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탐방의 마무리는 북한산 조망이다. 은평구 최고의 조망 포인트인 봉산 전망대에 올랐다. 눈에 익은 북한산이 아니었다. 사패산, 도봉산, 삼각산(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하나의 파노라마였다. 가히 압도적이다. 북한산의 풍광을 뒤로 하고 봉산을 내려왔다. 서오릉 고개를 지나 서오릉으로 향했다. 그 두 번째 편이다.

추존덕존과 소혜왕후의가 모셔진 경릉. 경릉이 서오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능이다.(사진=위성지 여행작가)
추존덕존과 소혜왕후의가 모셔진 경릉. 경릉이 서오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능이다.(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변고대비 왕릉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조성
-양반의 딸이다한마디, 영조 초야에 소박맞은 홍릉

서오릉 1편에 숙종 얘기가 거창했다. 서오릉이 마치 숙종의 능처럼 되어버렸다. 그렇지 않다. 서오릉은 서쪽에 있는 5기의 왕릉이다. 어떤 독자는 서오릉에는 왕릉이 5개만 있는 줄 안다. 그렇지 않다. 서오릉에는 모두 12개의 봉분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5기의 왕릉(명릉·익릉·경릉·홍릉·창릉)2기의 원(수경원, 순창원), 1개의 묘(대빈묘)가 있다. ‘모두 합쳐 봐야 8개 아니냐는 질문이 이어질 수 있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왕릉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곳에 모여 있는 능을 하나로 친다. 한 곳에 여러 개의 봉분이 있어도 하나의 사초지 안에 있으면 하나의 능이다. 하나의 묘역 안에 있으면 단릉(창릉·홍릉·익릉)이든, 쌍릉(명릉, 숙종과 인현왕후)이든 아니면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묘지, 창릉·경릉)이든 아니면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하나의 언덕에 위아래로 쓴 묘지), 봉분이 세 개를 넘어도 하나의 능이라는 얘기다. 당연히 하나의 능호가 붙는다. 정자각도 하나다.

8개의 묘, 서오릉 가장 큰 어른은 경릉

서오릉의 가장 큰 어른은 경릉이다. 경릉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추존 덕종)의 능이다. 예종의 창릉, 순회세자의 순창원, 인경황후의 익릉, 숙종의 명릉, 정성왕후의 홍릉이 차례로 조성됐다. 1970년대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 씨가 모셔진 수경원, 장희빈이 묻힌 대빈묘가 서오릉으로 옮겨져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럼 왜 왕릉은 이처럼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조성된 것일까. 조선의 기본 법제서인 경국대전에 도성 십 리 밖, 백 리 이내에 능을 조성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혹시 변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때를 대비한 것이다. 산릉제례에 참여한 왕이 하루 이내에 환궁할 수 있는 거리가 백 리다. 서오릉만이 아니라 대부분 왕릉이 서울 근교에 위치한 이유다. 서북쪽과 동남쪽에 몰려있다. 519년 동안 왕업을 이어온 조선은 42기 왕릉이 조성됐다. 이중 제릉(태조의 원비인 신의왕후)과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이 개성, 장릉(단종)이 영월, 영릉(英陵·여주·세종과 소헌왕후)과 영릉(寧陵·여주·효종과 인선왕후)만이 백 리 밖에 있다.

그 이유가 있다. 제릉과 후릉은 경국대전이 편찬되기 전에 조성됐다. 세종의 묘인 영릉은 이장한 것이다. 단종은 폐위된 상태였다. 에피소드가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 화성으로 이장하고 싶어 했다. 많은 신하는 수원까지는 88리라면 이에 반대했다. 정조는 이때 유명한 말을 남긴다. “이제부터 수원은 80라고. ‘수원 80라는 말이 생긴 연원이다.

42개의 왕릉의 구조와 형태는 비슷비슷하다. 금천교를 지나면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 안으로는 묘지 언덕인 사초지가 펼쳐진다. 그 위에 능원묘가 있다. 왕릉 터는 풍수에 밝은 조정 대신이 모여 결정했다. 당연히 풍수지리상 최고의 명당이다.

생기받을 수 있는...최고의 명당 능원묘

 

명조의 맏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 신위가 합장된 순창원.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명조의 맏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 신위가 합장된 순창원. (사진=위성지 여행작가)

특히 생기를 받을 수 있는 자리를 최고의 능원묘 자리로 쳤다. 풍수지리 지침서인 <<금낭경>>죽은 사람은 생기를 타야한다. 생기는 바람을 타면 흩어진다는 대목이 있다. 그래서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왕릉 좌우에 산을 뒀다. 왕릉 주변은 바람이 쉬는 듯 아늑한 느낌을 주는 이유다. 이런 입지를 장풍(藏風)이라고 했다. 생기(바람)은 물을 만나면 한 곳에 머문다. 왕릉 앞에 물(금천, 임수)이 흐르도록 설계한 이유다. 이를 득수(得水)라고 했다. 장풍득수를 줄여 풍수라고 한다. 우리식을 말하면, 배산임수의 명당이라는 얘기다.

