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님 여기 계셨군요."
걸직한 남자의 목소리에 그가 옆을 돌아보았다.
"아, 저는 방배 경찰서에 있는 경찰관입니다. 사모님이 내 놓은 소장 때문에 여쭐 말씀이 좀 있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경찰서로 가시겠습니까?"

정채명은 얼른 사태를 짐작 할 수 있었다. 자기가 내각 정보국에서 나올 때부터 미행자가 있었고 이런 일은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좋아. 당신들의 함정 속으로 내가 순순히 들어가 주지. 그러나 언젠가는 내가 너희들의 입장이 될 날이 올 거야."

그는 형사가 알아듣지 못할 얘기를 중얼거리며 따라 일어섰다.
그는 성폭행 죄로 영장이 떨어지고 다시 영어의 몸이 되었다. 신문 방송에서는 마치 천지개벽이나 한 것처럼 정치인 정채명과 중견 여류화가 방수진의 스캔들과 아내 강간 기사로 매일 홍수가 난 듯했다.

3일째 되던 날 격리 수감되어 있는 정채명에게 아내가 면회를 왔다.
정채명은 덤덤한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미워지지가 않았다.
"여보! 내가 미친년이었어. 그것을 보았을 때는 내 정신이 아니어서 고소장에 도장을 찍고 말았어요. 용서해 주세요."

아내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후회하고 있었다.
아내가 청산 빌딩에서 구출되어 내각정보국 밀실로 조사 받으러 갔을 때였다. 대강의 조사가 끝나갈 무렵 그들은 조 여사를 미치게 만들었다.

방수진과 남편 정채명의 정사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보여 주었다. 더구나 방수진이 자기들 아파트의 위층에 숨겨둔 여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남편을 죽이고 싶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곳에서 조 여사는 방수진을 만날 수가 있었다. 가끔 아파트에서 마주치던 그 여자였다. 조 여사는 방수진의 입으로 모든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 여자가 자기 남편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는 앞이 캄캄했다. 아내는 정보국 요원이 만들어준 고소장에 손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아내는 일생을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 왔다는 거인 정채명이 매스컴에 의해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인간으로 허물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차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자기들이 납치된 것이 남편 정채명의 지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자기가 이 사회의 양심적인 지도자 한 사람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후회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정채명이 한참 만에 진정으로 가슴에서 울어 나오는 말을 했다. 그것은 일생에 한번 아내에게 한 말이었다.
"여보 고소장을 취하했어요. 곧 수속이 끝나면 풀려 날 거예요. 그런데 꼭 한 가지만 물어 보겠어요. 당신 정말 방수진 씨를 사랑해요? 아니죠?"

정채명이 아내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 볼 수가 없어서 흘깃 보았다.
아내의 표정은 형언할 수 없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대답을 기다리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정채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채명은 다시 풀려났으나 옛날의 그는 아니었다. 철저하게 파괴되어 사람들의 발바닥 밑에 팽개쳐져 있었다. 백성규를 비롯한 민독추 관련자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반독재법 위반, 납치, 강도, 강간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시민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다. 그들의 재판은 공개되지 않아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가를 세상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은 사실과 너무나 거리가 먼 내용으로 발표되었다. 

시민들은 아무도 독재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레지스탕스 류의 운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풀려난 스무 명의 사모님들은 모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일부 개각이 단행되었다. 아내가 횡사한 뒤 취중에서 세월을 보내던 박인덕 장관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또 한 사람의 희생자 박상천 해군 장관은 그대로 새 내각에 남아 있었다. 새로운 여자를 찾아 곧 결혼할 것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권위주의 통치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더욱 강화되었다. 언론의 자유를 비롯한 기본권을 제한하는 새로운 법률과 행정조치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그에 못지않게 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학생들과 재야의 저항도 더 파고가 높아졌다.
세상은 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더욱 빨리 달려가는 것 같았다.

조준철과 나봉주는 그해 가을 결혼했다. 거미 부대는 더 이상 나봉주를 괴롭히지 않았다. 쓸쓸한 결혼식이 끝나자 그들은 결혼식 대신 찾아 갈 곳이 있었다.
그들이 신혼여행 대신 찾아간 곳은 전주 교도소 면회실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한 기결수에 대한 면회 신청을 했다.
"경감님!"

그들은 수염이 꺼칠하게 자란 푸른 수의의 곽 영도 경감을 보자 눈물이 글썽해졌다.
"조준철씨 아니오!"
그러나 곽 경감의 표정은 담담했다. 나봉주를 향해서도 약간의 웃음을 머금어 보였다. 그의 너무도 담담한 표정을 보면서 두 사람은 그가 이 세상을 달관한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청담동 사건이 있은 후 곽 경감은 이제 모든 일이 끝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를 곧 알게 되었다.
곽영도 경감은 여학생 임채숙을 성고문한 파렴치 경찰관의 억울한 누명을 벗지 못했다. 그는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 기소되고 여론 재판에 의해 3년 징역형을 받고 교도소에서 너무나 억울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더욱 웃기는 것은 진짜 고문 수사관인 전광대는 수배자이면서도 버젓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 아무도 그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곽 경감은 이렇게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젠 그야말로 달관한 상태에 있었다. 다만 변변한 집 한 칸 없이 청렴하게 살아온 공직 생활 30년을 이렇게 끝을 낸다는 것이 아내와 외동딸 나미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불편한 점은 없어요?"
조준철이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신혼 재미가 어때?"
곽 경감이 다시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쁜 사람들이야. 이 정권은 천벌을 받아야 해."
나봉주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함부로 아무 말이나 하지 말아요. 무슨 누명을 쓸지 모르잖아. 우리는 다만 불행한 권력자를 만난 불운한 시대에 있을 뿐이야."
잠깐 침묵이 흐른 뒤 곽 경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나미가 넣어준 중국 고전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 중에는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명언도 있었어요."
"명언이라구요?"

나봉주가 물었다.
"한비자(韓非子)가 말하기를 크기가 한자밖에 안 되는 소나무도 높은 산위에 있으면 천야만야한 골짜기를 내려다 볼 수 있다고 했어요. 폭군 중의 폭군인 걸왕도 황제라는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 중국 역사상 가장 어진 임금인 요, 순 왕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않았으면 마을 하나도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어요. 나는 그 높은

산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어. 권력을 쥔 자는 자기가 잘나서 칼을 휘두를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 가여운 사람들이야."
언제나 동안처럼 맑았던 그의 얼굴은 더욱 평온해 보였다. 조준철과 나봉주는 들어갈 때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곳을 나왔다. 새로운 정권이 다시 태어났더라도 그것은 한 치의 소나무에 불과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끝]

[알림]

그동안 [이상우 정치 추리 소설 - 적폐공화국]을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 번호를 끝으로 적폐공화국이 마무리됩니다. 1553호부터는 [이상우 정치 추리 소설 - 방원, 복수의 칼]로 새로이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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