어가는 것과 어쩌면 이렇게도 흡사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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