서오릉에 묻힌 왕과 왕비의 이승의 삶은 하나같이 기구하다. 이게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가. 경릉의 주인인 의경세자는 약관의 나이에 왕세자 신분으로 생을 마감했다. 동생인 성종이 덕종으로 추존했다. 의경세자는 돌연사했다. 세조가 계유정란을 일으켜 왕권을 빼앗은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영월로 유배 보냈다. 이때부터 건강하던 의경세자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죄책감이었을까. 세조는 능 안은 화려하게 하되 능 밖은 간소하게 하여라고 말했다. 왕세자 신분으로 묘를 꾸미더라도 최고의 명당을 찾으라는 명령이었다. 이 때문일까. 경릉으로 다른 능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선 왕릉의 기본인 난간석이 없다. 석물도 매우 단출하다. 하지만 봉분은 서오릉에서 가장 크다. 또 왕과 왕후가 한 능에 모셔져 있는 경우 상석은 정자각에서 볼 때 왼쪽에 있다.

그러나 덕종은 오른쪽, 부인인 소혜왕후는 왼쪽에 있다. 소혜왕후는 의경세자가 죽은 뒤에도 47년을 더 살았다. 성종 즉위 후 인수대비(대왕대비)가 됐다. 사망 당시 신분이 소혜왕후가 더 높은 탓에 위치가 바뀐 것이다. 의경세자는 왕세자묘로, 소혜왕후의 능은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창릉은 서오릉에서 왕릉으로 조성된 최초의 능이다. 경릉과 창릉은 형제의 묘다.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왕세자로 책봉됐다가 왕위에 오른 예종의 능이 창릉이다. 경릉에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예종도 의경세자와 마찬가지로 20살에 요절했다. 즉위 13개월 만이다.

예종의 직접적 사인은 족질이다. 발에 난 부스럼이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의문이 든다. 증거는 없지만 독살됐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개혁정책에 반대하던 한명회, 신숙주 등 훈구파가 제거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 그의 첫 부인인 장순왕후는 원자를 낳다가 사망했다. 원자도 곧 죽었다. 사후에 예종과 함께 한 부인은 안순왕후다.

경릉과 창릉 사이에 홍릉이 있다. 홍릉은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능이다. 경종 즉위 후 영조가 왕세제에 책봉됨에 따라 왕세제빈이 됐다. 즉위와 동시에 왕비에 책봉됐다. 정성왕후도 영조 못지않게 장수했다. 왕비 자리에 무려 33년을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남자의 여자로서는 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이 없다. 혼인의 초야, 영조가 손이 왜 그리 곱냐고 물었다. 새색시는 양반의 딸이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역린을 건들었다. 무수리 어머니(숙빈 최씨)에 대한 신분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영조가 용서할 리가 없다. 정성왕후는 그날로 소박을 맞았다. 왕비로 33년을 독수공방했다.

홍능은 영조의 원빈 정성왕후의 능이다. 영조가 정성와후 곁에 묻히기 위해 옆자리를 비워뒀다.(위성지 여행작가)
홍능은 영조의 원빈 정성왕후의 능이다. 영조가 정성와후 곁에 묻히기 위해 옆자리를 비워뒀다.(위성지 여행작가)

'남자의 여자불행했던 정성왕후, 독수공방 33

그에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영조는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부인의 묏자리를 직접 봤다. 그리고 그 옆에 묻히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이 묻힐 자리를 비워둔 홍릉을 조성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영조의 능자리가 동구릉에 정해졌다. 이 때문에 홍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봉분 옆자리가 비어 있다.

영조의 후궁 중 한 명도 서오릉에 잠들어 있다. 왕비가 죽거나 폐위가 되지 않으면 새로운 왕비를 둘 수 없는 게 조선의 법도였다. 영조 정성왕후를 찾지도 않았다. 왕비 자리를 빼앗지도 않았다. 대신 수많은 후궁을 들였다. 그중 한 사람인 영빈 이 씨다. 바로 사도세자의 생모다. 1899(광무 3)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영빈의 원은 수경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또 다른 원이 있다. 순창원이다. 명조의 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원이다. 순회세자는 13세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 공회빈도 임진왜란 전란 중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장례도 없이 궁궐 후원에 매장했다. 하지만 후원에 발생한 화재 때문에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순창원에는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신주가 합장되어 있다.

조선왕릉은 어딜 가나 비슷하다. 무덤을 보면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무덤 하나하나가 역사박물관이다. 특히 어느 박물관에서도 볼 수 없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우수가 지났다. 봄이다. 왕릉 봄나들이에 나서보자.

. 홍살문에서 정자각을 잇는 참도. 높은 길은 축문과 신위가 가는 향로, 산릉제례를 올리는 왕이 지나는 어로.(사진=위성지 여행작가)
. 홍살문에서 정자각을 잇는 참도. 높은 길은 축문과 신위가 가는 향로, 산릉제례를 올리는 왕이 지나는 어로.(사진=위성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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