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탐방의 마무리는 북한산 조망이다. 은평구 최고의 조망 포인트인 봉산 전망대에 올랐다. 눈에 익은 북한산이 아니었다. 사패산, 도봉산, 삼각산(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하나의 파노라마였다. 가히 압도적이다. 북한산의 풍광을 뒤로 하고 봉산을 내려왔다. 서오릉 고개를 지나 서오릉으로 향했다.

서오릉 주변 안내도(사진=위성지 작가)

- 총면적 553616, 동구릉이어 두번째 큰 조선왕조 왕실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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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과 숙종 여인 6명중 4명 봉안,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

서오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가운데 하나다. 조선왕릉 대부분은 서울의 서북쪽과 동남쪽에 위치한다. 서북쪽에 서오릉(경릉·창릉·명릉·익릉·홍릉)과 서삼릉(희릉, 효릉, 예릉)이 있다.

서오릉. 수십 년 전 초등학교 때 소풍을 왔던 곳이다. 그땐 왕릉이 아니라 놀이터였다. 비탈진 잔디밭에서 미끄럼을 탔던 기억이 난다. 매표소에서 입장표를 샀다. 첫눈에 들어온 서오릉은 거대한 숲이었다. 총면적 183235.54(553616)이다. 동구릉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조선왕조 왕실 무덤군이다.

# 악귀와 액운을 막는 홍살문 지나면 제향공간
 

왕릉의 제례의식의 장소인 정지각(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왕릉의 제례의식의 장소인 정지각(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진입로를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홍살문(紅箭門·붉은색 화살 문)이 나타났다. 홍살문은 궁전, 관아, , , 원 등의 앞에 세우던 문이다. , , 원 앞에 있다면 능역 혹은 묘역의 시작임을 알려주는 표식이다. 나무 문의 붉은색은 악귀를, 화살은 액운을 막는 장치이다. 신성한 장소임을 암시한다. 즉 속세와 신선의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다. 홍살문 앞에는 반드시 물이 흐른다. 금천이다.

홍살문을 지나면 제향 공간이다. 왕릉 제향공간에 들어서면 참도가 정자각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참도(參道)는 높낮이가 다른 두 개의 길이다. 높은 길은 향로(香路) 혹은 신도(神道)라고 한다. 죽은 왕과 왕비의 길이다. 산릉제례를 이끄는 대축관 등이 축문과 향을 들고 지나갈 수 있다. 즉 낮은 길은 어로(御路). 선왕의 제례를 모시는 왕이 가는 길이다. 어로에선 가마도 탈 수 없다. 걸어가야 한다. 죽은 선왕에 대한 영원한 예우다.

실례를 무릅쓰고 어로를 따라 걸었다. 묘했다. 장자각에 가까워질수록 봉분은 점점 숨어들었다. 살아서 보기 어려운 용안을 죽어서도 감추는 것일까. 정자각은 왕릉 앞에 지어진 자형의 제사 건물이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T자형 건물이다. 5칸의 정자각은 조상을 위해서 제사 지내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봉분 정중앙에 있는 게 보통이다. 정자각 한편에는 비각이 있다. 비각에는 능호와 묘지 주인의 생애를 간략히 새겨져 있다.

정자각에 이르자 참도처럼 두 개의 돌계단이 나타났다. 향계(香階)와 어계(御階). 그럼 산릉제례에 참여한 문무백관은 어떻게 정자각으로 올라갈까. 제례 때마다 동쪽에 나무 계단을 설치했다고 한다. 정자각을 돌아가면 죽은 자가 사는 능침공간이다. 마치 인위적으로 만든 구릉처럼 보인다. 결코 인공산이 아니다. 이런 천연 구릉을 강()이라고 한다.

명릉의 능침공간은 세 개의 봉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숙종(묘지를 바라보면 왼쪽)은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함께 쌍분을 이루고 있다. 정자각은 쌍분의 중앙에 서 있다. 세 번째 왕비인 인원왕후 묘는 쌍분을 굽어보고 있다. 이런 양식의 묘지 선정은 매우 특이한 경우다. 왕릉보다 윗자리에 왕비 묘를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이 살아 사는 집이 궁궐이다. 왕이 죽어서 사는 집은 왕릉이다. 왕릉을 죽어서 사는 궁궐이라고 부른 이유다. 궁궐과 왕릉의 구조는 11로 대칭한다.

# 왕릉부다 윗자리 위치 왕비 인원왕후

숙종과 인현황후(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숙종과 인현황후 명릉.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죽은 왕이 홀로 사는 능침은 왕의 침전인 강령제, 왕비의 묘는 교태전, 제를 올리는 정자각은 근정전, 홍살문은 근정문이다. 그만큼 왕릉의 입지와 위치, 묘지의 형태는 엄격한 구조와 형식을 요구한다. 그런데 어떻게 왕보다 높은 자리에 왕비 그것도 세 번째 왕비의 능이 자리할 수 있었을까.

