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덥지근하다기보다는 끈끈하게 무더운 여름 밤이었다. 허공에 손가락을 대도 땀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바깥 공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방안마다 훌쩍거리는 소리 속에 눈물이 찔끔찔끔 뺨을 타고 내리고 있었다. 10층, 11층으로 솟아 있는 아파트의 비둘기장마다, 다닥다닥 붙은 달동네의 비좁은 안방마다, 하여간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4천만이 모두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느라고 숨을 죽인 그러한 밤이었다.

이산가족찾기가 근 한 달째 계속되던 여름 밤. 모두가 텔레비전 앞에 붙어 나는 이 날도 목마른 감동을 짜내 가며 민족의 비극이니 어쩌니 해가면서 어제와 거의 같은 내용의 기사를 끙끙거리고 써서 데스크에 넘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밤 10시가 가까워서였다. 아파트 단지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내가 살고 있는 16동 맞은 편인 23동 입구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무슨 사고가 났다는 것을 직감하고 직업적인 본능으로 뛰어갔다.

“아니, 날벼락이라는 것이 따로 없구먼, 이게 바로 날벼락이야.......”
웅성거리고 있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가 탄식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들어가 보았다. 아스팔트 바닥에 번질번질한 것이 먼저 위로 뿌리가 드러난 고무나무 한 그루가 나뒹굴어 있고 여기저기 흙과 깨진 화분자국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고무나무 화분이 떨어져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죽었습니까?"
나는 아무에게도 아닌 질문을 던졌다.
“즉사죠, 즉사.”

금테를 두른 23동의 수위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누가 맞았는지 시체는 이미 옮겨지고 없었다.
나는 핏자국이 흥건한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빨간색의 포니 승용차가 문짝에도 피가 튀어 검붉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이 차에서 내리던 사람이 위에서 떨어진 화분을 머리에 맞은 것이군요.”
나는 또 누구에게도 아닌 말을 하면서 위를 쳐다보았다.

1층, 2층, 3층...... 7층까지 있는 아파트의 베란다가 검은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어두운 하늘에 우뚝 서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포의 거인처럼 보였다. 언젠가는 저 높은 괴물이 밑에 지나다니는 개미떼 같은 사람에게 날벼락을 내릴 것이라는 공포를 나는 가끔 느꼈다. 아파트에 이사를 오던 날부터 누군가가 저 위 베란다에서 조그만 실수로 밑에 기어다니는 개미떼의 머리를 박살낼지 있었다. 그것이 마침내 오늘 밤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경찰에 알렸습니까?”
내가 다시 금테 수위를 보고 물었다. 금테 수위는 별 싱거운 놈 다 봤다는 듯이 나를 힐끔 쳐다보다가 말했다.

“벌써 강남병원으로 다 옮겼어요.”
시체를 옮겼다는 말 같았다.
“누굽니까?”
금테는 다시 별 놈 다 봤다는 듯이 내뱉았다.
“308호실 여사장님이랍니다. 이 무슨 날벼락이람.......”
“화분을 조심해서 간수해야지. 그래 사람 잡으려고 그런 걸 위태위태한 곳에 놔 둔단 말야? 아이구 무서워. 이놈의 아파트 빨리...”

아주머니가 침을 퉤퉤 뱉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두어 블록 떨어져 있는 강남병원으로 갔다. 병원 현관으로 들어가다가 낯익은 추 경감을 만났다.
내가 서부경찰서 출입기자로 다닐 때 무던히 나한테 애를 먹은 경감이었다. 요즘은 시경 강력계에 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추 경감 오랜만이오.”

“아니 이게 누구야? 임 기자 아닌가.”
마음씨 좋은 추 경감은 진심으로 반가운 듯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작달막한 키에 부리부리한 눈매, 그러나 결코 악인처럼 보이지 않는 유순한 얼굴의 추 경감은 함박 웃음을 담았다. 그가 웃을 때는 그 큰 눈이   추 경감은 이날 밤 시경 상황실 숙직 근무를 하다가 신고를 받고 이 아파트촌으로 달려왔다고 했다.
“죽은 사람이 누굽니까?”

나는 대강 수인사를 끝낸 뒤 추 경감에게 물었다.
“뭘? 아파트서 화분 벼락 맞은 여자.......”
추 경감은 말을 얼버무리는 것 같았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추 경감은 기자들이 냄새를 맡지 못하게 할 때에는 언제나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런 순진한 성격 때문에 항상 기자들한테 꼬리를 잡혔다.
“피살된 여자 말입니다.”

“나는 그것이 단순한 사고사가 아니란 아직은 살인사건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어요.”
추 경감은 나의 '피살'이란 말에 확실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 여자는 배순실이라고 조그만 봉제회사의 여사장이지.”
“여사장? 얼굴은 예쁩니까? 나이는?”
나는 몇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뱉었다. 추 경감은 내 질문에 답변은 않고 병원 복도를 두리번거리다가 구석에 놓인 자동판매기 앞으로 갔다. 동전을 꺼내 아이스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아이구 더워. 한 잔 합시다.”
추 경감은 복도의 기다란 나무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배순실 사장의 남편은 거도물산이라는 말하자면 부부 사장이지.”
추 경감은 차근차근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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