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 리더인 듯한 나이가 든 요원이 명령을 했다.
“사람 살려.”
“살려 주세요. 우우우...”
그때 열린 문안에서 여자들의 필사적인 아우성 소리가 들렸다.
“저게 뭐야?”
요원들이 총을 일제히 그곳으로 겨누었다.
“살려주세요.”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들어가 보아!”
리더가 턱으로 명령을 내리자 대여섯 명이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여기예요. 여기!”

안에서 다시 왁자지껄 하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있지 않아 요원들이 여자 인질 스무 명을 데리고 나왔다. 모두가 머리카락이 흩어지고 겁에 질려 창백한 얼굴이었다.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해 허옇게 맨살이 드러난 여자도 있었다.
긴박하게 돌아가던 인질극은 끝났다. 청담동 청산 빌딩 지하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국무위원 사모님들은 일단 내각 정보국으로 모두 이송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몇 시간에 걸쳐 정밀 조사를 받았다.

“아니, 우리는 이 나라 장관들 사모님이야. 우리가 뭐 빨갱이라도 되는 줄 알아. 왜 이러는 거야? 당신 모가지 몇 개나 돼?”
구출된 사모님들은 조금 전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68. 역사에서 빠진 적폐공화국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사모님들. 곧 끝납니다.”
요원 한 사람이 땀을 흘리고 있자 옆에서 보고 있던 성유 국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들 이러시오. 이 나라가 뭐 당신들 나라인 줄 아시오? 장관은 당신들 남편이지 당신들은 아니란 말이오. 정 이러시면 한 열흘 조사를 받게 할 테니 그래도 좋다면 어디 마음대로 떠들어 보시오. 여기가 어딘 줄 알아요? 그 유명한 내각 정보국이란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테죠!”

그제야 여자들은 조용해졌다. 스무 명의 사모님들 중에 그 동안 당한 일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자기들이 영웅처럼 행동했다고 떠들었다.
정채명 장관의 부인 조 여사는 별도로 딴 방에서 조사를 받고 먼저 풀려났다. 조 여사에 대해서는 집중적인 조사를 했으나 정 장관에 관한 것은 거의 모르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도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여자들이 조사를 받고 있는 동안 정부 쪽에서도 바쁘게 돌아갔다.
정채명을 비롯한 소위 민독추의 수뇌를 일망타진하고 보니까 오히려 허탈한 지경이었다.
뜻밖에도 엉성한 조직에 조직원도 몇 명되지가 않았다.

정채명을 최고 지도자로, 백성규와 그 동조 세력 20여 명으로 집행부가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반정부, 반독재 운동을 하는 민독련이나 남독련 같은 학생 조직을 하부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민독추 본부가 계속 과격한 행동을 요구하자 학생 운동권은 떨어져나가고 재야 몇몇 단체만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정권을 인수한 뒤 정채명을 대통령으로, 백성규를 총리로 내세우는 섀도우 캐비네트 내각까지 만들어 놓고 있었다. 거기에는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싸운 몇몇 재야인사들의 이름도 보였다.

의정부 북방에서 적십자 봉사 버스를 납치한 군복 청년들은 모두 백성규의 사조직들이었다. 그들도 청산 빌딩 지하에서 모두 잡혀왔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했구먼... 이 나라가 어떤 나란데... 민주주의 좋아하네.”
정채명 장관이 빠진 채 열린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정일만이 코웃음을 쳤다.
“이번 사건은 없었던 걸로 하라는 것이 각하의 지시입니다. 모든 공식 문서에서 이번 사건을 삭제해야 합니다. 역사에서 지우는 것입니다.”

총리가 엄숙한 목소리로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자들의 황당한 꿈이 성공했더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됐을까요?”
박인덕 공보부 장관이 입가에 약간의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런 가정법은 쓰지 맙시다.”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이 나라는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엉망이 되고 우리는 총살이거나 아니면 감옥에 들어가 있겠지요. 하마터면 그들이 만든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뻔 했지요”
고일수 법무 장관이 거들었다.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오.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장관님 스무 명이 어떻게 되었겠느냐 하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어부인이 없어졌을 테니 독수공방이나 하겠지. 영광스럽게 총살이나 감옥이라니... 이제 회의는 끝내시지요. 총리 각하. 장관님들 빨리 가서 사모님들 침대 위에 때려눕히고 그거 해야죠. 이거 몇 달 만이가. 흐흐흐 참 좋은 공화국이다. 나와 우리 해군 장관 그리고 정채명 대통령만 빼고...”
박인덕 공보부 장관의 주정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 무렵 정채명 장관은 내각 정보국의 밀실에 끌려가 신문을 받고 있었다.
그는 신문을 받기 전에 '일신상의 이유'라는 명목으로 내무 장관 사임서를 써 주었다.
“당신이 야당 하다가 갑자기 변절하고 정부에 들어온 것은 순전히 이 일을 꾸미기 위해서였단 말이지요? 언제부터 그런 기묘한 발상을 하기 시작했지요?”
어깨가 떡 벌어지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조사 요원이 정채명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하룻밤이 지났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참을성 없는 광대뼈의 호박만한 주먹이 여차하면 날아올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이 나라의 국무위원이다. 허튼 수작 하지 말아라!”
정채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곧은 자세로 나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이 늙은 여우가 정말 뭘 모르는구먼. 여기는 그런 점잖은 소리해도 괜찮은 곳이 아니란 말이야!”

광대뼈가 책상을 크게 쳤다. 그러나 정채명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밀실로 누가 불쑥 들어 왔다.
“과장님이 모시고 오래. 석방 시키려나봐.”
그는 정채명 장관을 흘깃 보면서 말했다.
“뭐야? 석방?”

“하여튼 과장님 방으로 가 보아.”
그의 말은 정말이었다. 정채명 장관은 갑자기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내각 정보국 정문을 나섰다. 그는 밖에 나와 신문을 보고서야 왜 자기가 석방되었나 하는 것을 알았다.
정채명 내무 전격 해임.

주먹만한 제목이 눈에 뛰었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 제목을 보고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부인 조 여사가 성폭행, 가정 폭력 죄로 고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정채명은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그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뒤 온갖 곤경을 다 겪었으나 지금처럼 절망적이고 난감한 기분이 되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는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 많은 사람들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발길을 돌려 아파트와는 반대쪽으로 향했다. 급한 대로 아파트 입구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대낮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독재자들이 방수진을 협박해서 꾸민 일임이 틀림없어. 나쁜 자식들...”
그는 참담한 기분으로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신음을 토했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서는 그것이 모함이거나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배신감과 분노로 얼룩진 아내 조여사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간통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대신 이런 법조항을 내세운 것 같았다.

[작가소개] 이상우는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화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 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 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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