인원왕후는 인현왕후가 죽자마자 제2계비로 책봉됐다. 당시 16살이었다. 남편인 숙종은 41세이었다. 나이 많은 숙종으로부터 따뜻한 사랑도 받지 못했다. 거기다자 잦은 병치레로 고생했다. 아들도 낳지 못했다. 존재감 없는 왕비였다. 그럭저럭 세월은 흘렀다. 숙종이 죽자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됐다. 곧 숙종의 아들인 경종도 사망했다. 대왕대비가 됐다. 노론과 손잡고 영인군(영조)을 왕세제에 책봉했다. 조선 역사에서 왕세제가 왕이 된 일은 없다. 나중에 왕세제를 양자로 입적시켰다. 영조의 최고 후견인을 자처한 것이다.

인원왕후는 유언을 남긴다. “죽어서라도 숙종의 곁에 있고 싶다는 게 그것이다. 영조도 인원왕후보다 한술 더 뜬다. 인원왕후의 능을 왕의 오른쪽, 그것도 왕보다 높은 곳에 모시도록 했다. 왕릉 오른쪽에는 아무도 묻힐 수 없는 게 조선의 법이었다. 자신의 킹메이커가 되어준 인원왕후에 대한 최대의 보은이었다.

또 다른 의문이 든다. 왜 원비가 아닌 계비인 인현왕후가 숙종 곁에 누워 있는가. 숙종은 인현왕후가 먼저 죽자 왕비 옆자리는 나의 자리라고 말했다. 원비인 인경왕후가 21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곧 인현왕후가 계비로 책봉됐다. 그 사이에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있다. 장희빈이다.

장희빈의 품성을 알아본 사람이 있다.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황후다. 장희빈을 궁궐 밖으로 퇴출했다. 명성왕후가 세상을 뜨자 숙종은 장희빈을 다시 궁궐로 불렀다. 환궁을 도와준 사람은 다름 아닌 인현왕후였다. 아들이 없던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후궁을 들이도록 도운 것이다. 장희빈은 아들을 낳았다. 남인 세력의 지지를 얻어 세자로 책봉을 꾀했다. 남인과 대적하던 서인은 반대했다.

당시 인현왕후의 나이는 22세였다. 서인의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숙종은 이 논쟁을 득세하던 서인을 척결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했다. 서인 출신인 인현왕후도 폐위했다. 장희빈을 왕비로 승급시켰다.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1689)이다.

# 장희빈 쫓겨나자 왕비가 두 번 된 인현왕후

숙종의 첫재 왕비인 인경황후의 단능인 익릉
숙종의 첫재 왕비인 인경황후의 단능인 익릉(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남인 세력 역시 숙종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다시 서인을 등용했다. 이 과정에서 장희빈을 쫓아냈다. 대신 인현왕후를 재등용했다. 왕비가 두 번 된 유일한 경우다. 그 유명한 갑술환국(1694)이다. 궁궐로 돌아온 인현왕후를 곧 죽었다. 인현왕후를 당파 싸움에 이용당한 결과였다. 숙종은 이에 대해 미안하고 애통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인현왕후와 영원한 삶을 약속한 것일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서오릉에 또 다른 숙종의 여인이 모셔져 있다. 원빈이던 인경왕비와 장희빈이 그 주인공이다. 명릉 서쪽에 인경왕후의 익릉이 있다. 인경왕후는 세자빈을 거쳐 왕비에 책봉됐으나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장희빈의 묘명은 대빈묘다. 조선왕실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 명칭을 달리한다. 왕과 왕후 무덤은 능, 왕치 친부모,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묘는 원, 왕족과 후궁, 폐위된 왕과 왕후의 무덤은 묘라고 불렀다. 조선 역사상 최초로 후궁 출신으로 왕비가 됐던 장희빈이 대비묘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 일은 불과 50여 년 전에 벌어졌다. 여주에 있던 그의 묘는 감히 왕비의 것이라고 짐작할 수 없었다. 석상조차 없는 초라한 무덤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왕업을 이은 장희빈도 왕비로 대접해야 한다며 그의 묘를 서오릉으로 옮겼다.

박정희 전 대통령, 장희빈묘 서오릉 이전

서오릉은 숙종과 숙종의 여인 6명 중 4명이 봉안되어 있다. 마치 조선판 사랑과 전쟁의 주인공이 한 자리에 영면한 아이러니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조선왕릉 관람은 마치 조선 역사를 읽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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